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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밖 풍경을 보라는데 왜 아이는 창틀을 보고 있을까?

by 김정은

몇 년 된 이야기다. 내 큰애는 이미 중학생이 됐고 작은애는 초5년생이다. 큰애가 어린이집에 다닐 즈음 나와 아내는 아이들을 데리고 자주 여행을 떠났는데, 그때마다 다채로운 창밖 풍경이 아름다웠다. 어떤 호텔은 전창이어서 창밖으로 겨울 나무가 우거진 산 풍경이 마치 병풍처럼 가까이 있었다. 여행의 목적은 아이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는 것이 첫째이나 아이들이 넓은 세상을 이해하고 보고 느끼며 집과 좁은 커뮤니티가 세계의 전부가 아님을 알도록 해 주고 싶은 것도 있었다. 물론 아이들과 시간을 공유하는 일이야 같이 있음으로써 자연 해결되는 일이다. 그러나 넓은 세상을 보여주고 싶은 욕심은 나의 오랜 육아 경험상 좀처럼 채워지지 않았다.


서울에서 강원도까지 가려면 대략 3시간 정도가 걸리는데 서울에서 벗어나 강원도에 진입하자마자 풍경은 확 달라진다. 그러면 내 마음이 급해지곤 했다. 이 장면을 아이들은 어떻게 받아들일까? 내가 느끼는 것을 이 아이들도 똑같이 느낄 수 있을까? 마치 10만 년 전 수렵채집인 시절에 아이들이 그랬듯이 산과 초원을 누비며 자연을 온몸으로 체험하고 받아들일 수 있게 될까?





그런 바람은 단 한 번도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다. 아이들은 먼 산이나 들판, 목초지, 숲과 덤불보다는 차창의 틀, 차창에 묻어 있는 손바닥 자국 같은 것에 몰입할 뿐이었다.


활리야, 저 산 좀 봐. 저 나무 좀 봐. 나뭇잎 색깔이 정말 아름답지 않니?


첫째는 묵묵부답이다. 차 유리창에 입김을 불고 손가락 끝으로 하트를 그리는 중이다. 아, 이럴 땐 정말 할 말을 잃는다. 저거 하라고 여기까지 데리고 온 게 아닌데... 하는 생각이 밀려든다.


아이를 키우는 내내 그런 채워지지 않는 것들과 싸워야 했다. 부모의 욕심은 끝이 없으나 그 욕심 대로 아이들은 움직이지 않는다. 아이들은 저들만의 세계가 있고 그 좁은 세계 안에서 세상을 탐구하고 탐험하기 마련 아닌가?






아마도 대여섯 살 때쯤이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몇 개 남아 있지 않은 유년기의 기억들 중 생각나는 게 있다. 날개가 달려 있는 흰색 장난감 경찰 헬멧이었는데, 나는 그 헬멧을 쓴 나 자신이 정말 경찰이라도 된 듯 자부심이 가득해졌고 만족감을 느꼈다. 사람들이 날 멋지게 쳐다봐 줄거야, 하는 기대감이 가득했다. 그 장면은 지금 사진 한 장으로 남아 있다. 아마도 그 사진 한 장 때문에 그 장면이 기억에 남아 있는 것이리라. 기억이 먼저고 사진이 다음이 아니라 사진이 먼저 있었고 그게 마치 기억으로 남은 것처럼 굳어진 것이라고 보는 게 합리적이다. 사진으로 남아 있는 단 몇 장면만이 내 기억에 남아 있으니까.


아이들이 크면 나와 아내와 가족이 함께 했던 숱한 체험들이 기억으로 남지는 않을 것이다. 물론 나는 사진 인화 시절에 유년기를 보냈으니 남은 사진이 몇 장 안 되지만 내 아이들은 디지털 사진 시대를 살아 유년기의 모습을 담은 사진이 수천 장에 이른다. 그만큼 내 아이들은 나보다는 다채롭게 유년기를 기억하게 되리라.


어쨌든 창밖에 펼쳐진 거대한 자연 풍경을 감상했으면 하는 나의 바람은 늘 채워지지 않았는데 그건 내게 깨달음을 줬다. 아빠와 자녀의 관계란 그런 것이 아닐까? 부모의 기대치는 자녀의 능력치를 언제나 초과한다. 부모는 아이가 할 수 없는 것, 하기 싫은 것, 하기 힘든 것을 바라기 마련이다. 부모와 자녀 간 격차를 부모는 곧잘 망각하는 것이다. 이러한 격차는 평생 이어지는 게 아닐까? 아이들이 성장하면, 부모는 늙는다. 둘 간 격차는 좁혀질 수는 있으나 아예 사라질 수는 없으리라. 그래서 이 둘 간의 묘한 긴장과 다름, 차이는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지도 모른다.





연구에 따르면 일반적으로 뇌는 생후 약 4개월부터 3살까지 가장 빠른 속도로 성장한다. 뇌의 표면적은 11살 무렵에, 대뇌 용적은 12.5살에 정점을 찍는다. 백질 부피는 29세 직전(28.7세)에 정점을 찍는다. 신체 기능과 기본 행동 패턴을 관장하는 피질하부 회백질은 14.4살에 정점에 이른다.


어른들에게 ‘말썽’으로 보이는 영아의 적극적이고 다양한 활동은 뇌발달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고 알려져 있따. 아이들의 뇌는 적극적인 학습자다. 부모의 지시 대로가 아니라, 아이들 자신에게 필요한 학습 활동을 스스로 즐긴다. 사실 부모들이 제공하는 ‘풍요로운 경험’이란 도리어 아이에게 ‘스트레스’로 작용할 수 있다. 아이디어와 개념을 다루는 능력은 초등학교 고학년이 돼야 생기고 그때 비로소 형식적 추리도 할 수 있게 된다.


내가 얻은 결론은 아이들의 속도를 부모가 따라가야 한다는 것이다. 욕심은 자칫 화를 부른다. 많은 걸 주고 싶은 것은 인지상정이나 아이가 원하는 것을 주어야 할 때가 더 많았음을 느꼈다. 물론 아이들에게 풍부하고 다채로운 자극, 경험, 체험은 어느 면으로 보나 이익이 되리라. 부모로부터 무조건적인 신뢰와 사랑, 보호를 받고 있다는 느낌도 중요하다.





학습이든 체험이든, 나는 아이들에게 강요란 걸 하지 않으려 노력했다. 그것은 불필요한 스트레스를 만들고 아이들을 피곤하게 만든다. 그것은 아이들의 정서와 뇌 발달에 좋지 않다.


창밖이 아니라 창틀을 보는 내 아이는 자기만의 방식으로 세상을 탐구하려 했던 것이리라. 나는 참고 기다리며 아이가 성장하는 모습을 그저 지켜볼 뿐이었다. 열네 살이 된 큰 애는 이제 창밖 풍경을 제법 즐길 줄 안다. 내가 그토록 원하던 것을 얻는 데 14년이 걸린 것이다.


야, 창밖 좀 봐라. 너는 스마트폰만 보니?


중1 큰애가 초5 동생을 나무란다. 그 광경을 보고 있자니 웃음이 났다. 이제는 내가 원했던 만큼 큰 애가 자랐구나, 하는 것을 느낀다.


아이들의 성장 속도에 나를 맞추자. 서두르지 말자. 아이는 제 속도로 잘 크고 있음을 믿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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