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슨 의미일까?
하얀 감자꽃 같은 것이 가득한 밭이었다. 초록 잎도 풍성하게 흰 꽃과 어우러져 아름다웠다. 잠을 깨고 보니 꿈속에서 본 풍경은 한 폭의 수채화처럼 선명했다. 그 밭 옆에서 엄마와 나는 손을 잡고 하염없이 밭을 바라보고 있었다. 우린 언덕 위였고 서로 말은 없었지만 풍경은 평화로웠다. 엄마는 젊은 시절 곱게 단장한 머리에 좋아했던 보라색의 원피스 같은 걸 입고 있었다. 나의 옷 차림새는 생각나지 않는다.
새벽 5시 반, 잠을 깨, 커피 한잔을 놓고 컴퓨터 앞에 앉자 지난밤 꿈이 너무 선명했다. 엄마가 천상으로 떠나신 지 1년 반이 지나가고 있는데, 꿈에 만난 것은 처음이다. 꿈속에서 엄마의 모습이 너무나 평온했고, 풍경도 아름다웠기에 마음은 가벼웠다. 너무도 그리웠던 엄마였기에, 이렇게 모습을 보니 안도감이 생기는 것은 숨길 수 없는 사실이다. 천상에서도 잘 계시는구나, 하는…
주일 미사를 다녀온 오후. 우리 집에서는 남편 고등학교 동창들의 모임이 있었다. 전날, 청소에, 요리에 바빴지만 반가운 얼굴들을 만나는 시간이 기대된다. 반짝이 불이 켜지는 크리스마스 스웨터를 찾아 입고, 캐럴 송을 틀고 발걸음도 가볍다. 남편 동창들도 서로 반갑겠지만, 사실 이 모임은 우리가 더 재밌다. 대광(大光) 고등학교에서 따온 ‘대강여고’ 단톡방을 만들고, 우리끼리 사연을 올리며 낄낄거리기도 하고, 음식을 준비할 때면 무엇을 할 건지 올리기도 하고, 안부를 전하기도 한다. 어쩌면 남편 고등학교 동창모임이 잘되는 이유는 와이프들이 친한 이유도 있다.
2시 반, 브롱코스의 게임이 시작되었다. 아래층에 모인 남편들. 맥주와 핑거푸드와 떡이 준비되었다. 게임 시작 얼마 되지 않아 ‘아~~’하는 탄식이 들린다. 선점을 내주었구나 싶다. 마음은 나도 아래층에서 같이 보고 싶지만 아직 더 준비해야 할 음식들이 있어 귀만 아래층으로 쫑긋 세웠다. 이어 ‘그래, 그래’가 들리고 점수를 조금 따라잡은 모양. 하프 타임이 시작되자 남편은 고기를 굽고 저녁 식사 준비를 한다. 이어지는 함성들. 역전이 되었고 조금 느긋해진 남편들. 나는 내 방에 TV를 켜 놓고 아래층 함성이 커질 때마다, 잠깐 들어와 상황을 보는 것에 만족했다. 내일 리플레이를 보면 될 일이므로.
4 쿼터. 게임은 완전히 우리 팀, 브롱코스(Denver, Broncos)의 승리로 기울었고 그제야 남편들은 이층으로 올라오며 저녁 식사를 하잖다. 나름대로 게임을 리뷰하며 선수의 특성과 올해의 신생 쿼터백 보 닉스(Bo Nix)와 감독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며, 승리팀의 선수인 것처럼 즐겁게 식사를 한다. 이어 대광고등학교와 대강여고의 합동회의. 모교의 소식을 전하고, 다음 해의 모임 시간과 장소를 정한다.
마지막으로 내 책 <오롯한 나의 바다>에 관한 미니 북 토크. 오롯이 엄마와의 관계만을 썼다고, 이렇게 한 권의 졸저를 냄으로 인생의 숙제에서 참으로 힘들었던 부분에 한 매듭을 지을 수 있었다고. 지난 책 2권은 중환자실 이야기들이었고, 이번엔 엄마. 이제 좀 편안하게 글을 쓰고 싶고. 편한 인생 후반기의 이야기들 엮어볼까 한다고. 북토크가 끝나고 동창들은 책을 몇 권씩 구매해주었다. 20여 년 콜로라도에서 만난 우리들. 참 고맙고 좋은 인연이다.
손님들이 돌아가고, 부엌 정리를 마치고, 고요가 찾아 온 집 안. 아침의 꿈 생각이 났다. 엄마가 알려 주고 간 평온, 소소한 행복, 함께 나눌 수 있는 즐거움. 꿈속의 하얀 꽃밭처럼 환하게 피고, 그 안에서 손잡고 서 있는 시간인 것을. 엄마는 천상에서 평화롭게 계심을 알려주려 꿈속에 잠시 다녀 가신 것일까? ‘나는 잘 지내고 있으니, 너도 잘 지내.’라는 의미 일까? 책이야기를, 엄마 이야기를 한다는 것을 미리 알려 주려 오셨음일까? 꿈에서 만난 평온, 그림 같은 풍경을 가슴에 안고, 좋은 인연을 기억하며 깊은 잠을 청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