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레이드 러너 시리즈와 타투(1988)/칸트적 세계관의 붕괴라는 미래
블레이드 러너 시리즈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레트로(과거)에 대한 글을 썼으니 이제 미래에 대한 글도 써보려고 합니다.
블레이드 러너는 미래를 다루는 대표적인 영화 시리즈죠. 1982년에 1편이 나왔고, 2017년에 후속작이 나왔습니다.
블레이드 러너 2019(1982년작)는 인간이란 무엇인가?를 다루는 영화죠. 이 영화에서 인간은 “기억”으로 규정됩니다. 하지만 마지막에 이러한 규정을 뛰어넘는 장면이 등장하죠.
영화에서 레플리칸트(인조인간)는 4년밖에 살지 못합니다. 블레이드 러너의 주인공이자 도망간 인조인간을 처형하러 다니는 데커드(해리슨 포드)는 인조인간 레이첼(숀 영)을 사랑해서 함께 하려 하는데요.
데커드를 따라다니며 감시하던 개프(에드워드 올모스)는 마지막에 데커드에게 충고를 남기죠.
“그 여자가 죽게 되어서 정말 안타깝네! 하지만 누군들 안 죽는가?”
어차피 인간이나 인조인간이나 한계가 정해진 유한자(필멸자)에 불과합니다. 그러니 중요한 건 그녀를 사랑하는 너 자체의 행위라는 것이죠. 그래서 데커드는 레이첼과 사랑의 도주를 하러 엘리베이터에 타고 영화는 끝납니다.
이 작품에서 인상적인 부분은 인간들은 모두 쓰레기라는 것입니다. 이 작품에서 인간들은 모두 타인을 수단으로 대하기 급급합니다.
철학자 칸트가 이야기한 적이 있죠. 인간을 수단이 아닌 목적으로 대하라. 이건 다른 말로 하자면 다른 사람을 물건으로 대하지 말고 인격체로 대하라는 말입니다.
요새 엄마가 아이를 버리고, 청소년들이 노인을 욕하고 때리는 사건사고를 많이 접하죠. 세상 참 말세네... 어쩌려고 이러는건가...하고 넘어갈 수도 있습니다만, 깊게 생각해보면 칸트적 세계관이 무너지고 있다고 보시면 됩니다. 타인을 인격체로 대하지 않고 물건이나 사물로 대하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있다는 뜻이죠. 타인을 물건으로 생각하다보니 쓸모없어지면 버리고 두들겨 패는 겁니다.
우리가 열심히 살아왔던 근대적 세계관이 이제 곳곳에서 무너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런 칸트적 세계관이 무너졌을 때 미래사회는 암울할 것이라는 전망이 도출되는 것이지요.
블레이드 러너라는 영화는 놀랍게도 이런 것을 정확히 캐치하고 있습니다. 국가의 시스템이 무너지고 인간의 존재마저도 위태로운 미래사회에서 인간들은 그야말로 “약육강식”의 논리를 가지고 살아갑니다. 인간이 다른 인간을 물건 취급밖에 안 하는 사회인 것입니다. 이런 세계에서 윤리나 도덕, 혹은 철학적 고민을 가지고 살아가는 존재는 인간이 아니라 인조인간(레플리칸트)입니다.
이 테마를 그대로 가져와서 인간에 대한 존재론적 고민으로 연장시킨 작품이 “공각기동대(시로 마사무네의 원작은 1989, 애니메이션은 1995)”입니다. 공각기동대의 주인공 쿠사나기 모토코는 어렸을 때의 사고로 인해 “뇌”만 제외하고 전신이 사이보그인 상태죠. 그래서 이런 질문을 던집니다. 내가 진짜라는 걸 어떻게 보장하지? 누군가 내 기억을 그대로 이식하고 모든 것을 바꿔치기한 상태라면, 그럼 나는 도대체 뭐지?
우리는 이런 고민까지 나아갈 힘이 없습니다. 우리에게 지금 닥쳐오는 현실은 타인을 물건으로 대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는 비참한 문제이기 때문이지요.
블레이드 러너의 최근 작품인 2049(2017)에서도 마찬가지 질문이 나옵니다. 인간들은 인조인간을 벌레취급합니다. 괴물이라면서 주인공이자 인조인간인 K(라이언 고슬링)를 조롱하죠. K는 현상수배된 인조인간을 제거하는 일을 하면서 인간들에게 조롱을 당합니다. 그런 K를 위로해주는 존재는 홀로그램이자 연애 시뮬레이션의 AI캐릭터인 조이(아나 데 아르마스)입니다.
인조인간, 즉 인간을 본떠 만든 가상이 또 다른 가상(AI캐릭터)을 통해 위안을 얻는다는 것은 전작의 제작연도인 1982년과 후속작의 2017년이 달라졌음을 암시합니다.
1982년에는 새롭게 등장하는 컴퓨터라는 가상세계의 문제만을 걱정하면 됐습니다만, 이제 우리 사회는 인터넷의 발달로 인해서 가상세계가 대량 복제되는 사회로 넘어가버렸습니다. 대량 복제되는 가상세계의 문제, 그리고 그것으로부터 위로를 받는 사람들이 늘어나는 사회에 대한 자각이 이 영화의 테마가 됩니다.
