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성이라는 새로운 희생량을 선택한 광인의 기호
4장 - ‘직업’으로부터 벗어난 광기의 기호
정상, 비정상을 판단하기 어려울 때 의사는 보편적이며 상식적인 기준을 이용하는데, 바로 ‘직업 ’이다.
'어떤 사람이 매일 스마트폰을 12시간 넘게 보고 있다면 이것은 스마트폰 중독입니까?'
회식 자리에 모인 전문가들에게 개인적으로 묻는다면, 모두 의견이 조금씩 다를 것이다. 하지만 공적인 의견을 내라고 하면, 모두 ‘병이라고 함부로 정의할 수 없지만, 사용 시간은 줄이는 것이 좋다’ 정도가 될 것이다.
하지만 만약 당사자가 왠일인지 정신과에 방문해서,
‘나는 이것이 중독이라고 생각하지 않으며 스마트폰 사용 시간을 줄일 의도가 없다!’라고 한다면?
그리고, ‘그래서 내가 병이 있다는 거냐? 없다는거냐?’ 라고 묻는다면 어떻게 될까?
아마 의사는, ‘당신의 지나친 스마트폰 사용 때문에 밤낮이 바뀌고, 직장에 지각하거나, 피로해서 근무에 집중이 되지 않는다면 중독이 맞다’고 할 것이다.
하지만 만약 그 사람이, 스마트폰을 오래 하고 있지만, 아침에 출근해서 적절히 근무할 수 있다면, 즉 사회직업적 손상이 없다면 병이 아니라고 할 것이다.
하지만, 그가 이미 오래 전부터 직업이 없어서, 딱히 매일 아침 출근하고 있지 않으며, 매일 밤새 저녁부터 다음날 아침까지 매일 스마트폰을 보고 있다...라면, 중독이 맞다고 할 것이다.
그런데 만약, 이 사람이 일종의 자영업자이거나 자유로운 오너라면? 그래서 늦게까지 스마트폰을 보고 피곤해서 12시간 자고 일어나서 비몽사몽하다가, 매일 저녁 5시쯤, 자기 명의의 식당에 들러서 매니저에게 가게 상태에 대한 보고를 받은 후 돌아온다면? 그렇다면 그는 중독이 아니게 될 것이다.
하지만 그 가게를 본인이 창업한 것이 아니라, 올해 초에 그의 부모가 그의 명의로 대신 만들어준 것이라면? 그러면 또 중독이 맞는 것 같다.
그런데, 애초에 그 사람이 ‘OO레스토랑 대표 혹은 OO법인 대표 아무개’라는 명함을 내밀면서 명품 정장을 입고 진료실에 나타났다면? 그러면 또 중독이라고 진단하기가 어렵다.
또 다른 개인적인 예를 들어보자.
얼마 전, 어떤 할머니 한 분이 불면증 때문에 수면제를 처방해 달라고 오셨는데, 여쭤볼 때마다 한마디 한마디가 횡설수설이라서 이해하기가 어렵고, 그 조각난 문장들을 조합해서 추리해보건데, 그 분은 치매 상태이며, 최근 딸과 통화를 하다가, 딸이 화를 낸 것에 놀란 것 같았다. 이후 불안 및 강박 증상(자녀의 전화 통화가 반복해서 떠오름)이 발생해서 불안하고 잠이 오지 않는 것 같았다. 하지만 할머니는 자신이 불안하지도 않고, 기억력도 멀쩡하다고 하는데 나는 어떻게 해야할까?
이상적인 선택지는 자녀와 연락이 되어, 치매의 진단과 치료 필요성을 설명하는 것이겠지만, 할머니는 의사가 자녀와 연락하기를 거부하셨다. 이런 경우 내가, 독립적이고 자유로운 한 사람의 성인인 그 할머니의 요구를 따를 것인지 말지(수면제 처방) 고민할 때, 큰 도움이 되는 것이 바로 그 할머니의 직업 적응이다. 할머니가, 가정일(요리나 청소, 세탁 등)이나 산책, tv 시청 등의 소소한 생활사를 적절히 유지하고 있으시다면, 원하는대로 수면제만 처방해 드릴 수 있겠다.
하지만, 그 할머니는 가정일을 전혀 하고 있지 못하셨고, 하루 종일 멍하니 앉아서 비현실적인 걱정에 시달리고 있었다. 최근 몇년 동안 의미있는 활동도 전혀 없어 보였으며, 수면제만 처방해서 보내드리는 것은 양심의 가책이 느껴졌다. 그래서 ‘네~ 알겠습니다’라고 하면서, 취침전 약에 말없이 인지기능 개선제를 추가해 넣었다.
