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전지은 Jun 08. 2023

노랑버스

철없던 내 어린 시절

 

기억이 가물가물 한 것을 보니, 초등학교 일 이학년이나 되었을까. 그날도 난 방과 후 외할머니 옆에 딱 붙어서 옛날이야기 같은 것을 듣고 있었던 것 같다. 엄마는 이른 오후에 퇴근을 하셨고, 난 너무 반가운 마음에 이렇게 일찍? 하는 표정으로 엄마 옆에 갔던 것 같다. 그러나 그 애교도 잠시, 엄마가 옷을 갈아입고 바로 나가신다고 나서자, 나도 따라간다고 떼를 쓰기 시작했다. 엄마는 무슨 회식자리에 간다며 안된다고 했고, 난 울고 불고 따라간다고 난리 북새통이었다. 말리다 못한 외할머니는 ‘나도 모르겠다’고 집으로 들어가 버리시고, 난 골목이 떠나갈 듯 울며 불며 엄마의 치맛자락을 잡고 매달렸다.

왜 그렇게 따라간다고 했던지, 그 이유가 지금도 궁금하다. 늘 외할머니와 함께 했던 방과 후, 얌전하게 말 잘 들었던 내가 심술이 나자 걷잡을 수가 없었다. 엄마와 골목 안에서의 실랑이는 큰길까지 이어졌고, 작은 문방구 겸 구멍가게였던 곳에서, 종이옷을 갈아입히는 인형 하나와 뽑기 한 개로 일단락이 되었다. 엄마는 모임을 가셨고 난 외할머니 품에서 훌쩍이다 잠이 들었던 것 같다.


그때, 왜 그랬을까? 아직도 기억에 남는 것을 보니, 내 겐 참 큰 사건이었던 것 같다. 엄마를 따라가는 일이 허락되지 않았던 그 시간. 엄마는 직장을 다니는 신 여성이었고 난 엄마가 필요한 아이였다. 소풍을 가서도 난 늘 외할머니와 돗자리를 펴고 앉아 있었고, 할머니와 김밥을 먹었고, 사이다를 마셨고, 할머니가 삶은 밤을 까 주셨다. 엄마는 늘 옆 반 아이들과 즐겁게 웃고 계셨다. 마음속에는 ‘울 엄마인데, 재네 들이 다 독차지하네~ 같은 질투심이 일기도 했다.’ 철이 들며 생각해 보니 그건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울 엄마가 그 옆 반의 담임 선생님이었으니까. 엄마를 대신했던 외할머니. 아버지를 대신했던 외삼촌. 엄마보다 더 엄마 같았던 외숙모. 내 친동생들 같았던 외사촌들이 있어 일찍 돌아가신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과 외로움을 그런대로 견디며 지낼 수 있었다.


철이 들며, 이런 가족 상황이 우리의 잘못은 아니었지만 타인의 시선은 늘 냉랭했고 따가웠다. 그리고 상황 파악이 확실히 되었을 땐 난 이미 사춘기로 접어들고 있었다. 이후 한 번도 살갑지 못한 딸로 자랐고, 남편을 따라 먼 미국으로 가 버리고 말았다.

해외에 나가면 누구나 애국자가 되는 것처럼, 멀리 살다 보니, 엄마의 외롭고 힘든 인생이 곳곳에서 한지에 스며드는 먹물처럼 내 가슴속에서 올라왔다. 멀리 사는 것이 불효인 것을 절절히 알게 되었던 지난 4년. 내게 주어진 시간은 너무 제한적이었다. 아무리 애써 붙잡아 보려 해도, 가는 시간을 붙잡을 수는 없었다. 그렇게 가슴을 치며 후회를 했던 4년의 시간이 지났고 이젠 그것조차 돌이킬 수 없는 곳으로 떠나갔다.


그러나 엄마의 장례 기간 중에 많은 초등학교 친구들이 위로해주러 먼 길 마다하지 않고 와 주었다. 서울서 운전을 해서 왔던 친구 몇 명과 엄마의 운구를 도와주었던 강릉에 사는 친구들. 그들은 엄마의 제자이기도 했고 내 초등학교 동창들이기도 했다. 남편도 아이들도 많이 놀라는 것 같았다. 먼 길 마다하지 않고 와서 내 손잡고 울던 친구, 근조화환과 근조 꽃바구니를 보내 준 친구. 그들 모두는 초등학교 일 학년 입학식날을 기억했다. 그 작은 조막손으로 울 엄마의 손을 잡고 하나 둘, 교실로 들어가던 일. 소풍과 운동회, 학예회까지. 학창 시절의 첫 발걸음을 울 엄마와 같이 했고, 그 추억과 오랜 우정을 잊지 않고 와 주었다. 감사하고 또 감사하는 일이다.


아침, 약속이 있어 나가는 길이었다. 아이들을 태우러 오는 노랑 버스들. ㅇㅇ어린이집. ㅇㅇ유치원. 그런 이름이 붙은 소형 버스들 안으로 아이들은 엄마에게, 할머니에게, 아빠에게 손을 흔들며 들어가고, 아이들이 다 탔는지 확인을 한 선생님은 천천히 아파트 단지를 빠져나간다. 그 노랑 버스를 바라보고 섰다가, 나의 어린 시절을 기억해 내고는 쓸쓸히 웃는다. 그 어린 시절의 나는 할머니가 되었고, 유치원까지 손잡고 바래다주시던 외할머니는 진작에 타계하셨고, 홀로서기로 힘들었을 엄마도 이젠 안 계신다. 시야에서 사라지는 노랑 버스 속으로 나의 시린 어린 시절도 함께 떠나보내며, 어린 시절의 친구들의 기억 속에는 울 엄마가 아직도 청춘인 채 곱게 계셨으면 좋겠다.           







이전 10화 3년 전, 엄마를 요양원에 모셨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