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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전지은 Jan 16. 2023

여고 시절의 추억

             동창회보를 만들며


여고 졸업 후 반세기가 지나서 모교 교정을 찾는 일은 참 새로웠다. 제자리를 지키고 서있는 고목의 목련과 옛 정문 앞 벚나무들 그리고 운동장도 인조잔디를 깔아 깔끔해 보인다. 학교 건물도 벽돌로 단장을 했고, 알루미늄 창틀도 반짝거린다. 건물도 여러 동 증축되었고 도서관과 소강당, 동창회 사무실까지 많은 변화를 알 수 있었다. 새삼 여고시절의 추억이 어제 일처럼 떠오르며 가슴이 달막거린다. 푹신한 트레일을 따라 운동장을 돌며 옛 기억을 불러본다. 건물을 올려다보며 3학년 5반의 교실. 그 옆의 문예반. 맨 위 층의 작은 양호실. 야간자율 학습 전에 뛰어가던 매점. 건물과 건물 사이의 작은 정원. 입구의 목련공원까지.


지난달 한국에 도착하여 친구들과 연락을 주고받으며 동창회보를 만들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신년인사회 때 나누어 줄 것이기에 기일이 좀 빠듯했다. 나도 거기에 실을 글은 이미 미국에서 보냈지만, 혹 도움이 필요하면 이야기하라고 했다. 읽고 쓰는 것을 즐기는 내가 혹시 도움이 된다면 기꺼이 할 수 있다며. 혼자 와 있는 나만의 시간을 보내기에도 의미도 있고 좋을 것 같았다. 그 후 몇 주 동안 가끔 동창회관에 들러, 선후배가 보내온 글들을 읽으며 목차를 만들고 교정을 보는 일을 조금 했다. 여고 시절의 노력이 힘이 되어 여러 분야에서 자신의 자리를 독보적으로 이룩한 후배들의 글을 읽으며 만감이 교차했다. 인쇄소에서 몇몇이 모여 앉아 마지막 교정을 보면서, 그 옛날 교지를 만들던 생각이 났다. 원고지에 손으로 쓴 원고를 한 자 한 자 세어서 그 숫자를 기록하여 신문의 장수를 기획했다. 그리고 그걸 바탕으로 어느 신문사에서 활자 공 아저씨들이 활자를 찾아 가인쇄를 해주면 메케한 잉크냄새나는 것을 펼쳐 들고 붉은 펜으로 빼곡히 고쳤다. 그때도 지금도 자신이 없었던 띄어쓰기나 맞춤법 때문에 여간 고생을 한 것이 아니었다. 밤샘 작업도 마다 하지 않았던 젊음과 열정으로 신문은 만들어졌고 교지도 만들어졌었다. 문예반을 통해 이루어졌던 일들이 이번에도 고스란히 소환되며 그 시절로 돌아간 듯 즐겁고 행복했다. 더구나 일을 너무나 잘하는 후배 두 사람이 있어, 많은 일을 처리했다. 마지막 원고를 넘기고 늦은 저녁 식사를 하며, 그래도 조금은 보탬이 된 것 같아 나름 보람 있었다고, 이런 기회를 주어서 고맙다고.

그러다 다시 여고시절의 이야기로 이어졌고, 단 하나의 후회가 있다면, 공부를 좀 더 열심히 해 좋은 대학을 갔더라면, 하는 것이고. 그랬다면 나의 인생은 달라졌을까,라는 생각을 해 본다고 했다. 이미 지나간 일이고 ‘후회’는 인생이라는 긴 끈으로 본다면 별 도움이 되지 못하는 느슨한 매듭이었다. 그 후회할 시간에 스스로를 다잡고, 더 단단한 매듭을 매는 일을 하기로 마음을 먹은 것은 미국 생활과 동시에 시작되었다. 주어진 환경과 시간에 최선을 다해야만 살 수 있었고, 그것은 생존의 수단이었다. 그래서인지 몰라도 미국생활은 모범생이고 우등생이었다는 역설. 미국에서 대학을 다시 다니며, 그 안 되는 영어로 고군분투했던 기억들이 교정을 돌며 다시 또 아픔으로 다가왔다. 그 아픔은 인생의 더 단단함 매듭이 되어 후회하지 않은 미국 생활을 했다고 자부한다.

