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량소녀의 역사
1984년부터 연재된 오렌지로드의 여자주인공, 아유카와 마도카의 모티브는 가수 나카모리 아키나이다.
둘 모두 1980년대 일본을 상징하는 캐릭터였으며, 불량소녀 컨셉을 가지고 있다. 1980년대 일본이 도대체 어떤 사회였길래 불량소녀 컨셉을 가진 두 캐릭터가 인기를 끌었을까?
불량하다는 것은 무엇인가? 술이나 담배를 마구 하면서 욕을 하고 어른에게 대들면서 마구잡이로 행동하면 불량한 것인가? 아니면 근본적으로 다른 무언가가 있어야 불량한 것인가? 불량하다는 것의 정의는 여러가지가 가능하겠지만 다음의 것 하나는 일치한다 : 사회의 통념과 벗어난 행동을 했을 때 불량하다.
1980년대 일본은 대단히 번영했던 사회이다. 전쟁에서 패배한 좌절감을 경제적 번영으로 극복했다. 일본의 물건이 세계적인 신뢰를 얻으며 엄청난 무역흑자를 올렸다. 면접만 보러 돌아다녀도 먹고 살만했던 이상한 사회였다. 대학교만 졸업해도 기업에서 모셔가는 취업걱정이 없는 시대였다. 이제 미국을 이길 수 있겠다는 자신감과 더불어 미국인들조차 일본을 진지하게 두려워했던 사회다.
그러한 번영의 이면에는 미칠듯한 조직의 위계질서, 상명하복 문화, 계급질서가 자리잡고 있었다.
경제번영을 주도한 세대는 전공투 세대, 우리식으로 따지면 운동권 세대이다. 다른 점이라면 일본의 운동권 세대는 학생운동에 비참하다시피 실패했다는 것이다. 그들은 운동이 좌절에 이르자 익명의 세계로 도피하여 경제적 동물이 된다. 그것이 불가능한 사람들은 애니메이션이나 만화의 세계에 몰입했다. 대표적인 사람이 공각기동대의 감독 오시이 마모루이다. 따라서 그의 작품은 대부분 우울함과 고독을 소재로 삼는다.
이렇게 운동에 실패한 세대가 역으로 경제적인 측면에서 대성공을 거두자, 그들은 내심 당황했다. 젊었을 때의 꿈이 처절하게 실패했는데, 그들이 혐오하던 제국주의 놈들의 지시를 받으며 열심히 경제활동을 하자 황당할 정도로 물질적인 풍요에 이르렀다. 그들은 실패했지만 동시에 성공했던 것이다. 정신적인 측면에서 좌절했지만 물질적 측면에서 풍요를 맞이하였다. 따라서 그들은 일종의 정신적 공황상태에 이르게 된다.
이건 전공투보다 젊은 세대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대체로 패전을 경험한 세대의 아들이나 딸이었다. 전후세대는 전쟁을 겪지 못했지만, 어려서부터 아버지 세대의 불안과 우울을 겪으며 살아왔다. 일본이 패배했다는 의식은 그들의 유년기를 지배하던 불안과 우울의 정서였다.
그런데 일본이 번영에 이르자 꿈과 환상의 세계가 등장한다. 애니메이션과 아이돌 산업이 바로 그것이다. 1980년대에 청년이 된 이들은 유년기에 학습된 불안과 우울을 극복시켜줄 무언가를 필요로 하게 된다.
이렇게 불안한 일본사회의 무의식적인 공허함을 규율해 줄 무언가의 상징이나 기호가 필요하게 된다. 마침 그때 나타난 존재가 "불량소녀"들이었다.
이러한 1980년대의 역사적 배경 속에서 "불량소녀"가 인기를 끌게 된다.
https://www.youtube.com/watch?v=RK8KuXyzZ48
나카모리 아키나와 아유카와 마도카는 1984년이라는 같은 해에 약속이라도 한 듯 등장한다.
꾸물거리는 남자에게 정신차리라고 일갈하는 십계의 가사를 보면, 전공투나 당대의 일본 사회가 어떤 여성상을 필요로 했는지 잘 드러난다.
네 놈이 계속 꾸물거리고 아무 행동도 하지 않으면 나는 떠나가버릴테니까 정신차려라, 진짜 이번에도 결단하지 않으면...
그런데 여기서 핵심은 여성은 남성에게 계속 일관되게 꾸지람을 하지만 동시에 떠나지도 않는다는 사실이다.
나카모리 아키나는 불량소녀 컨셉과 더불어 여린 소녀 컨셉도 유지했다. 그녀의 발라드를 들어보면 한없이 순진하고 헌신적인 여성상이 등장한다. 이런 상반된 컨셉을 통해서 그녀는 국민 아이돌 반열에 올랐다.