블레이드 러너 2049에서는 명령을 착실하게 수행하는 인조인간(러브)과 끊임없이 고민하며 자신의 본질을 찾아가려는 인조인간(K)이 대립합니다. 이제 인간은 인조인간을 만들었다고 뽐내는 전능한 지배자이거나 혹은 인조인간을 조롱하는 존재가 되어버렸죠. 둘 다 타인을 물건으로 취급하는 건 똑같네요. 그러니 진정한 대립구도가 형성되지 않죠. 따라서 인조인간끼리의 대립만이 가능한 것입니다.
이렇게 개판이 되어버린 사회에서 인간성을 지키는 것은 인조인간 K입니다. 이 영화에서 인간은 인간답게 살아가기 위해서 “실존론적 결단”을 행해야만 합니다. K는 대량으로 복제된 AI캐릭터 조이의 광고판을 보면서 인간으로 상승하게 됩니다.
조이가 K를 사랑하는 것이 프로그래밍된 것에 불과한 가짜였다고 하더라도, 그 사랑은 K에게 있어서는 실제로 느끼고 감각할 수 있었던 진짜 사랑입니다. 그 사랑의 느낌과 순간을 깨닫고 K는 전작의 주인공 데커드를 구하러 간다는 결단을 내리죠.
타인이 목적이 되는 삶. 그것이 정말로 인간의 길입니다. 그리고 실존론적 결단은 타인이 목적이 되는 삶을 살아가기로 결단하는 주체적 태도로서, 블레이드 러너 2049에서는 K의 결단으로 나타나는 것이지요.
이러한 칸트적 테마가 영화 전반에 깔려있기 때문에 이 시리즈가 고전의 품격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제목에서 나와있는 또 다른 단어, 타투에 대해서 알아볼까요.
타투는 불량함이나 반항을 상징하는 기호가 아니라, 불안정한 자신의 신체를 통제하기 위한 하나의 기호작용이라는 견해를 예전 글에서 썼던 적이 있는데요.
제가 계속 이야기하는 정신분석가 라캉의 사상에서 모든 존재는 공백이었죠. 이 공백을 파악한 주체는 필연적으로 우울, 공허, 혼돈에 빠지게 됩니다. 이때 공백을 다스리기 위해서 등장하는 것이 상징(언어)입니다. 언어는 내면을 진정시키는 효과가 있죠. 그럼에도 신체가 진정되지 않는다면 거기에 진짜 언어를 새겨넣는 겁니다. 타투가 바로 그것이죠. 그래서 타투는 신체를 진정시키는 기능을 수행합니다.
나카모리 아키나의 노래 타투(1988)는 영화 블레이드 러너 2019로부터 영향을 받아 기획된 곡입니다. 이전에도 나카모리 아키나를 좋아했지만 이 이야기를 듣고서 더욱더 호감을 가지게 되었죠.
이 곡에서는 너의 사랑을 보여줘, 공백의 가슴에, 지워지지 않는 장미를, 너의 사랑을 보여줘, 새겨줘, 나에게 타투를, 이라는 가사가 등장합니다.
공백의 가슴은 텅 빈 가슴이라고 이야기할 수도 있겠습니다만, 이 가사를 놓고 보면 블레이드 러너의 주제와 똑같죠. 사랑이란 타인을 수단이 아니라 목적으로 대하는 행위죠. 타인을 나 자신과 똑같이 생각하기 때문에 가장 목적으로 대하는 행위가 사랑의 본질이죠. 따라서 이 곡의 가사를 통해 해석해보면, 사랑을 통해서 가장 인간다움이 성취되는 것입니다.
아무 것도 존재하지 않는 공백으로부터 있음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공백의 가슴에 사랑이라는 타투를 새겨야만 합니다. 즉 타인을 목적으로 대하기 시작할 때, 우리는 없음에서 있음으로 나아갈 수 있는 것이죠.
블레이드 러너 시리즈와 나카모리 아키나의 노래 타투는 모두 아무것도 아닌 껍데기 같은 인간이 진짜 인간답게 살아가려면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논의합니다.
사실 이 작품들은 모두 미래사회를 다루고 있지만 어찌 보면 당대의 현실과 우리 사회를 다루고 있기도 합니다.
타인을 수단이 아니라 목적으로 대해야 한다는 칸트의 세계관이 무너지고 있는 지금, 이 작품들을 음미하면서 다시금 인간에 대해서 생각해보는 것이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합니다.
추가 : 레트로에 대한 글과 미래사회에 대한 글에서 모두 나카모리 아키나의 역할은 밝은 미래를 소망하는 천사의 역할을 맡고 있죠. 사실 이 글들은 모두 "나카모리 아키나 천사와 악마"에 포함되어야 맞는 글들입니다만, 부득이하게 가치에 중독되는 지점과 일치하여 이 쪽으로 위치하였음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