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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전지은 Feb 09. 2023

‘최선’이라는 이름 하나로

스스로 칭찬하기


1984년 여름 미국행을 택했으니, 그곳에 산 것이 한국에 산 시간보다 훨씬 길어졌다. 유학생 아내로 떠나던 김포공항. 한여름 장맛비는 엄청나게 내리고 있었다. 아이의 3돌이 지난 3일 뒤였다. 이민가방 2개에 책이 반이었고 나머지는 아이의 옷가지들과 금방 필요한 생필품들이었다. 긴 비행 끝에 도착한 미국의 크기에 기가 죽었고, 살아남아야 한다는 생각 하나만 있었다. 결혼을 할 때까지, 말 그대로 공주였던 무남독녀 외동딸이, 생면부지의 사람들과 어울려 살아가야 하는 신세계. 말처럼 멋진 것도 아니었고 파티가 연속인 미국 생활도 아니었다. 유학생이라는 현실과 마주 서야 했다. 더구나 ‘영어’는 나의 기를 죽이며 가슴을 조여왔다.


남편의 등록이 끝나고, 가을 학기부터 아이가 대학 내에 있는 어린이 집에 갈 수 있게 되자, 나는 가장 급선무인 영어를 시작했다. 치열한 전투에 나가는 용사의 마음처럼, 결연한 의지로 시작된 현실 속의 나. 모자랐던 영어 실력을 인정했고 현실과 마주했다. 영어에 익숙하지 않은 이민자와 유학생 가족들이 많았던 캘리포니아의 작은 동네의 고등학교. 영어가 모국어가 아닌 나 같은 사람들을 위해 운영되는 야간 학습 프로그램이었다. 시험을 보고 레벨을 나누었지만, 난 시험을 보지 않고 가장 초보부터 배우겠다며 등록을 했다. 그리고 눈이 오나 비가 오나 저녁시간이면 학교에 갔고 ‘ABC, I’m a girl/boy.’부터 다시 시작했다. 대학을 중심으로 형성된 도시는 작고 안전해 자전거로 통학이 가능했다. 이른 저녁을 먹고, 남편이 학교에서 돌아오면 난 페달을 열심히 밟아 학교로 향했다. 아이와 남편이 학교를 간 낮 시간에는 종일, 민병철 생활영어 테이프를 듣거나 영어교과서를 소리 내어 읽는 것에 시간을 썼다. 부엌일을 하거나 청소를 할 때면 늘 CNN이 틀어져 있었다. 그렇게 한국말과 담을 쌓고, 얼마의 시간이 지나자, 영어가 들리기 시작했고, 말문이 트였고, 걸음마 같은 영작을 할 수 있었다.


말문이 조금 트이자 미국생활도 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자신감도 슬슬 생기기 시작했다. 생존을 위한 다음 단계로, 간호사 시험에 도전하기로 목표를 정했다. 다행히 동네에는 간호사 시험 준비를 위한 학원이 있었는데, 문제들을 듣고 푸는 방식이었다. 물론 교과서를 읽고 가야 했고, 종이로 된 문제집을 풀었다. 동시에 헤드폰을 끼고 들으며 답을 푸는 트레이닝 같은 수업이었다. 종일 그곳에서 간호학 교과서를 읽고, 요점 정리를 하고, 문제집을 풀고, 테이프를 듣고, 저녁이면 일반 영어를 공부를 했다. 나머지 시간엔 남편 대학의 도서관에 쭈그리고 앉아 학원에서 못다 한 부분들을 공부했다. 도서관을 오가던 한국 유학생 중 누군가 그렇게 말했다. ‘석 박사 하는 자기네 보다 민석이 엄마가 공부를 더 열심히 한다고.’ 늘 그 자리에 앉아 있는 내 모습이 안쓰러웠을 수도 있고, 학위를 딸 것도 아닌데 왜 저렇게까지 해야 하나 싶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기초가 없었던 나로서는 그 방법 밖에 없었다. 초심이 되어 처음부터 차곡차곡 쌓아야만 한다는 것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두어 번의 시행착오 끝에 미국 간호사 시험에 합격했다.

그리고 그 어설픈 영어로 취직을 했고, 취직과 동시에 병원이 스폰서를 서 주어 가족 모두의 영주권을 한방에 해결했다.

