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성이라는 새로운 희생량을 선택한 광인의 기호
9장 - 그 자리에 없는 정서적 단서
자신이 이미 갖고 있는 기능을 발달시키는 것에 비해, 아직 갖고 있지 않은 기능을 습득하는 것은 매우 어렵다.
사람은 자신의 두뇌에 기반한 신경 인지감각 기능의 틀(schema)을 통해서 세상을 본다. 자신은 외부 현실을 객관적으로 지각하고, 확실하게 이해하고 판단한다고 믿지만, 타인의 입장에서 보면 오해와 착각 투성이다. ‘자신의 눈 속에 있는 들보를 보지 못하는데 어떻게 형제의 눈 속에 티를 꺼내겠는가’라는 성경의 금언이 있다. 자기 자신을 먼저 성찰하라거나 겸손하라는 도덕적 경고로만 볼게 아니라, 그만큼 사람들은 자신과 외부 세계를 객관적으로 보기가 어렵다.
망상을 가진 환자들은 윗집에서 자신에게 전파나 냄새를 보낸다거나, 자신을 감시하고 있다는 망상이 확고하다. 아무리 이성적으로 증거를 제시하고 설득하려해도, 자신이 포착한 증거들을 제시하며 자신의 믿음을 고수한다.
강박을 가진 환자들도, 하루 종일 씻거나 문지르면서, 어떠한 세균이나 바이러스에 대한 위험성을 검색해서 보여주며,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한다.
여성호르몬 불균형으로 인한 갱년기 우울증이나 월경전 증후군에서, 직장 동료나 가족들에게 분노를 표현하는데, 그 때 자신의 분노가 자신의 내부로부터 비롯되었음을 자각하기는 어렵다. 타인들이 보기에는, 항상 있던 일이고 사소한데, 갑자기 올해 들어 계속 저러는 것을 보니 갱년기 우울증인가 싶다.
우울증의 터널 시야(vision)에 갇히면, 내가 우울증에 걸렸으니 치료를 받아야겠다는 생각을 하기 어렵고, 불우한 환경과 절망적인 미래에 대해 걱정하게 된다. 산에 있는 사람은 산을 볼 수 없고, 바다에 들어간 사람은 바다를 볼 수 없듯이, 우울증에 걸린 사람은 자신의 우울증을 조망할 수 없다.
또, 우리는 조직에서, ‘사장님이 욱하는 기질이 있는데, 툭하면 남에게 분풀이를 한다’라는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지만, 사장이 직접 들으면 뒤집어질 말이다. 본인은, 화를 낼 수 밖에 없는 상황과 대상에게 합목적적으로 분노했다고 확신할 것이다.
이렇게 우리는 타인의 오해와 착각, 쓸데없어 보이는 걱정이나 무의미한 습관 등을 어렵지 않게 포착할 수 있는 만큼, 나 역시 그런 성분을 분명히 갖고 있다고 추정할 수 있다. 즉, 어떤 사건에 대한 나의 분노의 원인이, 50% 이상 나의 뇌의 내부로부터 유래했다는 사실이다.
인간 개인의 이성과 감정이 모두 자신의 뇌의 한계 안에서 발현되므로, 우리는 우리가 전혀 갖고 있지 않은 경험과 기능에 대해서는 상상할 수가 없다. 흔히, ‘너도 겪어봐야 안다’라고 말하는데, (듣는 사람은 ‘꼰대 같다’고 느껴지지만) 실제로 그러한 정서적 경험들이 많다.
사람이 마음 속으로 그리는 이미지와 생각들은 모두 경험을 통해 형성된 뇌 회로들의 결과물이기 때문에, 어떤 개념에 대한 신경 회로가 형성되어 있지 않으면, 인간은 그 개념을 떠올릴 수 없다. ‘나중에 내가 자식을 낳으면’, ‘취직을 하고 사회생활을 겪어 보면’, ‘나이가 들고 늙게 되면’ 등의 상상을 통해 그 감정들을 지적 추론할 수는 있어도, 실제로 나의 마음 속에 정확히 재현할 수는 없다.
