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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포의 전염병과 싸운다는 건

by 전지은


미국에서 인생의 절반 이상을 살았어도 어쩔 수 없는 강원도 아줌마인 것도 있겠지만, 강릉의 한 요양원에 계신 노모가 걱정되어 아침마다 한국 질병 관리청에서 발표하는 코로나19 상황을 확인한다.


지난해 추수감사절 이후 콜로라도 주는 적색 단계로 상향조정되었다. 식당은 배달과 픽업만 되고 모든 서비스 업종은 아예 문을 닫게 했다. 공공장소에서 마스크를 써야 하고 거리두기를 지켜야 하고, 야외에서도 마스크를 쓰도록 권고했다. 계절이 겨울로 접어들며 독감과 함께 대유행 조짐이 예상된다는 뉴스를 들을 때면 마음이 착잡해진다.


지난 금요일, 병원에서 오랫동안 같이 근무했던 친구 제인을 만났다. 엄마의 근황을 잘 알고 있는 제인이 물었다.


“엄마는 어떠셔?”


“무소식이 희소식이라고 별 연락이 없는 걸 보니 잘 지내시는 것 같은데, 아무래도 내가 가봐야지. 조만간 한국에 가려고.”


“잘됐네. 지금 같은 때 한국으로 가는 게 더 안전할지도 몰라. 병원은 심각해.”


퇴직한 지 2년, 가끔씩 동료들과 연락을 주고받으며 안부를 묻고 했지만 코로나19 사태가 터지고 어림짐작만 했을 뿐, 병원의 자세한 이야기를 들을 기회는 좀처럼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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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인에게서 듣는 병원 상황은 생각보다 심각했다. 병원에서 피부로 느끼는 환자 숫자와 상태는 이미 통제 불능 상태가 된 것 같다. 내과 병동 두 개를 반으로 나누어 한쪽을 완전 방역 동으로 만들었다. 출입 통제는 물론, 실내의 공기는 모두 음압 처리된다(호흡기 매개 감염병 환자의 격리를 위한 것으로 병실 내 공기가 외부로 유출되는 것을 차단하기 위함이다).


환자 보호자의 완전 통제는 물론 의료진들도 출근하면 그 안에서만 환자를 돌보다가, 퇴근 때에는 완전 소독실에서 몸 전체를 소독한 후에야 퇴근을 할 수 있다. 중환자실도 병동을 둘로 나누어 완전 방역 동인 격리 병동을 만들었다. 간호사를 포함한 모든 의료진은 환자를 돌보기 위해서는 매일매일 완전 무장에 가까운 보호장비를 착용해야 한다. 통풍이 안 되는 방역 가운을 입고, 마스크와 방독면을 쓰고 환자를 돌보는 일이란 그리 녹록지 않다.






30여 년 전, 미국에서 간호학과를 졸업하고 막 간호사 일을 시작했을 때가 떠올랐다. 일이 미숙한 건 물론, 그때는 영어도 서툴렀고, 환자들이 밀어닥치는 종합병원이라는 공간도 낯설었다. 당시 나는 플롯 풀 float pool에 지원했는데 어느 한 과나 병동에 지정을 받지 않고, 매일 인력이 모자라는 병동에 가서 일하는 것이었다. 미숙하고 두려웠지만 일을 가려서 할 처지가 아니었다. 당시 남편은 박사 과정 중이었고, 아이는 겨우 초등학생이었다. 돈이 필요했고, 그러려면 일이 필요했으니 매일 다른 병동을 가더라도 매일 일이 있는 플롯 풀을 선택했다.


그러던 어느 날, 내과 병동에 지정받아 밤 당번을 서야 했다. 내과 병동으로 출근해 인사를 하고 인계를 받았다.


“지은, 오늘 환자는 에이즈(AIDS, Acquired Immunodeficiency Syndrome)로 들어왔어.”


후천성 면역결핍증. 삼십 년이 지난 지금에야 긴밀한 접촉이 아니라면 전염력이 없고, 매일 약을 먹으면 생명에 지장이 없는 질환임을 모두가 알지만, 그 당시는 원인을 알 수 없는 무서운 전염병으로 인식되고 있었다. 게다가 그즈음 세계적인 영국의 밴드 그룹 퀸 Queen의 메인 보컬인 프레디 머큐리가 에이즈에 걸려 사망한 사실도 알려졌던 시기였으므로 에이즈에 대한 공포가 아주 컸던 때였다. 감염 경로가 불분명하니 의료진 역시 에이즈 환자는 공포의 대상이었다.


