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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전지은 Nov 16. 2022

위령 성월을 보내며

"어서 오너 라" 하시는 말씀



천주교에서는 해마다 11월을 위령성월로 정해 돌아가신 분들을 위해 기도한다. 미사 전이나 후에 바치는 이 기도는 가족이나 친지들 중에 누구라도 돌아가신 분을 안 둔 경우는 없기에 심적으로 많은 위로가 된다. 더구나 우리들처럼 먼 이국 땅에서 지내며 어른들의 제사 한번 제대로 올리지 못하며 사는 경우에는 그 기도의 의미가 더 할 수 있다. 


나의 경우도 그렇다. 내 기억 속에는 없는 아버지의 얼굴. 훗날 철이 들면서 사진을 보며 알게 되었던 아버지. ‘구름 나라의 시인’이라는 표현으로 아버지의 부재를 확인했고, 해마다 엄마가 모시는 제사에서만 아버지의 이야기가 허락 되었다. 눈물을 보이면 절대 안된다는 무슨 약속이 있었던 것도 아닌데, 우린 그냥 담담하게 옛날 이야기를 하는 것처럼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들을 나누었다. 


제사에는 작은 아버지와 사촌 남동생이 늘 함께 했다. 엄마가 연로해 지시고 내가 결혼을 하면 아버지의 제사를 못 모실 것이기에 미리 이런 준비를 한다고 알고 있었다. 그러나 작은 아버지도 세상을 떠나셨고 사촌은 자신들 살기에도 바쁘다. 난 그런 사실을 충분히 이해했고 아버지의 제사는 성당에서 연도를 하는 것으로 그날을 기억한다.


그 당시 아버지는 전혀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채 먼길 떠나는 날 아침까지 ‘지은이 엄마, 고생이 많아서 어쩌지? 내가 빨리 털고 일어나야 하는데…’라고 하셨단다.  엄마는 해마다 제사 날이면 ‘살만하니까, 사람이 먼저 가더라’라는 말씀을 넋두리처럼 하셨다. 단칸 셋방에서 시작한 신혼 살림, 아버지는 정규 국어 교사와 야학 교사까지 겸했고 답십리에 독채 전세로 옮겨 가자 병이 생기셨단다. 주야간 교사는 물론 현대문학 등에 계속 글을 실으셨고 문인들과 술을 자주 드셨으니 아무리 젊으셨다 해도 그 몸이 당할 수가 있었을까. 


그렇게 33세의 아버지는 떠나셨다. 고통은 고스란히 남겨진 사랑하는 이들의 몫이었다. 엄마는 3살의 어린 딸을 데리고 친정으로 돌아왔고 생계를 위해 복직을 했다. 이후 나는 기억 속의 아버지가 현관문을 열고 들어 오며 ’지은아’하고 부르는 상상을 수도 없이 하며 지냈다. ‘왜 나만 아버지가 없을까 ?’ 에 대한 생각은 철이 들면서 받아들여야 하는 ‘상황’이 되어 있었다. 그런 상황 속에서 나는 점점 의기소침해졌고 스스로의 틀에 가두어두게 되었다. 


“결손가정”은 나의 탓이 아니었고 내가 원했던 일도 아니었지만 오랫동안 나를 괴롭혔다. 그렇게 안으로 움추려드는 나를 위해 엄마가 결정한 일은 성당에 나가게 하는 일이었다. 마침 사춘기를 시작 할때 쯤이었고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곳에 가면 사교성이 좀 나아지지 않을까 싶어서였다. 나의 손을 잡고 함께 가 준 친구도 있고 나중에 나의 대모님이 되어 주신 골목길 건너 편에 사시던 산파아주머니도 계셨다. 신앙이 무엇인지, 종교가 무엇인지 잘 알지도 못하고 발을 들여 놓게 된 곳에서 ‘어우러져 사는 일’을 배우게 되었다.