개미는, 낮은 지표면에서 ‘선과 면’의 수준에서 외계를 지각하며, 거대한 z축의 3차원을 상상할 수 없다. 유리병 안에 갇혀서 사는 파리 역시 온전한 외계를 상상할 수 없다. 아니, 언어 자체가 없는 생물들은 의식 속에서 '개념' 자체를 상상할 수 없을 것이다.
인간은 시간과 공간에 기반한 인지 기능을 갖고 있으며, 분명히 존재하는 4차원 이상의 공간을 지각하거나 사유할 수 없다. 우주의 시작과 끝에 대해 상상을 할 수 없고, 블랙홀이나 웜홀의 형태에 대해서도 상상을 할 수가 없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왜곡된 3차원의 형태로 그려 이해하는 수 밖에 없다.
타인에 대한 정서적 욕구와 관심, 혹은 공감이나 마음이론이 결여된 사람은, 그 빈자리가 어떤 것인지 상상하기 어렵다. 그리고 그것이 어떤 것인지 전혀 상상할 수 없으면, 당연히 그것을 발달시키기 어렵다. 그러므로 ‘공감과 마음 이론’이 부족한 사람이, 외국어를 배우듯이 당장 그것을 ‘습득’하거나 ‘발달’시키는 것은 불가능하다. 일단은 그것을 왜곡시키더라도 이해하기 쉬운 형태로 하나씩 그려야겠다.
요즘 지하철에서 보는 공익광고에서, 임산부를 위해 분홍색 좌석을 비워두자는 내용의 영상이 있다. 임신한 부인을 두고 출근한 남편이, 빈 자리를 발견하고 앉으려는 찰나에 (이미 엉덩이까지 댄 상황에서 일어난다는 연출이 약간 작위적이기는 하지만), 입을 벌리고 ‘아차’하는 표정을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나는 장면이 있다.
‘그 상황에 그 남편은 어떤 기분일까?’
일반적이라면, 즉 뉴로티피컬이라면, ‘아차 싶은가보군’, ‘민망하거나 뻘쭘하겠군’ 등의 감정을 그가 느낄 것이라고 공감적 추론할 수 있다. '그 배우의 표정'은 초속 100미터의 신경전달속도로 우리의 시상하부에서 전두엽으로, 그리고 변연계를 거쳐서 다시 전두엽으로 수십수백바퀴를 돌면서, 우리가 경험하고 해마에 새겼던 창피함이나 죄책감의 감정을 소환한다. 그리고 ‘그러니 조심하지…’ 혹은 ‘괜찮은데 ㅋㅋ’ 정도의 생각을 떠올리게 된다.
하지만, 공감과 마음이론이 결여되어 있다면, 신경 회로의 이러한 알고리즘은 발생하지 않는다.
물론 치료자가 아스피에게, ‘저 상황에서 저 남편은 어떤 기분일까?’라고 묻는다면, ‘죄책감을 느끼겠지요’라고 답할 수도 있지만, 그것은 이해되지 않는 문제 풀이를 암기로 해결해온 사람과 같다.
아스퍼거 증후군의 경우, ‘그 남자 배우가 아차 하며, 입을 벌리는 표정’을 보며, 저 사람이 ‘당혹감’을 느끼고 있음을 감정적으로 인지할 수 없다. 아스피들의 유전자에는, 표정이나 발성이 담고 있는 다양한 감정적 성분들에 대한 데이터베이스가 부족한 것으로 보인다.
우리는 대부분 의식하지 못하지만, 사람은 언어의 내용보다, 얼굴 표정과 어조, 성량으로 인해 더 영향을 받는다.
각종 시술에 대한 영업을 하거나 보험 약관을 설명하는 사원들이, 활짝 웃으면서 부드러운 목소리로, ‘부작용이 좀 있을 수 있어요~^^’, 라거나 ‘원금 손실 가능성 있습니다~^^’ 라고 하면, 사람들은 안심하고 상품을 구매한다.
