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은 내담자들이 정신분석가 혹은 상담사를 방문할 때 긴장하곤 합니다. 내담자들은 머뭇거리며 초조해하고 걱정하다가 상담실의 문을 두드립니다. 그도 아니면 예약버튼을 누르지요. 분석가는 내담자의 방문을 기다립니다. 이렇게 어떤 만남이 이루어집니다. 이 만남은 증상의 목소리, 즉 실재의 외침을 들은 이후, 라깡이 세미나11에서 투케라고 말했던 그 만남이 이루어지고 재현되는 하나의 만남이지요.
내담자가 분석가의 사무실에 방문하는 일은, 무의식이 외치기 시작했을 때 이루어집니다. 인생을 살다보면 문득 불안하고 공허하고, 외로워지며 우울하고 아파올 때가 있습니다. 한 순간 정적이 흐릅니다. 그 누구도 뭐라 말할 수 없는, 나만이 느끼는 공허함이 밀려옵니다. 그것은 단순한 느낌을 넘어서는 차원입니다. 어두운 방 안에, 어쩌면 이 세상에 나 혼자 남아있을지도 모른다는 막막함. 오히려 시간은 잘 가지 않습니다. 시간마저 멈춘 것처럼 보입니다. 그 순간 뭔가 아득히 저 멀리서 밀려오는 느낌... 거기서 존재가 희미하게 목소리를 내기 시작합니다. 지금 너는 뭐하고 있는 거니...
이렇게 세상에 홀로 내쳐져있다는 느낌 혹은 감각, 이것을 라깡은 실재와의 만남이라고 말했습니다. 왜 실재reel, real일까요? 현실(리얼리티)보다도 더 진짜인 것이 말 걸어오기 때문이지요. 바로 존재의 근본기분이 불안이기 때문입니다. 그 불안과 함께 밀려오는 것이야말로 현실보다도 더 현실인 기이한 실재입니다.
하지만 무의식의 입장에서는 의식이 그것을 알아차린 것은 너무나 늦었지요. 무의식은, 존재는 이미 예전부터 목소리를 내고 있었으니까요. 사람들과 왁자지껄 수다를 떨면서도, 어딘가 문득 공허한 기분이 들었다면... 혹은 휴일날 공원에 놀러 나온 수많은 인파를 보면서 뭔가 기이한 기분을 느꼈다면... 이처럼 현실이 환상이라는 것, 그런 생각이 문득 들 때마다, 우리가 느꼈던 뭔가 기이한 기분들이 바로 실재와의 만남입니다.
하이데거의 말대로, 우리는 세상 사람들의 인파에 묻혀 평범하게 살아갑니다. 그럼에도 바뀌지 않는 사실은, 우리는 모두 언젠가 죽음에 이를 존재라는 것이지요. 죽음. 그것은 피할 수 없는 절대적 대타자입니다. 우리는 누구나 죽을 운명을 타고 태어났으며, 그것을 피할 길이 없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철학자들의 말 대로 유한자, 필멸자입니다.
그런데 거꾸로 생각해보면, 우리의 삶은 유한하고, 한정되어있기 때문에 살아있는 그 순간이 더 값진 것이지요. 내가 진정으로 바라는 바를 욕망하며 살아가기에도 촉박합니다. 그 매일의 순간들에 귀를 기울여보세요. 내가 진정으로 바라고,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거기서 들려오는 희미한 목소리가 바로 무의식이며, 실재의 외침입니다. 라깡이 말하듯, 실재reel를 거꾸로 하면, 그것은 독일어로 leer, 공백이 됩니다. 바로 공허로부터 들려오는 목소리, 그것으로부터 여러분들은 자기의 본래성을 알게 됩니다.
정신분석가는 그 존재의 목소리가, 방문하는 내담자의 입에서 말해질 때까지 침묵을 지킵니다. 내담자의 자아가, 존재의 목소리를 인수하여 자기의 삶을 살기로 결단할 때까지, 그 결단의 목소리가 구강이라는 신체기관을 통해 발화될 때까지 기다립니다. 정신분석가는 끊임없이 기다립니다. 여러분들의 방문을... 여러분들의 무의식이 말하기를... 그리고 여러분들이 스스로 분석을 끝내고 자기만의 삶을 향해 나아가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