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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다람 Sep 19. 2022

시를 파는 가게에 다녀왔습니다.

시를 파는 가게, 누구나 꿈꿀법한 가게를 실제로 다녀오게 될 줄을 몰랐다. 그것도 우연히 대동제에서!




서른을 앞두고 다시 학교에 돌아와 정신없이 달려오는 동안, 학교는 코로나로부터 회복되어 예전의 모습을 되찾고 있었다. 덕분에 몇 년간 열리지 못했던 대동제도 다시 부활했다. 다양한 먹을거리와 각종 밈으로 범벅된 굿즈들, 그리고 참신한 이벤트로 가득 찬 부스들을 보고는 벗들이 얼마나 간절히 대동제를 기다리고 준비해왔는지 새삼 느낄 수 있었다.


대동제를 구경하기 위해 학교 곳곳을 돌아다니던 중 같이 있던 친구가 흥미로운 부스를 찾아냈다.


"언니, 저기 시를 지어서 판대!"


"시?"


돌아보니 정말 ‘시를 파는 가게’였다.


"오.. 저거 좀 새로운데? 게다가 사람이 만들어주는 시잖아!"


서로 생각이 통한 우리는 동시에 뒤로 돌아 부스로 향했다.


지난 학기에 힘들게 수강했던 인공지능 수업에 여운이 남아서 그런지, 인공지능이 아닌 사람이 만든 시라기에 관심이 갈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나를 위한 자작시 한 편을 받아볼 수 있다는데, 이런 경험이라면 의뢰비 3,000원 정도는 아깝지 않다고 생각했다.


부스에 들어가자마자 보이는 원숭이 인형이 눈에 들어왔다. 나태한 자세로 구깃구깃한 종이에 ‘시팔아요’라는 문구를 달고 있는 모습을 보고는 내가 마치 시 짓기의 숨고(숨은 고수)를 찾아온 것 같았다. 주위를 둘러보니 책상에 붙어있는 즉석시 제작 안내문이 보였다.


2022 대동제 이화문학회의 즉석시 제작 안내문


Input에 넣을 단어를 고민하다 일단 내가 가장 좋아하는 단어인 '사랑'을 썼다. 다음으로 어떤 단어를 쓸지 생각하던 중 친구가 제안을 했다.


"언니, 너무 비슷한 결의 단어를 넣으면 재미없으니까 완전 반대의 느낌을 주는 단어를 써봐!"


오호? 솔깃했다. 사랑, 행복, 이런 비슷한 느낌의 단어를 쓴다면 진부한 시가 나오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순간 집중을 하고 머리를 싸맸다. 결정하고는 두 번째 단어를 작성했다.


사랑, 괴물


부스에서 신청을 받고 있던 학생은 내가 작성한 두 개의 키워드를 받아보고는 혼란스러운 표정이었다. "왜 저희에게 고통을 주시나요...(흐윽)"라는 말에 조금 미안한 마음이 들기도 했지만 이런 양극의 단어들로 어떤 시가 탄생할지 기대가 되기도 했다.


신청을 마치고 돌아온 순간부터 결과를 언제 받아볼 수 있을까라는 생각에 설레기 시작했다. 점점 메일을 확인하는 횟수가 잦아졌다. Input으로 ‘조금의 기다림‘도 들어가긴 했지만 기다림은 나를 더 답답하게 만들 뿐이었다. 빠르면 당장 내일인 금요일에 받아볼 수도 있다기에 기다렸지만 결국 그날 연락은 없었다. 역시 키워드가 너무 어려웠던 것일까...라는 생각만 들었다.




주말이 돼서 정신없이 하루를 보내다가 아무 생각 없이 메일을 확인해보니 웬걸 메일이 도착해있었다!



제목을 보고부터 심장이 콩닥콩닥해졌다. 얼른 집으로 돌아와 자리를 잡고는 메일을 열어보았다. 시를 읽어보는 동안 나도 모르게 주위가 적막해졌다. 그리고 시를 읽는 내내 속으로 감탄만 나왔다.


뜨거운 악몽 _ 국어국문학과 손수민

밤마다 찾아와 마음을 섬뜩하게 하길래
내 베개는 빗물 자국 마를 날이 없었다

아스팔트에 내딛은 걸음이 끈적하던 계절
아지랑이처럼 가물거리는 네 그림자에 그만,
횡단보도를 다 건너지 못하고 넘어지고 말았다

뎅강뎅강 네 머리를 잘라내고 남은 게 달궈진
가위뿐이었을 때 나는 그걸 한 입에 삼켜버렸다
물리칠 방법이 없길래 이제는 널 기다리기로 했다


누군가를 끔찍할 정도로 사랑한다면 이런 생각이 들까? 증오할 만큼 사랑한 그 사람을 지워내려 해도 아무리 노력해도 소용은 없었다, 결국 그를 잊겠다는 마음을 버리고 그를 기다리기로 했다는 이야기를 시 한 편으로 압축해서 표현해낸 벗의 능력이 새삼 부럽다. (도대체 어떤 삶을 살아온 벗인 건가요?!) 한편으로는 내가 이해한 내용이 맞는지 이 시를 지은 벗의 의도가 궁금하기도 하다.


오로지 두 개의 키워드로, 그것도 '사랑'과 '괴물'이라는 이질적인 느낌의 단어들로 '뜨거운 악몽'이라는 시를 짓는 동안 창작의 고통에 시달렸을 벗에게 너무 죄송하고 감사하다. 시를 의뢰하고 며칠의 기다림 끝에 나만을 위한 자작시를 받아본 일이 특별한 경험으로 기억돼서 오랫동안 기억에 남을 시가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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