그런데, 이와 비슷한 인지기능 수준과 증상을 보이는 치매 할머니인데, 그 분이 갑부인 경우에는 또 양상이 다르다. 치매 어르신이 갑부인 경우, 어디를 가서 이상한 행동이나 언어 표현을 해도 주변 사람들이 묵인하고 오히려 치켜세워주는 것 같다. (그러한 어르신의 최측근 자녀는, 우리 부모님 멀쩡하다고 하고, 다른 자녀가 우리 부모님은 치매이므로 그 유언은 무효라고 소송을 하는 것도 흔한 민사 유형 중 하나다.)
치료자 입장에서도, 치매 할머니께서 모피를 둘둘 말고 비싼 가방을 들고오셔서, ‘내가 어떤 사람이냐면...’ 으로 시작하시고 횡설수설하다가 수면제를 요구하면, 여기에 치매 진단을 내려서 치매 약을 추가하기는 어렵다.
치매나 중독 외에, 더 극적인 ‘인격장애’의 문제도 있다. 그 사람의 성격 자체에 병이 있다라는 진단은 매우 중대한 것으로써, 이 인격장애 진단이야말로, ‘사회직업적 손상’에 크게 의지한다. 정서적으로 기복이 심하든, 타인과 자주 다투든, 지나치게 강박적이든간에, 결국 대인관계와 직장에 적응이 되느냐 안되느냐가 진단의 근거라는 말이다.
만약, 고교를 졸업한 이후 10년 이상 직장을 다닌 적이 없고 은둔형 외톨이로 지내면서, 툭하면 가족들에게 소리를 지르고 물건을 던지는 사람이 있다면, 전문가들은 이 사람을 ‘상세불명의 인격장애’로 진단하는데 큰 고민을 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똑같은 성격과 생활상이라도, 그 부모가 1조원대의 재산가로서, 매년 조그만 가게를 차려서 어떤 식당이나 샵의 대표 직함을 그 환자에게 끊임없이 제공하고 있다면?
더 심각한 케이스로서, 두세달에 한번은 취해서 사람을 때리고, 1~2년에 한번은 음주운전으로 사람을 치고 있는데, 집에서 전담 변호사를 고용해서 매사 착실하게 합의를 보고 있어서 전과는 전혀 없다면, 임상에서 전문가는 이 사람을 반사회성 인격장애로 진단할 수 있을까?
게다가 매일 술 마시고 놀고 먹고 싸움질만 하다가 30대 중반에 이르러, 갑자기 아버지가 있는 회사의 전무로 낙하산 인사를 하게 되면, 사람들은 이 전무가 알콜 중독, 인격장애이니까 치료를 받아야한다고 확신할까?
실증적으로, 진단은 그 질병 그 자체로서 내려질 수 있어야 한다. 가령, 먼 미래에는 중독을 진단할 때, 중독자의 뇌를 양자 컴퓨터 프로그래밍과 결합된 특별한 뇌분석 기기로 검사하여, ‘현재 당신의 뇌의 도파민 체계는, 정상적인 사람들의 신경세포 회로에 비해, 세포 시냅스의 분포와 밀도가 90% 이상 감소되어 있으며, 신경전달 물질과 스트레스 호르몬들이 지나치게 분비되어 있고, 도파민 수용체들은 감소되어 있다’ 라고 설명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란다. 그의 근무 시간이나, 인사고과를 통해서가 아니라 말이다.
물론 이 ‘직업 적응’ 항목은 절대 정신과 진단의 불문율이 아니다. 오히려 직장은 잘 다니고 있는 우울증 환자들, 공황장애 환자들이 훨씬 더 많다. 이 ‘직업 적응’이란, 가끔 치료자가 결정을 내리는 것이 어려울 때, ‘객관적’이라고 믿고 싶은, ‘상식적’ 기준이 되어 줄 뿐이다.
근대 이래 일반인들은, 직업에 적응하지 못하는 것을 ‘비정상’이라고 판단하는 ‘편견’을 갖고 있다. 사람들은, ‘일하는 자’, ‘직업의 이름’, 혹은 ‘직함’에 대한 환상에 빠져 있다. 직함이 갖는 마력은 대단하며, 사람들은 노동의 필요성과 노동 자체보다, 직업 자체에 집착하고 있다.
직업이 없는 사람에 대한 무시 밑에는 나는 힘들지만 직업을 갖고 있으니 너보다 더 나은 존재라는 폭력적 자기 위안이 자리잡고 있다.