모두가 기피하는 환자였지만 누군가는 간호를 해야만 하는 환자. 그가 바로 내 환자였다. 그날 밤, 젊은 남자 에이즈 환자를 간호하러 들어가며 켜켜이 껴입었던 가운, 장갑, 마스크 그리고 안경 위에 쓴 커다란 고글이 지금도 생생하게 떠오른다.


시시때때로 혈압과 체온을 체크하고, 약물 투약 등으로 환자와 대면해야 하는 순간은 긴장감의 연속이었다. 더구나 매일 새벽에 실시하는 침상목욕을 시킬 때에는 더운물과 젖은 타월로 온몸이 젖는다. 그날 밤새 방호복 안으로는 더 많은 땀이 물처럼 흘러내렸다. 방호복 자체의 뜨거움도 그랬지만 극도의 공포와 긴장감이 더 나를 짓눌렀다.


근무를 마치고 방호복을 벗으니 그제야 빨갛게 덧난 귓등과 눈 밑에 난 고무줄 자리가 눈에 들어왔다. 이렇게 덧날 정도였다면 일하는 동안에도 아픔을 느꼈을 텐데, 긴장감 때문에 그 자리가 아려오는 것도 모르고 있었다. 집에 돌아오자마자 온몸을 문질러 닦고 귓등에 바셀린을 발랐다. 지금은 환자에 대한 기억은 거의 없고, 그 장면만 생생히 떠오른다. 그때 생긴 버릇으로 난 아직도 목욕을 하면 피부가 벌겋게 될 정도로 닦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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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번도 겪어 보지 못했던 코로나19 사태를 만나며, 알지 못하는 것들에 대한 두려움이 한없이 커진다. 주말 저녁에 친구들과 와인 한잔하며 이야기꽃을 피울 수도 없고, 대중교통을 이용한 여행은 언감생심 그림의 떡이다.


코로나19가 한참이던 8월, 요양원에 계신 노모의 상태가 급격히 나빠졌다는 연락을 받았다. 치매도 더 진행되어 요양보호사도 못 알아보고 죽도 삼키기 어렵다고 했다. 한창 코로나 19 환자가 급격히 늘고, 여행 자제령과 사회적 거리 두기 등 강력한 조치가 이루어지고 있었다. 이런 상황 속에서 비행기를 탄다는 것이 겁이 나기도 했지만, 어머니의 일이 아닌가. 가족들의 걱정에도 마음을 굳게 먹고 한국으로 떠났다.


덴버에서 L.A. 다시 인천으로 이어지는 스무 시간 이상의 비행을 하며 이게 얼마나 큰 모험인가 체감했다. 승무원들은 유니폼 위에 하얀 방역 가운을 덧입었고, 마스크는 물론 안면 보호장비에 완전 무장을 하고 있었다. 딱 보기에도 움직이기 쉽지 않아 보이는 상황. 그 가운데서도 승무원들은 열세 시간 동안 훌쩍거리는 내게 수시로 물을 갖다 주며 컨디션을 체크해 주었다.


그 방호복의 무게를 알기에 이 비좁은 비행기 안에서 승객들의 안전까지 책임지는 그들에게 고개가 숙어졌다. 인천공항에 내려서는 지정된 강원도 방역 버스를 타고 강릉까지 갈 수 있었고, 강릉 보건소 담당 공무원 등 곳곳에서 일하는 방역 책임자들의 수고를 만났다. 2주간의 자가 격리 끝에 만난 어머니는 유리창 너머로 겨우 볼 수 있었지만, 그래도 이렇게 만날 수 있음에 감사했다. 위급한 상황이 발생하면 바로 달려갈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얼마나 마음의 위안이 되던지. 내가 가 있었던 두 달 동안 어머니의 상태는 다행히 안정되어 위급한 상황은 면할 수 있게 되었다. 그렇게 두 달을 한국에서 보내고 미국으로 돌아왔다. 이곳에도 남편이 혼자 있으니 너무 길게 집을 비울 수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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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미국으로 돌아오자마자 난 또 떠날 준비를 했다. 어머니를 곁에서 만날 수 있는 시간이 그리 길지 않을 것 같다. 조금이라도 더 어머니의 얼굴을 보고 손을 잡고 기억하고 싶었다. 그때 이메일 한 통을 받았다. 콜로라도 주 정부의 면허국으로부터 온 것이었다.