그 아픔이 있었기에 오늘의 감사와 편안함이 있다고 나는 감히 말한다. 사춘기의 방황과 갈등과 세상을 온통 떠안았던 것 같았던 무게감을 떨쳐버리는 일은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남편을 따라 미국을 가서야 할 수 있었던 일이다. 그때야 철이 든 것이겠지. 누구도 내게 눈길을 주지 않고 손 내밀어 도와주지 않고 스스로 홀로서기를 하지 않으면 안 되었던 시간. 힘들고 또 힘들었지만 여기서 지면 안된다는 결심 하나로 견디고 또 견디었고, ‘열심’이란 단어 하나만을 가슴에 안고 살았었다.


뒤돌아보면 사춘기 때인 여고시절의 방황이 없었다면 홀로서기가 잘 될 수 있었을까 싶다. 강릉은, 강여고는 그런 의미에서 나의 뿌리이고 나의 성장통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곳이다. 그래도 방황 속에서도 문예반은 열심히 한 덕택에 오늘의 글 쓰는 내가 있을 수 있었다고 생각하며 혼자 미소를 지어본다.

후배들의 글을 읽으며, 친구의 그림들을 만나며, 까마득한 후배들의 장학금 수혜 혜택과 사비를 털어 후배들을 위한 장학금 지원과 미국연수를 약속해 주신 선배님들의 이야기를 만나며 참 흐뭇했다. 이렇게 감사하고 편안한 마음도 오랜 세월을 통해서 만들어진 것이리라.


잘 익은 노년의 모습들을 만나러 강릉여자고등학교 총동문회 신년인사회에 참석했다. 개교 80년의 역사를 자랑하다 보니 우리들보다 훨씬 연세가 높으신 선배님들도 많이 오셨다. 그러나 절반 이상은 얼굴을 모르는 후배님 들이다. 다 같이 한마음이 되어 더 나은 ‘강 여인’들이 되기 위해 화합의 목소리를 내는 장이다. 반백 년 만에 교가를 불러 봤다. “~~~펼쳐라, 우리 강여, 대한의 딸아~~~” 아직도 생생한 가사와 음정처럼 나의 청춘도 아직 그곳에서 생생하게 기억되었다


영광스럽게도 신년인사회에서 감사패를 받았다. 2년 전 가을 책을 출간하고 도서관과 3학년 학생 중에서 미국에 관심이 있고, 간호학과를 지망하는 재학생들에게 책을 몇 권 기증했고, 3학년을 대상으로 특강을 했었다. 별 특별한 준비 없이 있는 그대로 내가 경험했던 미국 생활과 미국의 간호사 상황들을 알려 준 것뿐이다. 책도 마찬가지. 세 번째 책 출간 후였고, 모교의 도서관에 비치해, 후배들이 ‘이런 선배도 있었구나’, 알면 좋을 것 같았다. 책장의 맨 앞에 좋은 덕담을 짧게 써넣고 싸인을 해서 기증을 하였다. 그 작은 일에 감사패라니… 극구 사양을 했지만 이미 계획된 일이라고 하여, 감사한 마음으로 받았다. 상패를 받고 꽃다발까지 받으며, 난 모교를 위해 너무도 한 것이 없다는 생각에 미안했다.


나를 성장시켜 준 곳, 자양분 가득한 토양으로 뿌리를 잘 내릴 수 있게 해 준 목련 나무 동산. 사색의 벚꽃 나무 아래, 늘 내 자리였던 그 벤치. 교과서나 문제집보다 더 많은 소설책과 시집과 수필집을 읽게 해 주었던 도서관. 아직도 오랜 우정을 간직하고 있는 관계의 삶을 틔우던 곳. 어쩌면 내게 주어진 이 감사패는 이곳에 와 있는 동안 좀 더 모교에 사랑의 손길을 보내라는 신호 아닌가 싶다. 아날로그 시대의 할머니가, 설익은 한국의 생활이, 여행객 같은 강릉의 모습들이 아직 새롭지만 돌아온 이곳은 고향이고 청춘이 자라던 모교의 이야기 아닌가. 그 힘들었던 청춘이야 말로 나의 자산이고 나의 사랑이고 나의 뿌리임을…

봄 목련이 뚝뚝 떨어지는 날, 다시 교정에 들어서며 이런 선배도 있었다는 이야기 두런두런 들려주고 싶은 저녁이다. 앙상한 가지 위로 불어 드는 겨울바람에도 대관령으로 넘어가는 햇살이 분홍 빛으로 곱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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