하지만 세상에는 고정적인 직업이나 직함을 갖고 있으면서도, 생산성이 전혀 없고, 아니 오히려 반사회적인 케이스도 많다. 휴일에도 출근 하지만 공금을 횡령을 하는 직원, 매일 사무실로 출근하지만 고의로 급여를 체불하는 사장, 매일 아침 정시에 임대 사무실에 나타나지만 비서를 희롱하거나 폭행하는 회장 등.
하지만 사람들은 자세한 사정은 두고 봐야 아는 것이라며, 초면부터 그런 권력자나 부자를 경멸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무직자라면 일단 무시한다. 사람들은 죄는 경멸하지 않지만, ‘무직’이나 ‘실직’은 수치스러워한다.
혹시 가족 중에 자녀의 성적을 조작한 아버지, 자녀의 입사를 로비한 어머니, 회사의 재산을 빼돌린 아들, 부하 직원을 추행한 남동생, 회계 장부를 조작한 딸이 있다고 생각해보라. 가족들은 어떤 반응을 보일까? 함께 변호사를 알아볼 것이다.
그러나 그 집의 막내가 3년째 일자리 없이 집에만 있다고 해보자. 가족들의 화제가 기회가 닿을 때마다 거기에 이를 것이다. 차마 뭐라고 하진 못하고, 마치 '치명적인 인간성 결격의 존재'가 자기 집안에 거주한다는 듯 수치스러워 할 것이다. 도대체 왜? 막내가 무슨 짓을 했길래? 남아도는 집안의 재산을 조금씩 소비하는 것 외에, 사회와 타인에게 아무런 죄도 짓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우리가 비난하고 부끄러워 해야할 것은 죄악이다. 결점이나 무능은 죄가 아니다. 죄는 다른 이에게 피해를 주는 것이다. 전통적인 종교의 계율에서처럼, 강력범죄와 불법 행위를 포함하여, 악행, 거짓말, 절도, 폭력 따위가 죄다. 즉 다른 사람에게 끼치는 해악이 바로 죄다.
나는 사람이 직업을 갖지 않아도 무방하다는 말을 하려는 것이 아니다. 일을 하지 않는 사람, 즉 직업적 적응에 실패한 사람에게 주어지는 사회적 낙인이, 실제의 범죄자나 악인에 비해 부당하게 크다는 점을 지적하는 것이다.
일하지 않는다는 것은 마음 아픈 일이고 안타까운 일이다. 하지만 사람들은 대부분 일하고자 한다. 타인과 교류하면서 긍정적인 생산성을 발휘하고자 하는 것은, 인간의 자기 실현의 본능이다. 직업을 갖기 싫어서 직업이 없는 사람은 없다. 만족스러운 직업 활동을 할 수 있다면, 당연히 직업은 없는 것보다 있는 것이 좋다.
사람들의 마음 속에는, '회복할 수 없는 치명적인 결함', '그보다 더 악화될 수 없는 저열한 자신'의 이미지가 존재한다.
'좋은 성적'을 받지 못하면, '평균 이상의 금전적 수입'을 얻지 못하면 ‘못난 인간’이라는 공포.
그리고 그런 공포를 투사하여 외부화시킨다. 그 끔찍한 이미지에 빠져버린 피해자는, 자신이 평범한 인간 이하라는, 자신이 쓸모없고 수치스럽고 추한 존재라는 자기 혐오 속에서 살아가게 된다. 하지만 그런 마음의 감옥에 갇혀서는 안된다. 회복할 수 없는 수치심을 안고 살아야하는 부적격 존재라는 심적 위상은 없다. 그건 망상에 불과하다. 비인간 취급을 판정할 수 있는 기준은 오로지 윤리 뿐이다. 오로지 남을 해치는 자만이 그런 취급을 받아 마땅하다. 특히 무직자나 장기 구직자, 실직자에게 그러한 공포를 투사해서는 안된다.
다행인지 모르겠지만, 현재 한국에서, 무직자에게 투사되어온 광기의 기호는 점차 사그러들고 있다.
장기 불황, 인력 시장의 양극화, 혼란스러운 구직 시장과 비효율적인 배분, 정치 사상적 진보와 계몽, 장기 실직자나 구직자, 이직률의 증가 등으로 인해 이들을 무조건적으로 폄하하던 풍토는 사라져 가고 있다.
하지만, 억압된 소시민들이 무직자들에게 투사하던 광기의 기호 그 자체가 소멸하고 있는가? 그렇지 않다. ‘무직’으로 부터 벗어난, 젊고 지친 피고용인들의 혐오와 광기는, 이제 새로운 대상으로 옮아가고 있으니, 바로 ‘사회성’이라는 기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