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리 불편해도
그런 엄중한? 경호를 받으면서도 한국 행을 감행했던 것은 어머니의 요양원 생활이 걱정되어서였다. 어머니의 치매가 더 진행되기 전에 몇 번이라도 얼굴을 더 보기 위해 시간이 될 때마다 그 불편함을 감수하며 ‘이놈의 코로나는 도대체 언제 사라지는 거야’하는 푸념을 풀어놓으면서. 격리가 해제되어 어머니의 면회를 할 수 있어도, 비대면이었고 유리창 안과 밖에서 소리소리 지르며 해야 하는 몇 마디가 전부였다. 그래도 딸의 얼굴을 잊어버리 실까 봐, 되는 애교 안 되는 애교도 보태며 “엄마, 엄마, 엄마 이쁜 딸 왔잖아. 내 이름이 뭐야?”라고 수도 없이 물어보았다. 손으로 사랑해 모양도 해 보이며 손짓 발짓 동원해 보았어도 어머니의 표정은 갈수록 무반응이었다. 어쩌다 조금이라도 웃으시면 난 좋아서 죽을 것처럼 “잘했어. 잘했어. 엄마 또 해봐요.”를 외쳤다. 늘 엄마의 면회를 일 순위라고 하며 비행기를 탔었어도 떠나 오는 길을 늘 아쉽다.
몇 번 못 만난 것 같고, 못한 이야기도 많은 것 같다. 그래도 이번 방문에는 처음 얼마간은 대면 면회가 가능했다. 나도 엄마도 마스크를 쓰고 있었지만 손도 잡을 수 있었고, 엄마의 마스크를 내리고 요플레를 떠서 먹여 드릴 수도 있었고, 블루베리 같은 작은 과일은 하나씩 입에 넣어 드릴 수도 있었다.
그러다가 다시 비대면이 된 것은 몇 주 전. 본격적인 휴가철이 시작되며 이동인구가 많아지고 10만 이상의 확진자가 나오자 다시 비대면으로 전환되었다. 다시 유리문을 사이에 두고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는 면회가 몇 번 더 허락이 되었다. 그중 한 번은 어머니의 생신을 당겨서 하기로 한 날이었다. 그날도 역시 비대면만 허락한다고 했다. 꽃바구니와 케이크를 전해드리고 유리창 밖에서 ‘HAPPY BIRTHDAY TO YOU~”노래를 부르며 몇 번이나 더 이 노래를 부를까 싶었다. 가슴은 미어지고 목소리는 떨렸어도 창으로 어머니의 얼굴을 보고 부를 수 있어 감사했다.
어머니는 역시 무표정이었다. 케이크와 꽃바구니를 보시고도 아무런 동요가 없이 먼 곳을 바라보신다. 나와 눈을 마주치지도 않고 허공만 바라보는 어머니를 자극하기 위해 손뼉도 치고 작은 폭죽도 터뜨려 보았지만 미동도 없다. 60 중반이 넘어 엄마 앞에서 혼자 한 재롱잔치가 끝나고 나오며 또 울컥 눈물이 났다. 그래도 아직 이곳에 엄마가 계신 것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만 생각하기로 했다.
큰소리로 내 이름을 묻고 또 묻더라도 , 유리창 안쪽에는 아직 엄마가 계신다. 장시간 비행을 마다하지 않고 오면 만날 수 있는, 불러 볼 수 있는 엄마가 계신 것만으로도 불편한 비행은 아직은 할만한 일이다. 더 힘들고 어려운 상황이 된다 해도 어머니가 계신 동안 강릉은 따뜻하고 포근한 곳이며, 아무리 힘들어도 감사하고 또 감사하며 올 수 있는 곳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