날개는 달렸고, 이젠 비상을 하기만 하면 되었다. 남편의 박사과정 중이었기에 나도 대학을 다시 다니겠다고 나섰다. 난감한 듯 말을 하는 남편에게 ‘왜 당신만 공부해야 하느냐고? 나도 공부라는 걸 좀 해 봐야 하겠다’고 우겼고, 결국 간호대학에 입학을 하였다. 만학도. 내 나이 32에 시작한 일이었다.  신입생들은 거의 20세 미만이었지만 다행히 나와 비슷한 연배의 친구가 하나 있었다. 우리 둘은 수업이 있거나 실습이 있는 날이면 늘 붙어 다녔다. 그녀는 내가 못 알아들었던 강의 부분을 수업이 끝나고 물어보면 참 친절하게 가르쳐 주었다. 그녀는, 나에게 한번 더 자세히 설명을 해 주는 것이 자신에게는 복습이 된다며 좋아했다. 나의 공부 방식은 철저한 예습이었다. 읽고 가면 좀 못 알아듣는 강의가 있어도, 대충 무슨 말인지는 써 놓은 후, 다시 한번 친구와 마주 앉아서 설명을 듣다 보면 이해가 되었다. 4년 내내 우린 붙어 다녔고, 나는 소수민족들에게 주는 우수 장학생으로 친구는 우등생으로 졸업을 하였다. 그 4년의 시간 뒤돌아보면 참 치열했다.


그러면서 아이는 초등학교에 입학하게 되었다. 아침이면 아이 준비시켜 학교에 데려주고, 남편은 나를 태우고 등교를 했다. 나는 간호대학 앞에, 그는 자연대 화학과 앞에. 점심시간이면 구내식당에서 만나 점심을 먹고, 수업이 일찍 끝나는 사람이 아이를 픽업해 집으로 돌아갔다. 늦게 끝나는 사람은 시내버스를 타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때는 중고차 한 대도 우리에게는 과분하였으므로.

둘 중 먼저 하교하는 사람이 저녁을 준비하며 컴퓨터 앞에서 숙제를 시작했다. 집 컴퓨터는 한 대. 학생은 셋. 누구든 먼저 컴퓨터 앞에 앉는 사람이 임자였다. 거의 대부분 아이가 우선이었지만, 아이의 숙제가 끝나면 남편과 나는 서로 먼저 컴퓨터를 차지하려고 눈치 싸움을 하기 일쑤였다. 그동안 집안일도 하고 예습도 할 수 있어 나쁘지는 않았다.


그 당시, 난 병원에서 풀타임으로 일을 했는데 일주일에 12시간짜리 3일을 일을 하면 풀타임으로 쳐주어, 그것을 선택했었다. 3일 병원 일을 하고, 4일 동안 학교를 가는 억척 아줌마. 병원 근무일에는 퇴근 시간이 저녁 8시쯤이었다. 종일 일을 했고 늦은 저녁을 먹고 나면 피곤은 한꺼번에 밀려와 아무것도 하기 싫었지만 그다음 주에 들어야 할 과목들의 예습은 미루어 둘 수 없는 숙제였다. 밑줄을 치며 읽고, 혼자 내용 정리를 해두고서야 잠이 들 수 있었다. 숨도 못 쉬게 빡빡한 일정 속에서 치열하게 살았던 4년, 시간이 없어 부부 싸움 한번 제대로 못했다면 이해가 될까?


누군가 지금 나에게 ”그 시간으로 다시 돌아간다면 똑같이 그 일들을 할 수 있느냐?”라고 묻는다면, 자신 있게 “네”하고 대답하지 못할 것 같다.  그때는 그게 최선이었다. 경제적으로 한국에 비빌 언덕이 있는 것도 아니었고, 스스로 살아남아야만 한다는 절실함이 우리들을 옥죄고 있었다. 그렇게 하지 않았다면 남편의 박사과정도 나의 간호학사도 물거품이 되었을지도 모르니까.

돌이켜보면 내 인생에서 스스로에게 가장 철저했고, 가장 절실했고, 가장 치열했던 4년이었다. 뒤돌아보며 이쯤에서는 그 시절의 젊음과 열정에 등을 툭툭 두드려주며, 그것 만이 ‘최선’이었고, 그 시간에 최선을 다했기에, 오늘의 편안함이 있다고 스스로에게 칭찬해도 되지 않을까 싶다. 늘 하는 이야기이지만, 석양의 편안함도 여명의 하늘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일이라며. 따스한 저녁노을이 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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