오렌지로드의 아유카와 마도카 또한 마찬가지다. 담배도 피고 싸움도 잘하는 일진 소녀는 주인공을 만나서 여성성을 드러낸다. 동시에 변덕이 심해서 주인공을 전적으로 받아들이지 않으면서도 주인공을 절대 떠나지도 않는다.
평론가 우노 츠네히로의 이야기처럼 일본사회는 영원한 "모성"을 추구하는, 어머니같은 여성을 추구하는 사회다. 1980년대 일본이 추구했던 어머니는 자신에게 따끔한 충고의 말을 하는 강한 여성이면서 동시에 여린 마음도 가지고 있는 이중적인 여성이었다.
불량소녀는 자신의 속마음을 드러내지만 동시에 선택을 강요하지도 않는다. 꾸물거려서 짜증나고 그래봤자 네가 바뀌는 거나 있겠어?하며 조롱하지만 동시에 뭘 어떻게 하라고까지 강요하지 않는다. 네가 바뀌는 게 없겠지... 하지만 그래도의 방식으로 끊임없이 기회를 준다.
이건 실패한 세대였던 전공투에게 깊은 의미로 다가온다. 다시 한 번 기회를 주는 어머니상, 여성상을 필요로 했던 것이 그들이다. 그들의 인생은 정신적으로 실패했기 때문에 계속해서 또 다른 찬스를 필요로 했다. 그 기회를 주는 여성들이 바로 불량소녀이다.
쿄스케(남자 주인공) : 좋아해? 사랑해?
마도카 : 좋아해!
쿄스케 : 뭐라고!!
마도카 : 하지만 한없이... 사랑에 가깝겠...지
위의 장면에서도 알 수 있듯이 아유카와 마도카는 자신의 속마음을 드러내지만, 그걸 있는 그대로 드러내지 않는다. 한 번 꼬아서 자신의 속마음을 알려준다. 여기서 이 여자의 속마음을 알 수 없다는, 신비스러움이 강조된다.
1984년의 여성들은 불량하지만 동시에 신비로운 여성성을 상징한다. 그녀에게 다가서려하면 거부하지만, 그럼에도 자신을 떠나지 않는다. 도대체 속을 알 수 없는 것 같다가도 어떤 때에는 자신의 속마음을 솔직하게 드러낸다.
이것이 불량소녀를 더욱더 욕망하게끔 하는 이유이다. 다가서려 하지만 동시에 다가설 수 없고, 알 수 없을 것처럼 보이다가 엄청나게 솔직해진다.
타인에 대해서 알 수 없을 때 가장 욕망하고 싶어진다. 모르는 것이 많으면 많을수록 끊임없이 욕망하고 싶어진다. 이것이 꿈의 본질이다. 비밀스러운 기호와 상징으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에 미칠듯이 다가가고 싶은 욕망의 대상이다.
따라서 불량소녀는 1980년대 일본사회의 욕망의 대상이자 동시에 꿈의 세계였다. 질서정연하고 숨막히는 관료사회를 파괴할 수 있는 힘과 매력을 가진 존재이자 자신에게는 한 없이 따뜻한 여성으로서 불량소녀. 이렇게 어머니와 여성이 동시에 공존하는 불량소녀는 1980년대 일본이 갈구했던 반항의 상징이다.
전공투 세대에게는 좌절된 사회혁명의 꿈이 1980년대에 와서 하나의 모성상으로, 여성상으로 대체된다. 어떻게든 이루고싶었던 유토피아를 불량소녀를 통해서 꿈과 환상의 세계로 재구축하려는 시도가 계속된다. 따라서 불량소녀는 유토피아의 대체물이기도 하다.
어떤 사회든지 문화는 역사의 산물이다. 역사적 배경으로부터 문화적 기호나 상징이 출현한다.
이러한 역사적 산물의 배경으로서 1984년 일본의 "불량소녀"는 그들의 번영과 좌절을 동시에 품어줄 수 있는 이상적인 여성이었다.
다시 말하면 그들의 꿈과 같은 세계에서 존재하는 아이돌이 "불량소녀"였기 때문에 이 꿈의 계보는 후대에 "츤데레"로 이어진다. 남에게는 터프하지만 나에게는 따뜻한, 동시에 나에게도 가혹하지만 그래도 나를 절대 떠나지 않는 캐릭터. 아이가 어른이 되고 어른이 노인이 되고, 다시 노인이 아이에게 전달하는 문화는 이렇게 대를 이어 그 역사를 보존하며 계승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