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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전지은 Dec 30. 2022

혼자 보는 뮤지컬

백만 송이의 사랑


엄마를 만나러 강릉에 있으며 연말을 보낸다. 낮에는 친구도 만나고, 성당도 가고, 솔밭을 걸으며 시간을 보내지만, 어둠이 주는 쓸쓸함은 참 무겁게 다가온다.


휴일 오후, 걷기에는 바닷바람이 너무 매서워 혼자 공연을 보러 가기로 했다. 강릉아트센터, 공연과 예매를 클릭하자 ‘백만 송이의 사랑”이 떴다. 마침 낮공연도 있었다. 검색해보니 딱 한자리 남았다. 뮤지컬은 100년 히트 가요라는 부제를 달고 있었으니, 아는 가요들로 이어지는 공연일 듯싶었다. 나는 뮤지컬 관람을 좋아한다. 지난 10여 년 동안 브로드웨이 뮤지컬이 오면 빠지지 않고 관람했다. 정기 회원이었고, 늘 남편과 동행했었다. 혼자 와 있으니 어쩔 수가 없었다. 뮤지컬을 혼자 관람하면 무슨 흥이 날까 싶기도 했고, 혼자? 공연에? 하는 시선들도 있을까 싶어 내심 걱정이 되었다.  


강릉엔 여고 동창들과 초등학교 동창들이 꽤 많다. 늘 만나며 잘 지내고 있지만 가족들끼리 모이는 연말이나 주말엔, 혼자 보낼 수 있어야 한다. 혼자에 익숙한 것은 어린 시절 외동딸로 자라서 다. 혼자 하는 놀이를 많이 했고 결혼 후, 남편과 함께하며 든든하기도 했지만 나만의 공간도 때로는 필요하다고 느꼈다. 그런 나만의 공간과 혼자의 추억을 잘 챙기고 있는 지금. 그 든든한 울타리 속에서 얼마나 편히 지냈던 가를 알 게 되고. 이렇게 혼자 일 때, 옆에 있는 사람의 귀함과 고마움을 더 절실히 알게 되는 것 같다.


공연은 ‘백만 송이 장미’로 시작되었다. 1930년대 독립운동가와 기생의 사랑 이야기로 시작한다. 전쟁이 갈라놓은 사랑이야기는 1950년대이고, 부모님의 반대로 헤어져야 하는 애달픈 사랑은 1970년대를 대신한다. 박수를 치기도 하고 신나는 리듬에 따라 어깨를 들썩거리기도 헸다.

신나는 65분의 일부가 끝났다. 매진 공연이다. 입구 안내에 쓰여 있던 ‘오늘과 내일 공연은 매진입니다’가 확실했다. 앞자리의 두 꼬마들. 초등학생 둘이 엄마와 이모와 같이 왔다. 아이들이 태어나기도 전의 가요 들이지만 둘은 신나게 즐겼다. 뒷자리의 엄마와 이모도 신났다. 엄마는 아이들에게 무슨 뜻인지 설명도 해주며 아주 좋은 시간을 갖는 듯했다. 그 흥겨움은 내게도 느껴졌다.  신나는 노래에는 흥겹게, 한국의 한과 애환이 담긴 노래에서는 같은 슬픔에 젖었다. 시간 가는 줄 모르게 1부가 끝났고, 15분의 휴식시간이 주어졌다. 스트레칭도 하고 묵음으로 해 두었던 전화를 꺼내 급한 연락은 없었는지 확인도 했고 프로그램도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한국 뮤지컬에 문외한인 내가 아는 배우가 있을 리 만무했지만, 나중에 찾아보면 될 일이고. 노래의 제목들은 눈에 익은 것이 많았다. 그러나 한 번도 들어 보지 못했던 ‘다방의 푸른 꿈’ ‘독립군가’ 같은 그 시대 배경에 가장 어우러진 노래들도 있었다. 기회가 되면 한번 배워 보아야 하겠다는 생각을 하는 순간, 2부 막이 올랐다.