당신이 퇴직 한 간호사인 걸 잘 알지만, 혹 지금이라도 복직하고 싶다면 아래 홈페이지를 통해
신청해 주시기 바랍니다. 개인 정보를 입력하면 간호사 면허증을 즉시 복원시켜 주고,
의무교육 30시간도 면제해 드리겠습니다. 지금은 간호 인력이 절실히 필요합니다.
많은 시민이 코로나19로 고통받고 있습니다.
당신의 손길이 필요하니 지금이라도 복직해 주십시오.
한 사람의 간호 인력이라도 간절하게 필요합니다.



그날 만났던 제인의 이야기가 떠올랐다. 지금 병원은 한 번도 경험하지 못했던 상황을 겪고 있었다. 고통받는 환자들과 동료들을 떠올리면 당장 병원으로 돌아가야 하는 게 맞았지만, 선뜻 나설 용기가 나지 않았다. 지난 삼십여 년 동안에 겪었던 힘든 순간들이 주마등처럼 지나갔다.


간호사 경력 대부분을 중환자실에서 지내다 보니, 하루하루가 아픔과 두려움의 연속이었다. 아들과 같은 또래의 환자가 사고로 부모의 가슴에 묻히기도 하고, 나와 비슷한 나이의 중년의 여인이 불치의 암에 걸려 홀로 쓸쓸히 죽어 갔다. 자연재해가 발생하면 24시간 대기를 해야 했고, 전염병이 유행하면 두렵지만 현장에서 간호를 해야 했다. 예상치 못한 일들을 늘 가까이 만났고, 그 일들 안에 난 늘 긴장하며 함께 해야 했다.


퇴직을 한 지 2년, 이제야 병원의 일상들을 지난 이야기처럼 편안하게 말할 수 있게 되었는데, 또다시 같은 일을 하고 싶지는 않았다. 아직 현장에서 땀 흘리고 있을 동료들에게는 미안했지만, 내 마음은 두려웠다. 더구나 어머니를 만나러 자주 가야 한다는 그럴듯한 핑계도 있었다.


오늘도 아침이면 컴퓨터를 켜서 코로나 상황을 살핀다. 한국에서는 다시 유행의 조짐이 빨라지고 미국도 상황은 좋지 않다. 뉴스에서는 다시 마스크 공급을 걱정하고 병원에서는 간호 인력을 비롯한 의료 인력을 걱정하며 인공호흡기 등 장비의 절대적 부족을 염려한다. 각국에서 백신이 공급되고 있고 항체 형성이 된 인구도 늘어난다는 낭보에도, 모자라는 의료인력을 확충하기에는 시간이 한참 더 걸릴 듯하다. 오늘 아침도, 코로나 뉴스로 하루를 시작해야 하는 이런 일상이 언제쯤 끝이 날 수 있을지.


백신 공급으로 코로나 사태는 소강상태로 접어드는가 싶더니 다시 3, 4차 유행으로 이어지고 있다. 미국의 여러 주에서 다시 마스크를 쓰는 것을 의무화했다. 가을, 이미 한국 가는 비행기를 예매했다. 어머니를 만나러 가는 길에 만나는 이런 불편쯤은 얼마든지 감수할 수 있고 여름휴가철이 끝나고 나면 좀 나아지지 않을까 내심 기대해 본다. 그러나 봇물 터지듯 늘어나는 확진자의 숫자는 그냥 숫자 놀음 만은 아닐 것 같아 아침마다 한국의 상황을 살핀다.


격리를 해야 하고, 어머니의 얼굴은 창 넘어서 겨우 볼 수 있고, 8시 이후가 되면 집콕을 해야 한다 하더라도 나는 갈 것이다. 그곳이 전장이라고 하여도 어머니의 얼굴을 몇 번이라도 더 볼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 괜찮다. 가까운 곳에서 손을 잡을 수도 없고, 주름이 깊어진 얼굴을 만져 볼 수도 없어도 답답한 가슴으로 하늘만 쳐다볼 수는 없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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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당신이 살았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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