아버지가 유치원생 아들을 훈육할 때, ‘너 한번만 더 이러면 혼날줄 알아!’라고 소리를 지르는 것과 ‘너의 이런 행동은 사회적으로 용납되지 않아!’ 라고 소리를 지르는 것은 차이가 없다. 왜냐면 아들이 아버지의 분노를 포착하는 주요 단서는, 타인의 표정, 성량, 어조에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스피는, 이러한 타인의 모습에서 정서적 단서를 포착하지 못한다. 그래서, 그 남편이 분홍색 임산부 전용 좌석에 앉을 뻔했으므로, 즉 ‘공중도덕을 어겼으므로 죄책감을 느낀다’고 지적 추론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 추론은, 내가 질문을 했을 때의 모범 답안 반응일 뿐이고, 아스피의 마음 속에서는, ‘저 사람이 진정 규칙을 위반했는가, 아닌가’만이 주요 관심사가 된다.
다시 말해서, 정서적 단서 자료의 결핍을, 모두 ‘규칙’과 ‘안전’의 문제로 보완한다.
극지방의 에스키모들은 흰색을 열가지 이상으로 분류할 수 있다고 한다. 하지만 우리들은 그렇게 구분하기 어렵다. 우리에게는 그저 모두 같은 흰색들이다.
어린이들에게 처음으로 ‘먹’과 ‘물’을 주고 수묵화를 그려보라고 하면, 단지 시꺼먼 형태만을 그린다. 경험하거나 본적이 없으니, 흑백의 수십가지 명도에 따른 표현은 불가능하다. 수묵화를 직접 보여주더라도, ‘흑백’ 아니면 ‘회색’ 이라고 지각할 것이다.
이와 같이, 정서적 단서를 세부적으로 구분하여 포착할 수 없게 되면, 타인의 감정 상태를 극단적으로 추론하게 된다. 즉 ‘무(無)’ 아니면 ‘나를 사랑함’ 아니면 ‘나를 미워함’ 이 되는 것이다. 이 중에 ‘나를 미워함’은 특히 나의 안전을 위협하는 것이므로 주의할 필요가 있다.
그러므로 그들에게 있어서, 왜 규칙은 꼭 지켜야 하는가? 그것은 ‘규칙은 마땅히 지켜야 하기 때문’이며, ‘규칙을 지키지 않으면’ 위험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잘 성장한 아스피들은, 매우 고지식한 원리원칙 주의자들인데, 이러한 특성은 분야에 따라 빛을 발할 수 있다.
반대로, ‘공감과 마음이론’이 발달한 뉴로티피컬들은, 학교를 졸업하고 사회에 나오면, 선배나 동료들의 행동을 무비판적으로 답습한다. 이중에는, 탈법적이거나 기존의 규범에 위반되는 것들도 있는데, 소위 ‘관행’이라고 불린다.
‘관행’을 모두 배척할 수는 없다. 실제 현실 사회에는, 제도를 통해서는 정확히 규정할 수 없는 수많은 상황들이 발생하기 때문에, 기관 실무자의 주관이나 임의적인 결정, 혹은 선임 감독자들의 관행에 따른 판단이 있을 수 밖에 없다. 그리고 이러한 임의적인 감독자들의 관리는, 가령 한창 봐주다가 어느날 갑자기 칼을 빼드는 세무조사나 교통 검문처럼 ‘권력’의 속성을 띄게 된다. 즉, 현 시점에서 이미 ‘관행’과 ‘감독자’는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그런 면에서, 정치적 ‘부패’도 공감 덕분이다. 미국과 달리 로비가 불법인 우리나라에서도, 충분히 로비는 횡행하며, 또 검거되어도 무죄가 되는 이유가 그 ‘공감 능력’ 덕분이다. 뉴로티피컬은, 명절마다 한우 선물 세트나 특별 기금을 주고 받으며, ‘이번에 우리 아들이 거기 면접을 보나봅니다. 허허허’ 하면, ‘아, 저 사람이, 자신의 아들을 면접에서 합격시켜주기를 바라는구나’라고 마음이론으로 추정하며, 고마움과 안쓰러움을 느낄 수 있다.
사람들은 청년 시절의 도덕률을 무시할 수 있게 되는 것을 성숙하게 되었다고 착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나이를 먹을 수록, 어렸을 때 분명히 학교에서 배운 것과는 다른 것, 그러면 안된다고 배웠던 것들을 실행에 옮기면서 갈등을 느끼지 않는다.
