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부터 강릉은 커피의 도시가 되었을까? 내가 알고 있는 상식으로는 커피나무는 열대지방에서 잘 자란다. 케냐, 에티오피아, 브라질과 하와이의 코나 커피가 세계적인 명성을 얻고 있는 것은 별 다방 애용자가 아니더라도 아는 일이다. 그런데 늘 서늘한 바람이 부는 대관령 자락에서 커피나무를 키우기 시작했다는 테라로사의 주인과 보헤미안의 커피 명장은 시험정신이 강했던 것일까.
20여 년 전, 대관령 밑자락 창고 비슷한 건물에서 커피를 볶는 모습을 보며 저건 산골까지 찾아와 준 이들에 대한 접대성 눈요기라고 믿었다. 물론 우매한 나의 안목이었지만. 몇 해가 지났을까 강릉을 올 때마다 찾게 되는 작은 바닷가 마을에 하나 둘 커피 전문점이 생겼다. 각 카페의 커피 향이 다르고 함께 하는 빵과 쿠키의 맛이 각각 다르게 특성화해갔다. 그러더니 이젠 도시 전체가 커피빈을 볶고, 갈고, 내리고, 파는 것 같다. 등록된 카페만 200여 개. 인구 20만의 소도시에서 턱없이 많은 숫자. 강릉 시민은 모두 커피만 마시며 사는 가 싶다.
2009년 제1회 커피 축제를 안목항에서 시작했다. 그때는 각 카페마다 작은 시음 부츠를 만들어 방문객에게 맛보게 하였다. 카페의 특성에 맞게 생음악을 연주하거나 강의를 하거나 시연을 해 보이기도 했고. 이젠 입소문을 타며 전국의 축제 중 가장 유명한 것으로 자리 잡았다. 지난 주말 제16회 강릉커피 축제에는 44만 명이 다녀 갔다는 통계. 시민들보다 2배가 넘는 방문객을 맞이했던 강릉. 안목과 송정 해변은 그야말로 인산인해였다. 커피 거리 부근 길에는 끝없이 자동차들이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밤이 되면 솔밭사이로 불빛들이 반짝이며 새어 나왔다. 늘 걷는 해안가 길에는 수신호를 하는 경찰과 모범택시 기사님들이 유니폼을 입고 종일 수신호를 하고, 공용 주차장은 모자라서 먼 곳에 차를 대 놓고 걷는 사람들은 소풍 가는 모습을 닮았다. 해안가 숲길에 그렇게 많은 인파를 본 적이 없다.
제법 찬바람이 일었던 목요일 오후, 축제의 첫날이었고 마침 서울에서 친구도 와 있었다. 절친과 셋이 불빛을 찾는 나방이 되어 걸어갔다. 차가운 바닷바람 사이로 향긋하게 배어 오는 커피 향. 흰색 텐트들이 각자의 작은 간판을 걸고 커피와 곁들여 먹을 수 있는 쿠키와 빵, 젤리들을 팔기도 하고 시내 커피 전문점들도 시음 행사를 한다. 2킬로 미터 정도의 해안선에 차도를 막고 길게 차려 놓은 흰색 텐트의 상점들. 솔밭들 사이사이에 임시로 만들어 놓은 테이블과 의자를 대여해 주는 센스. 일회용도 있었지만 세척 후 다시 쓸 수 있는 용기를 사용하는 지혜도 좋았다.
커피의 메카인 안목항으로 걸어가면 바다가 보이는 곳에서는 비치파라솔을 세우고 그 아래에서 작은 소품들을 파는 가게들. 커피는 기존의 카페에서 시음을 하거나 사서 마실 수 있었다. 강릉항이 가까운 백사장에는 야외 공연장이 만들어져 다양한 공연이 펼쳐지고. 송정 해변에 자리 잡은 작은 호텔에서는 전체를 방문객들에게 개방한 듯했다. 작은 도서관처럼 생긴 일층 로비에서부터 커피와 인문학이라는 주제로 여러 개의 강의를 이어갔다. 프로그램을 찾아 3층의 한 곳을 가 보았는데 생각보다 너무 사람이 적어 약간 실망. 조금 앉아 있다가 나왔다.
커피 맛이 제일 근사하다는 곳에서 커피를 마시고, 커피와 두부를 섞어서 만들었다는 커피콩 빵을 사고, 눈에 띄는 찻집에서 차도 샀다. 매일 걷던 해안 숲길에서 만난 커피 축제. 며칠 동안 함께 축제를 즐기는 호사가가 되었다. 예전엔 종합 운동장, 시내의 월화거리, 각 카페 등에서 했는데 올해는 안목과 송정을 잇는 해변. 야외, 그것도 해안가 숲길. 탁월한 선택이었다. 가을바람과 풍경도 한몫 거들었다. 손에 닿을 듯한 푸른 바다는 흰 포말을 만들었다 부수고, 반짝이는 윤슬들은 물결을 타고 출렁이고, 바다내음은 솔밭 숲길에 머문다. 그 사이에서 어우러지는 고소하고 향긋한 커피 향. 완벽한 조화를 즐기는 방문객들. 축제의 진수가 여기에 있었다.
대한민국은 전국이 온통 축제 중이다. 이름만 붙이면 축제가 되는 요즈음. 16회라는 역사에 걸맞게, 커피의 도시라는 명성을 오래 지켰으면. 축제의 꽃인 밤하늘의 불꽃놀이를 베란다에서 올려다보며 기원의 마음도 함께 담는다.
새벽잠이 깨면 블랙커피 한잔 마시며 하루를 시작한다. 이어지는 차 한잔, 그 향긋함과 은은함으로 이어지는 아침. 새벽 해안길은 신선하고 길손이 떠난 해변 솔 숲길은 유유히 제자리를 지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