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해’란 가장 잘한 오해이고, ‘오해’란 가장 적나라한 이해다
‘이해’란 가장 잘한 오해이고, ‘오해’란 가장 적나라한 이해다.
“너는 나를 이해하는구나.”라는 말은 내가 원하는 내 모습으로 나를 잘 오해해 준다는 뜻이며,
“너는 나를 오해하는구나”라는 말은 내가 보여주지 않고자 했던 내 속을 어떻게 그렇게 꿰뚫어 보았느냐 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김소연, <마음 사전>
이해받는다는 느낌은 상대방이 내가 원하는 모습으로 오해해 주었을 때 받을 수 있고 오해받는다는 느낌은 나에 대해 들키고 싶지 않은 부분까지 이해했을 때 받을 수 있다니 ‘내가 의도하는 바’에 대한 합치성에 따라 이해와 오해가 갈리는 것일까. 내가 그동안 ‘오해’라고 부르짖었던 많은 것들이 사실은 적나라한 ’ 이해‘였을까(그래서 오히려 언어가 통하지 않는 동물로부터 더 이해받는다는 느낌을 받기도 하는 것인지). 때로는 오해가 더욱더 사실적인 관찰 의견일 수도 있다는 깨달음과 함께 때로는 성찰이 필요하다면 오해들도 면밀히 살펴보는 시간도 의미 있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반대로 의도했던 대로 ’제대로‘ 이해받더라도 이는 그 뒤에 (또는 아래에) 가려진 오만가지 감정과 경험 중 일부가 과장된 것일 수밖에 없음을 겸허히 받아들여야겠다.
김소연 시인은 정희진의 <공부> 2024년 1월호에서 이 문구를 인용하며 이 역시 전부를 포괄하는 표현일 수는 없지만(예를 들어 여기서 말하는 오해는 악플이나 근거 없는 비방과는 거리가 있다. 이해하고자 하는 노력조차 없이 마구 쏟아내는 연타발이 아니라 한 끗 차이로 빗나간 이해라는 과녁에 쏘아 올린 화살의 도착점이 오해일 것이다) 잊고 있던 진실 하나는 건드리는 느낌이 들었다고 표현했다. 이해받고 인정받지 못해서 힘들어하던 나에게 시인의 말은 모종의 자유로움도 선사해 주었다. 오해에도 발끈하기보다는 ‘(독자로써) 마음껏 오해하는 즐거움을 방해할 순 없지.‘라니 얼마나 통 큰 마음가짐인지. 지금 나에겐 더 잘 이해받기 위한 노력 보다 더 잘 오해받기 위한 노력이 필요한 시점이 아닐까. 오해마저도 흥미롭게 받아들일 때 내 삶도 더 자유로워지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