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석이 보낼 게.” 전화를 받았을 땐 갑자기 왜? 하는 마음이었다. 가을이니까,라는 답에 할 말이 없었다. 아들을 보낸 다는데 이유를 묻는 나. 갑자기 못된 엄마가 된 것 같았다.
책 출간을 위해 강릉에 왔다. 아들이 오면 해 줄 수 있는 것들이 꽤 있을 것 같았다. 사실 아들과 둘 만의 시간이 있었던 것은 거의 없었다.
가족여행은 남편과 아이와 늘 셋이었고, 대학생이 되며 연세대 어학당을 다녔던 일 년 동안에는 외할머니와 셋이 있었다. 아들은 대학으로 떠나며 짐만 집에 있을 뿐, 방학 때 집에 와도 밖으로 나돌았고 아주 가끔 집에 있을 땐 늘 남편도 있었다. 대학 졸업 후 손님 같던 아들. 둘이 앉아 사는 이야기, 삶 속의 고민, 미래에 대한 설계, 그런 걸 얘기할 시간이 없었다. 나도 아들도 말이 없어서 라는 이유만으로 이해가 될까?
퇴직 전까지 나의 일상은 늘 종종걸음이었다. 나의 미국 생활 40년, N잡러가 아니었던 때는 거의 없었다. 학생이며 간호사였고, 간호사이면서 사업장에서 일했다. 바쁜 엄마를 바라보는 아들. 곁을 내줄 시간도 여유도 없었던 엄마. 아들이 바라보는 시선은 어땠을까? 궁금했다.
엄마가 원해도 시원치 않을 판인데 왜 오냐 물었던 나의 생각이 너무 짧았다. 아들이 오기로 한 날짜가 다가오자 마음은 들뜨고 분주해졌다. 우선 뭘 해서 먹이지. 어디서 한국의 아름다운 가을을 보여주지, 좋아하는 음식은 쉽게 준비할 수 있지만 가 볼 곳은 딱히 생각이 나지 않았다. 폭풍 인터넷 써치를 하며 다른 여행객들의 사진과 후기를 보며 몇 군데를 골랐다.
강릉역. 아들은 커다란 여행 가방을 들고 에스컬레이터를 올라왔다. ‘왔네? 오느라고 힘들었지?’ 하며 커다란 덩치의 아들과 반가운 허그. 집에 도착해서 짐 풀고 샤워를 하는 동안 엄마의 솜씨를 뽐낸 한상 차림이 준비되었다. 와인 한잔과 맛있게 먹는 아들. 마주 앉아 있는 나는 먹지 않아도 배가 불렀다. 와인잔이 서너 번 부딪히고 적당한 취기가 오르며 아들이 오길 너무 잘한 것 같다. 첫날엔 와인잔을 부딪히는 것으로, 맛있는 엄마 솜씨를 즐기는 것으로 족했다. 아들은 시차 때문에 일찍 자리에 들고 나는 남은 음식들을 정리하며 괜히 뭉클해졌다. 살다 보면 이렇게 편안한 마음이 되는 시간도 오는구나 싶었다.
다음날 아침, 문밖의 소리에 잠이 깼다. 새벽 3시. 미국에선 해가 중천에 떴을 시간. 이불을 박차고 일어나 ‘굿 모닝’하며 나갔다. ‘어, 내 소리에 깼어?’ 하는 아들에게 커피 줄까, 하며 부스스한 머리를 쓸어 올렸다. 커피 향이 가득한 아침. 따뜻한 밥을 짓는다. 다시 그럴듯한 아침 상이 준비되고 오늘의 일정을 알리며 가을을 만나러 가기 위한 브리핑이 시작됐다. 국제 면허를 안 만들어 온 아들은 엄마가 혼자 운전을 해야 하니 너무 멀리 가는 것은 하지 말자고 한다. 그래? 그럼 강릉 주변만 둘러보자. 다시 가보고 싶은 곳 있어? 먹고 싶은 것은? 가보고 싶은 곳은 ‘심곡 부채 길’이고 먹고 싶은 것은 ‘감자전과 오징어 회’. 천상 강릉 아들이다 싶어 혼자 웃는다.
첫날, 미리 예약해 두었던 피부과에서 피부 손질을 하고 중앙 시장에서 3000원짜리 장 칼국수를 사 먹으며 둘만의 시간이 시작되었다. 강릉 소주와 맥주, 막걸리를 사고 중앙시장 먹거리들을 몇 개 사자 짐은 꽤 무거웠다. 아들은 짐을 들고 편안하게 시장통을 누빈다. 짐꾼이 된 아들의 뒤를 따라가니 그렇게 든든할 수가 없다.
매일의 일정은 빼곡했다. 다음날 동해 무릉계곡에서 외할아버지의 시비 찾아 조금 앉아서 땀을 식히고 용추폭포로 향했다. 내려오는 길 너럭바위에 앉아 시냇물에 발을 담그며 시원한 마음.
다음날은 경포호수를 한 바퀴 돌며 외할아버지의 시비를 또 만났다. 그다음 날은 주문진 어시장. 또 그다음 날은 심곡 부채 길. 그리고 설악산 권금성. 거의 매일 함께 걸었던 송정과 안목의 해변 솔밭 길. 함께 미식축구와 야구를 보며 아침 식사를 하고, 저녁이면 함께 걷는 해변 솔밭 길. 운전을 하는 내내 옆자리에서 조곤조곤 이야기를 하는 아들.
대학 때 떠났던 아들은 어렸다. 마흔이 넘어 내 곁으로 돌아온 아들은 제법 어른이 되었다. 생각의 깊이나 삶을 바라보는 태도가 나보다 어른 같은 아들. 단풍이 곱게 물드는 산세에서, 솔밭으로 불어 드는 해풍 사이로, 해무 자욱한 해변가에서 가을의 추억들이 차곡차곡 쌓였다.
아들은 며칠 후 미국으로 돌아간다. 지난 일요일 서울로 갔다. 친구를 만나 며칠 지내고 돌아갈 아들. 며느리의 남편이 되었다는 생각을 조용히 잠재운, 돈 주고는 못 살 귀한 시간들. 아들과 함께 했던 열하루는 내 삶의 의미 있는 선물이었다. 가슴속 올 가을이 완전히 익어 고운 색으로 켜켜이 쌓였다. 시간이 지나며 이번 가을을 한 장씩 들추어 보며 추억하는 시간들은 오랫동안 가을 무늬로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