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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전지은 Jun 05. 2023

팥 시루떡

그 따뜻한 인연


나른한 오후, 전화를 받았다. 엄마가 계시던 요양원 원장님 번호다.

“어쩐 일 이세요? 잘 계시죠? 별일 없으시고요?” 라며 반갑게 받았다.

“목소리가 밝아서 다행입니다.” 라며, 내가 지금 어디에 있는지 물어 왔다.

집에 있다고 하자, 지금 우리 아파트까지 온다고 한다. 무슨 일이냐고? 묻자, 따끈한 팥 시루떡이 왔는데, 좀 드리려고요, 하며 끊는다. 사양할 틈도 주지 않고.

정확히 20분 후, 다시 전화는 울렸고. 집에 올라와서 차 한잔하고 가시라고 해도, 막 무가내로 내려오라고 한다. 입구 문을 열자, 차에서 내리며 떡을 건넨다. 아직 따끈하다. 특별히 주문한 떡은 요양원의 어르신들이 참 좋아하는데, 서울에 주문을 해야 해서, 자주는 못하고 가끔 한다며, 오늘이 바로 그날이고 내 생각이 나서 전화를 걸어왔고, 손수 배달까지 해주었다.

엄마가 계시던 요양원. 엄마는 4년의 시간을 그곳에서 지내셨다. 그리고 난 7번째 미국에서 나와 얼마 전 엄마의 장례까지 치렀다. 엄마가 요양원을 처음 들어가시던 때는, 치매가 있기는 했지만 그리 나쁜 상황은 아니었다. 처음 입원을 시켜 드렸던 그 해 봄, 말 그대로 잔인한 4월이었고, 엄마의 아파트에 혼자 남아 울고 지낸 밤이 거의 매일이었다. 그리고 낮 시간에는 거의 매일 점심시간에 요양원에 가서 엄마의 점심 시중을 들었다. 점심을 먹여드리고 건물의 일층으로 내려와 복도에서 울었고, 그 언덕을 걸어 내려오며 울었다. 처음 2개월이 지나고, 엄마가 조금 적응이 되는 것 같아 난 미국으로 들어갔다. 발걸음은 무거웠고, 돌아가는 비행기 안에서 얼마나 울었는지 승무원들이 교대로 내 옆에 와 말을 붙이고 물을 갔다 주고 손을 잡아 주었다.


그리고 미국 집에 도착해서도 거의 매일 울었다. ‘내가 엄마를 그곳에 버렸다’는 죄책감에 어쩔 줄 몰라했다. 미사 해설을 하다 울고, 성가를 부르다가 울고, 혼자 화답 송을 부르다가 목이 메었다. 눈가가 짓무르도록 울었다. 그리고 가을에 또 나왔고, 겨울에 또 나왔었다. ‘봄에 다시 올게요’하고는…. 이어 코로나가 심해졌고, 여행길은 꽉 막혀 버렸다.


거의 매일 카톡으로 전화를 하고 얼굴을 보며 이야기를 이어가려고 했지만, 엄마의 치매는 진행이 빨랐다. 그러다가 도저히 카톡으로는 대화가 안 되는 상황이 되자, 원장님의 카톡으로 연락을 하기 시작했다. 어떤 날은 엄마가 낮잠을 주무신다며 바꾸어 주지 않았다. 그런 날은 엄마의 컨디션이 썩 좋지 않아 프로그램도 못하시고, 식사도 잘 못하시는 날이다.

또 어떤 날은 원장님이 먼저 카톡으로 연락을 해 오셨다. ‘엄마, 엄마, 엄마. 내가 누구야. 딸… 딸... 몰라?’ 그런 날은 엄마의 컨디션이 상당히 좋은 날이었다. 가끔은 ‘딸이야. 지은이’ 하면 난 무슨 큰일이나 난 듯 호들갑을 떨며, 손뼉을 치며 ‘맞아 맞아, 엄마의 예쁜 딸...’ 하고 전화를 끊곤 하였다. 미루어 짐작하건 데 이건 원장님의 배려였다. 멀리서 가지도 오지도 못하는 상황에서, 엄마의 나쁜 상황은 피하고, 좋은 상황만 알려 주는 지혜. 그래야 내가 걱정을 덜 할 것임을 알기에…


그렇게 거의 일 년을 못 본 채 지났고, 더 이상 기다릴 수가 없어, 격리를 마다하지 않고 다시 강릉을 찾았다. 두 번의 긴 격리를 했었고, 한 번은 PCR 검사를 3번 이어서 하는 것으로 격리 면제가 되었다. 격리 기간 중에는 건물 안에서는 면회가 안되었다. 유리창을 사이에 두고 마스크를 쓴 채로,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했던 면회. 카톡 전화로만 하는 것보다는 얼굴을 볼 수 있는 것이 백 번 나았고, 급한 일이 생기면 20분 안에 갈 수 있는 강릉 하늘 아래서 지낼 수 있음을 다행이라 생각했다. 나의 강릉은 늘 엄마가 영순위였다. 그래도 엄마 면회를 하러 와 있던 시간 동안에 세 번째 에세이집을 냈고. 그 덕택에 몇 군데 출연과 인터뷰 등으로 바쁘게 지냈고, 이렇게 브런치 작가로 소소한 일상들을 글로 남기며 좋은 분들과 소통하고 있다. 엄마 덕택에 강릉에 나와 있는 시간들을 정말 유용하게 썼다.


이제 엄마가 안 계신 강릉을 얼마나 자주 올까 싶다. 바다가 있고, 솔밭이 있고, 친구가 있지만 엄마는 안 계시다.  그 상실감은 가슴 안으로 커다란 바람이 되어 불어 든다. 서늘하다가 아리다가 시리다. 가끔은 왼쪽 가슴에 통증도 있다. 심호흡이 안되어 낑낑거리다가 찬물을 들이켜고 정신을 차린다. 편안해지기 위해 친구들도 자주 만나고, 더 많이 걷고, 공연도 보러 다니고, 책방도 기웃거리고, 독서도 심하게 하지만 그러면 그럴수록 더 힘들지는 것 같다. 안 힘든 척하는 것이 더 힘든 요즈음. 어쩌면 빨리 집으로 돌아가는 것이 답일 수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솔밭을 걷고 와서 아직 온기가 남아 있는 팥 시루떡 한 개가 저녁식사이다. 엄마가 계시던 마지막 4년이 이렇게 온기로 전해진다. 또 울컥한다. 목이 메이지 않게 맥주 한 캔 따서 옆에 놓고 천천히 떡 맛을 음미한다. 부드럽고, 달콤하고, 쫄깃하고, 따스한 인연. 그 언덕 위의 작은 곳엔 사람 사는 냄새도 함께한다. 고맙고 또 고마운 마음, 언덕 위에 있는 요양원으로 따스한 시선을 보내 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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