“아파트” 1980년대 강남진출의 상징이었던 아파트. 그런데 마이크도 음향 효과도 작동이 되지 않았고 배우는 목소리로만 노래를 불렀다. 그러자 관중 들 중에 누군가 따라 부르며 손뼉을 치기 시작했고, 모두 다 한마음이 되어 같이 불렀다. 한 곡이 끝나고 무대에는 불이 들어오며, 음향시설에 문제가 있어 고쳐야 하니, 조금만 기다려 달라는 양해의 말을 했다. 어느 공연이든 예기치 않은 사태는 발생할 수 있다. 모두들 핸드폰을 꺼내 보거나 관람석 밖으로 나가 음료수를 사거나 하며 시간을 기다렸다. 기다리는 시간은 예상보다 길어졌고, 배우 2 사람이 나와 뭔가 시간을 메꿔보려고 하였다. 남자 배우는 물구나무서서 걷고, 여자 배우는 귀에 익숙한 캐럴 송을 불렀다. 기다리는 시간이 꽤 되었는데도 관객들은 기다렸다.

음향기기를 고치는데 소요된 시간은 약 45분쯤. 2부는 다시 “아파트”로 시작되었다. 1980년대의 부의 상징이었던 아파트와 데모에 앞장서는 학생운동가의 사랑으로 이어졌다. 1990년대와 2000년대로 대변되는 ‘춘천 가는 기차’ ‘취중 진담’ ‘너의 의미’등의 가요는 생소했지만 그 가사의 의미는 깊었다. 그 어느 시대에도 진정한 사랑은 언제나 우리들의 삶 속에 녹아 있었던 것을.


다시 배우들과 관객들이 혼연 일체가 되어 리듬을 즐기며 노래를 따라 불렀다. 어쩌면 중간의 예기치 못한 사고 때문에 더욱 친밀하게 느껴졌는지도 모른다. 2부의 65분도 신나게 지나갔다. 무대가 끝나고 커튼콜은 받은 배우들 중에 울먹이는 사람도 있었다. 공연을 망쳐졌으면 어쩔 뻔했을까 싶은 안도감, 끝까지 자리를 뜨지 않고 뜨겁게 호응해준 관객들에게 감사한 마음이리라.

밖으로 나오자 날은 이미 어두워졌다. 내비게이션에 돌아올 집 주소를 쳤다. 아직 익숙하지 않은 운전에 혹 실수를 할까 싶어서. 바다는 하얀 포말의 긴 물줄기들을 만들며 으르렁거린다. 난 이렇게 집 채 만한 파도가 삼킬 듯 달려드는 바다를 좋아한다. 내 가슴속에 남아 있던 그 어떤 앙금도 말끔히 씻어 내가는 것 같아서. 혼자서 본 뮤지컬. 아주 좋았다. 이렇게 이곳에서 살아가는 법을 배운다.

미국에 전화를 걸어 혼자 뮤지컬을 보고 왔다는 이야기를 무슨 무용담인 것처럼 호기롭게 펼치며, 혼자 잘 지내고 있으니, 걱정 말라는 이야기도 덤으로 했다.

“그래? 혼자? 매주 무슨 공연이 있나 찾아보고, 즐겁게 보내도록 해. 같이 갈 친구가 있으면 더 좋고…”

“친구가 마침 서울을 가서… 다음에 같이 갈게. 근데 혼자도 괜찮던데? 하하하”

“당신은 원래 혼자 잘 놀아.”


유년 시절 그랬고, 병원에서 유일한 한국 간호사 일 때도 그랬으며, 지금도 혼자 이렇게 나와 있는 이 시간이 온전히 나를 충전할 수 있는 참 좋은 시간인 것 같다. 스스로의 내면을 볼 수 있는 시간. 어두움과 쓸쓸함을 파도에 던져 버린다. 한 해를 보내고 또 다른 새해를 맞으며 이 귀한 시간들, 백만 송이 사랑으로 엮어가며 가슴속에는 붉은 장미가 만개하도록 환하게 웃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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