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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전지은 Aug 29. 2022

아직은 할 수 있다

아무리 불편해도

            

3개월 시간은 생각보다 빠르게 지나갔다. 요양원에 계신 어머니의 면회가 주 임무. 그다음은 매일 송정 솔밭을 걷는 일. 집에서 홈트레이닝도 좀 하고 책도 읽고 글도 쓰고 여행도 하고 친구도 만나며 여유롭게 지내다 가는 백수의 일정. 


한국과 미국을 왔다 갔다 한지 벌써 3년째로 접어들었다. 어머니를 요양원에 모시며, 시간이 허락할 때마다 한국을 가겠다는 계획을 하긴 했지만 이렇게 삼 개월 간격으로 왔다 갔다 할 줄은 몰랐다. 한국에서 짐을 풀고 좀 안정이 될만하면 또 떠날 준비를 해야 하고 미국에 돌아오면 또 다음 갈 준비를 한다. 


친구들은 그렇게 말한다. 몸이 무쇠로 만들어졌어도 그렇게 왔다 갔다 하면 힘들지 않으냐고. “아~ 난 비행기 안에서 좀 잘 자는 편이야. 첫 기내식에 와인 한잔을 마시고, TV  프로그램 하나 보고, 과일 부탁해서 먹으며 다시 와인 한잔하고, 책이 수면제 아니니? 읽다 보면 스르르 졸음이 오지. 그러면 담요 덮고 자면 돼. 한참 자고 나면 그다음 기내식 주더라고, 또 먹고, 그때 커피 마시고 양치하고 세수하고 그러다 보면 얼추 다 왔어. 하하.”  친구들은 이 나이에 비행기 타는 것에 이력이 났다며 놀래곤 한다.


그러나 말이 쉽지 지난 2년간의 비행기 타기는 그야말로 전쟁이었다. 미국 출발 전 코로나 PCR 테스트하고, 오가는 내내 마스크를 쓰고 있어야 하고 잠결에라도 마스크를 내리면 깨워서라도 다시 쓰게 하고, 긴 비행에서 내리면 공항 출구에서 빨간딱지 하나를 어깨에 붙이고, 지정된 방향으로 졸졸 따라 가, 강원도 보건소 임시 방역 사무실에 등록을 하고, 방역 버스 타고 강릉에 도착한다. 도착하면 보건소에서 앰뷸런스에 실려 아파트까지 오고, 아파트 안으로 들어가는 것 까지를 확인 하고서야 앰뷸런스는 돌아간다.  


그다음 날 아침 PCR재검. 그 후 14일 동안은 절대 격리. 격리 해제 전 다시 검사. 세상에 무슨 전염병 환자도 아니고… 4시간마다 체온 측정해서 보고하고, 전화기의 움직임이 없으면 없다고 딩딩 거리고, 아파트 문밖으로  친구가 가져다준 음식들이라도 들고 오려고 나가면 구역을 벗어났다고 딩딩 거리고, 아침저녁으로 집 전화로 확인까지 했다.  커다란 상자에 라면, 햇반, 카레, 깻잎 통조림, 김 등과 면역력 향상을 위한 비타민 C까지 챙겨져 있었다. 격리하는 동안에 나온 쓰레기는 따로 수거하라고 빨간 비닐백도 들어 있었고 일회용 장갑과 알코올 스왑. 손 닦는 물휴지 등등. 말 그대로 구호물자 박스도 배달돼 왔다.

            

그런 엄중한? 경호를 받으면서도 한국 행을 감행했던 것은 어머니의 요양원 생활이 걱정되어서였다. 어머니의 치매가 더 진행되기 전에 몇 번이라도 얼굴을 더 보기 위해 시간이 될 때마다 그 불편함을 감수하며 ‘이놈의 코로나는 도대체 언제 사라지는 거야’하는 푸념을 풀어놓으면서. 격리가 해제되어 어머니의 면회를 할 수 있어도, 비대면이었고 유리창 안과 밖에서 소리소리 지르며 해야 하는 몇 마디가 전부였다. 그래도 딸의 얼굴을 잊어버리 실까 봐, 되는 애교 안 되는 애교도 보태며 “엄마, 엄마, 엄마 이쁜 딸 왔잖아. 내 이름이 뭐야?”라고 수도 없이 물어보았다. 손으로 사랑해 모양도 해 보이며 손짓 발짓 동원해 보았어도 어머니의 표정은 갈수록 무반응이었다. 어쩌다 조금이라도 웃으시면 난 좋아서 죽을 것처럼 “잘했어. 잘했어. 엄마 또 해봐요.”를 외쳤다. 늘 엄마의 면회를 일 순위라고 하며 비행기를 탔었어도 떠나 오는 길을 늘 아쉽다. 


몇 번 못 만난 것 같고, 못한 이야기도 많은 것 같다. 그래도 이번 방문에는 처음 얼마간은 대면 면회가 가능했다. 나도 엄마도 마스크를 쓰고 있었지만 손도 잡을 수 있었고, 엄마의 마스크를 내리고 요플레를 떠서 먹여 드릴 수도 있었고, 블루베리 같은 작은 과일은 하나씩  입에 넣어 드릴 수도 있었다.

                

그러다가 다시 비대면이 된 것은 몇 주 전. 본격적인 휴가철이 시작되며 이동인구가 많아지고  10만 이상의 확진자가 나오자 다시 비대면으로 전환되었다. 다시 유리문을 사이에 두고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는 면회가 몇 번 더 허락이 되었다. 그중 한 번은 어머니의 생신을 당겨서 하기로 한 날이었다. 그날도 역시 비대면만 허락한다고 했다. 꽃바구니와 케이크를 전해드리고 유리창 밖에서 ‘HAPPY BIRTHDAY TO YOU~”노래를 부르며 몇 번이나 더 이 노래를 부를까 싶었다. 가슴은 미어지고 목소리는 떨렸어도 창으로 어머니의 얼굴을 보고 부를 수 있어 감사했다. 


어머니는 역시 무표정이었다. 케이크와 꽃바구니를 보시고도 아무런 동요가 없이 먼 곳을 바라보신다. 나와 눈을 마주치지도 않고 허공만 바라보는 어머니를 자극하기 위해 손뼉도 치고 작은 폭죽도 터뜨려 보았지만 미동도 없다. 60 중반이 넘어 엄마 앞에서 혼자 한 재롱잔치가 끝나고 나오며 또 울컥 눈물이 났다. 그래도 아직 이곳에 엄마가 계신 것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만 생각하기로 했다.  


큰소리로 내 이름을 묻고 또 묻더라도 , 유리창 안쪽에는 아직 엄마가 계신다. 장시간 비행을 마다하지 않고 오면 만날 수 있는, 불러 볼 수 있는 엄마가 계신 것만으로도 불편한 비행은 아직은 할만한 일이다. 더 힘들고 어려운 상황이 된다 해도 어머니가 계신 동안 강릉은 따뜻하고 포근한 곳이며, 아무리 힘들어도 감사하고 또 감사하며 올 수 있는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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