그 함께 어우러지는 시간들이 아직까지 나의 삶을 지탱해 주고 있다면 너무 과장된 이야기일까. 미국에 처음 도착하면서 부터 늘 함께 했던 모임은 성당 가족이고, 한인 공동체는 한인 성당이 전부였다. 그곳에 속한 한 사람으로 ‘이민자의 아픔과 외로움과 그리움’들을 공유하며 더불어 지냈다. 


성당 안에서 만났던 꽤 여러분들이 선종하시고 그분들을 위해 기도하는 ‘연도’를 바치다 보면 나도 모르게 마음의 평안을 찾게 된다. 죽음을 애도하는 기도 속에서 마음의 평화를 찾는 일은 어쩌면 중환자실의 간호사로 오랫동안 근무 했던 이유도 있을 수 있다. 늘 만났던 죽음. 그 앞에 서면 조금은 초연해지고, 객관적인 시선으로 ‘죽음’이라는 사실을 보게 된다. 가까운 고향 친구는 ‘세상의 죽음 중에 호상, 은 없다. 그냥 죽음 만 있을 뿐이다’라고 이야기 하지만 나의 시선은 조금 다르다. 떠나는 사람이 편하다면 그가 사랑했던 남은 사람들도 조금은 더 편하리라는 것이다. 


해마다 11월이 되면, 평생의 아픔이었던 구름나라 시인 아버지와 녹록치 않은 이민 생활 중에 나를 아껴 주셨던 성당 어르신들의 선종과 보라색 할미꽃 같았던 외할머니와 길 떠나시기 전 마지막 이멜을 보내 주신 대부님과 중환자실에서 만났던 마지막 길을 가는 사람들의 이름들이 기억 된다. 그분들을 위해 연도를 바치며 마음의 평화를 얻는다.



언젠가 나도 가야 할 길이기에 두려워하지 않고 가보려고 한다.  새로운 길에 대한 두려움이 거의 사라진  것은 20여년쯤, 아직 젊었던 그 시간에 “생전 유언장”을 써 둔 이후라고 할 수 있다. 중환자실에 오래 근무하다보니, 꼭 해두어야 할 나의 일인것 같았다. 남편을 설득했고 마침 근무하던 병원에서 연결시켜주는 변호사가 있어서 편하게 작성 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근래에 새로 보완을 했다. 이유는 우리 가정에 새로운 식구가 들어 왔기 때문이었다. 며느리를 맞으며 다시 한번, 현 상황을 알고 싶었다. 재정적인 것부터, 불치의 병이 걸렸을 때의 진행 과정, 죽고나면 사후 처리 과정까지 자세히 적어두었다. 한권의 바인더가 될 정도로 분량이 많다. 변호사의 싸인을 거쳐 우리동네 시청의 관할 부서에 등록을 해두었다. 나의 죽음 뒤에 오게 될 아이들의 당혹스러움과 혹시 남편보다 먼저 가게 된다면 내가 원하는 죽음의 형태를 순서대로 적어 놓았다. 


아직 엄마가 한국의 요양원에 계시기 때문에 엄마보다는 늦게 죽어야 한다는 것 말고는 언제 부름을 받아도 “예’하고 대답할 수 있다. 이 편안함은  죽음에 대한 것들을 한번 쭉 서술해 보았기 때문인것 같다. 상황들을 정리 해 둔 바인더, ”내 죽음에 대한 메뉴얼”에 따라 아이들은 실행만 하면 되는 것이다. 


어떤 갈등도 없이 내가 원했던 대로 처리 만 해주면 되는 것이다. 아이들에게도 또 남겨진 다른 사랑 하는 사람들이 따라 할 수 있게 만들어 둔 내 죽음에 대한 메뉴얼. 그것을 한장씩 넘기면 연도 할때와 마찬가지로 마음이 편해진다. 이 세상을 떠나 하느님 앞에 불려 갔을 때  ‘저는 제 의지대로 이렇게 살다가 왔나이다’ 하고 머리를 조아릴 수 있을 것같다. 멀리서 부르는 빛은 곱고 아름다운 무지개 다리가 되어 떠있다. 멀리서 그 분이 따듯한 손을 내밀며 ‘어서 오너라’하며 얼굴에 가득 미소를 띠고 기다리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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