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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전지은 Jul 06. 2022

3년 전, 엄마를 요양원에 모셨다

그 고마운 곳



                


3년 전이었다. 봄바람이 유독 매섭던 4월의 끝자락, 강릉 위촌리 언덕에 있는 요양원에 엄마를 모시기로 결정했다.  


쉽지 않은 선택이었고 죄책감과 죄송스러움에 어쩔 줄 몰라했던 그해. 일 년 동안 울었던 일은 아마도 평생 잊을 수 없을 것이다. 


“엄마”라는 단어 하나에, “잘 계시지?”라는 질문에도 답은 늘 울음이었다. 성가대에서 성가를 부르다가도, 미사 해설을 하다가도, 친교실에서 교우들과 같이 식사를 하다가도 울었다. 누가 말을 꺼내면 터지는 눈물샘. 눈 가장자리는 짓무르고 얼굴은 어두워져 갔다. 기도하고 또 기도하며, 요양원에 모실 수밖에 없는 상황을 나 자신에게 설명하고 또 설명했지만 죄책감은 그럴수록 더 커져만 갔다.



                



요양원으로 모시기로 한 결정은 갑작스러운 것이었다. 내가 꼭 하고 싶었던 일은, 엄마의 건강이 언젠가 나빠지면 꼭 미국에서 엄마를 모셔야지라는 것이었다. 


요양원에 가시기 전까지, 멀리서 전화를 하면 구순이 넘은 엄마는 늘 잘 계시는 것 같았고, 생활에도 별 불편함이 없어 보였다. 그러던 어느 날 부엌에서 쓰러지셨고, 오래된 무릎 관절염은 수술마저 할 수 없는 상황이 되어, 나는 급하게 비행기를 타야했다.


병원에서 며칠 입원 후 퇴원을 했지만, 치매는 급격히 나빠졌고, 지병이던 양 무릎 관절염은 심해져서 고통을 호소하셨다. 누워 계셔도 욱신거리고 아프신지 돌려 눕혀라, 바로 눕혀라, 앉으켜라, 눕혀라 주문이 끝도 없었다. 진통제 정도로는 통증이 가시질 않는 상태였다.  


도우미 아주머니의 시간을 더 늘렸지만 간호를 하기에는 턱 없이 부족했다. 미국으로 돌아갈 비행기표를 연장했다. 남편은 걱정하지 말고 , 잘 간호하다가 오라는 고마운 답이었다. 집에서 사용할 수 있는 변기와 휠체어와 누워서 사용하는 변기, 기저귀, 일회용 침대보 등등을 준비하며, 이럴 때 누구라도 힘을 쓸 수 있는 사람이 하나 옆에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집에서 모시기 한 달 여. 엄마의 어깨죽지 아래가 벌겋게 되었고, 내 어깨도 빠질 듯 아팠다. 도움을 받아 겨우 씻겨도 집에 가득한 체취는 없어지지 않았다. 엄마의 꼬리뼈 부근에 욕창이 시작되었다. 간호사 경험을 발휘한다고 했지만 24시간 간호라는 것이 만만한  일이 아니었다. 잣죽부터 소고기 죽까지 음식에도 최선을 다해 봤어도 상태는 호전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애쓰는 만큼 몸도 지쳐갔다.


그렇게 난 요양원을 알아보기 시작했다.






요양원.  흔히들 현대판 고려장이라고 말하는 것처럼, 내 마음도 정말 그랬다. “내가 이렇게 버리는구나”라는. 울다 지쳐 잠이 들면 엄마는 또 나를 부르며 눕혀라 앉혀라, 하셨다. 


“그래, 시간을 좀 벌어보자. 아주 가시는 것이 아니라, 상태가 좋아지실 때까지 임시로 요양원에 모시자. 그동안 나도 몸 좀 추스르고, 집 정리도 좀 더 엄마가 편안하게 해두자.”

                

그렇게 마음을 결정하고, 가장 마음에 드는 한 곳을 정했다. 친절한 원장님과 깨끗한 환경, 노인 특유의 냄새가 전혀 없었다. 엄마에게는  임시로 계시다가. 다리에 힘이 생기고 욕창만 나으면 집으로 다시 모신다는 약속을 수십 번도 더 했다. 그리고 위촌리 “A+홈 노인복지시설”로 모셨다. 


엄마가 잘 적응하시도록 나는 매일 점심시간에 식사 시중을 들었다. 엄마의 입원 소식을 듣고 많은 분들이 문병을 오셨다. 그때마다 “ 좀 좋아지면 집으로 가야지”라고 엄마는 말씀하셨고 난 그러자고 약속했다. 그리고 한 달반쯤후, 미국으로 갔다가 가을에 다시 온다고 했고, 그때 퇴원을 해서 집으로 가자는 약속도 했다.

                






엄마는 요양원에서 3년째 지내시고 있다. 치매는 더 진행되어, 딸만 겨우 알아보신다. 말도 어눌하고 단어들도 거의 잊어버리셨는지, 물음에 대한 대답도 상당히 더디다. 나이도 모르신다. 죽과 부드러운 유동식 식사만 하신지 일 년이 넘는다. 그래도 가끔 정신이 또렸해지면 “우리 딸이야, 최지은.”하고 예전처럼 말씀하신다. 그 한마디로 요양원의 간호가 얼마나 의미 있고 감사한 일이지는 나의 부족한 표현으로는 다 할 수가 없다.


요양원에서는 매끼 다른 죽을 준비 해 주고,  시간 맞추어 부드러운 유동식 간식을 제공한다. 3년이 지났지만 욕창도 생기지 않았다. 면회 때마다 늘 깨끗하고 노인 냄새가 안 난다. 엄마의 손은 작지만 부드럽고 따뜻하다. 예쁜 머플러도 매고 나오신다. 잘 빗어 넘긴 머리는 다시 자라는 아기들 머리처럼 까맣다.


내가 집에서 모시고 있었더라면 절대 이런 모습이 아닐 것 같다. 요양원 원장님은 내가 미국에 있을 때는 수시로 사진을 찍어 보내 주시기도 하고, 엄마의 근황을 카톡으로 알려주었다. 많은 환자들의 보호자들에게 일일이 그렇게 하는지 알 수는 없지만, 멀리 있는 나에겐 여간 고마운 일이 아니었고, 엄마에게 떨어져 있으며 하는 걱정을 덜기에 충분했다.

                

이제 A+홈 노인 복지시설은 엄마의 집이다. 혼자 하실 수 있는 일상이 없는데 내가 모시고 나올 수도 없는 일이다. 요양원에서는 따뜻하고 입맛에 맞는 식사에, 목욕에, 위생, 청결, 영양과 가벼운 물리치료를 겸한 운동까지 체계적으로 잘해준다. 옆 침대의 친구도 있고 요양사 선생님들의 따뜻한 간호를 받고 있다. 


이제 나도 한국과 미국에 왔다 갔다 하는 일에 이력이 나서인지 힘이 들지 않다. 엄마가 아직 살아계시다는 것이 얼마나 든든하고 행복한 일인가 만 생각하기로 한다. 이게 최선이다, 라는 최면을 스스로에게 걸며. 할 수 있을 때 최대한 많이 오고, 왔을 땐  자주 요양원을 방문하고 엄마에게 많은 이야기를 해드리고 따뜻하게 손을 잡아 드린다.


“엄마, 사랑해요.” 이 한마디는 언제나 목이 메이고 가슴이 떨리고 명치끝은 아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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