이러한 사회에 발을 들여놓은, 젊고 고지식한 원리원칙 주의자에게 많은 고충이 생기리라고 쉽게 짐작할 수 있다. 그들 중 극소수 만이, 고결한 지식인이자 행동가로써 존경 받을 것이며, 나머지 대부분은 답답하고 고지식한 ‘선비’ 취급을 받게 될 것이다.
아스피 뿐이 아니라, 성인 ADHD 나, 강박장애의 케이스들도 비슷하다.
이들은, 미지의 생활 영역에서 안전을 확보하기 위해, 부족한 타인의 정서적 단서 대신, 강박적인 규칙 엄수에 의지한다. 절대로 실수를 하지 않으려고 노력하고, 교과서적 원칙에 의지하며, 법률에 관심이 많다. 대인 관계에서도, 직장 동료의 언행에서 정서적 단서를 읽는 것이 아니라, 예절에 어긋나지 않기 위해 노력하고, 상대방의 기분을 나쁘게 하지 않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 감사와 위로, 응원을 표현하는, 다채로운 관용적 수사가 등록된 마음 속 국어사전을 보유하고 있으며, 수시로 그런 언어들을 발사한다.
하지만 그들이 365일 24시간 레이더 경계를 유지하면서, 예절과 관습을 지키기 위해 항상 노력함에도 불구하고, 갈등은 발생한다. 왜냐면 인간은 원래 서로 다투고 갈등하는 존재들이기 때문이다. 합리적 이성과 규칙에 기반한 것이 아니라, 감정적이고, 주관적이며, 충동적이고, 또 관습적이며 비합리적인 관행에 물든 존재들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원리원칙 주의자들이 아무리 노력해도 그들의 대인관계 속 평화는 지속되지 않고, 또 어느 정도 지속한다고 하더라도 그 에너지 투자 대비 가성비가 낮다. 정서적 단서 포착이 미흡한 원리원칙 주의자들은, 항상 근면 성실하고 타인을 배려하려고 노력하며, 인내하고 희생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정한 친밀감을 형성하기 어렵고, 내심 모든 대인관계들이 피로하다. (그러니 누가 보기에도 외향적인데, 자신은 사실 내향적이라고 주장한다)
이들이 심리적으로 가장 잘 적응하는 시기는, 복종하면서 시키는 일만 하면 되는 부하 시절이며, 승진할 수록 심리적 스트레스가 오히려 증가한다. 관리자 급이 된 후에는 부하들을 도덕적으로 대하기 위해 신경을 쓰기 때문에 자기 업무량이 줄지를 않고, 위로는 감정적인 상사의 정서적 단서 포착이 어렵기 때문에 스트레스가 커진다.
특히 이들은, 감정 과잉의 히스테리컬한 상사와 궁합이 맞지 않는다. 히스테리컬한 보스들은, 객관적인 평가나 검증 보다는, 인정 욕구나 정서적 애정 욕구를 통해 판단하고 행동한다. 안타깝게도 한국은 전체주의적 고속 성장을 거치면서, 자신의 능력보다 인맥이나 학연을 통한 네트워크를 통해 고위직에 이른 사람들이 많다. 지금은 감소하고 있지만, 기업들의 중요한 제휴나 계약이, 룸살롱이나 골프장에서 이루어져 왔으며, 아직까지도 사람 좋아하고 공감이 풍부한 임원들이 많이 남아있다. 이러한 정서적 욕구가 주된 리더들로 결성된 조직은, 문제해결력이 떨어지며, 점차 쇠퇴하고 부패한다. 비위 맞주는, ‘사람 좋은’ 인사가 횡행하여, 배는 잘못된 방향으로 향하고, 직원들의 업무 가성비와 생산성이 낮아진다.
이런 조직에서 강박적인 관리자는, 히스테리컬한 임원 밑에서, 자기 자신의 규범을 반복 검증하고 완벽 업무를 수행하기 위해 노력하지만, 도저히 그를 만족시킬 수가 없어서 좌절한다. 아무리 완벽하게 일처리를 해도, 지적하고 화를 내니 이유를 알 수가 없고, ‘저 인간이 미쳤나?’ 라고 생각한다.
이 시점에서 아이러니하게도, 강박적인 관리자들이 그런 히스테리 상사들을 일컬어, ‘공감 능력 없는 소시오패스 같은 상사’라고 비난하기도 한다. 부하를 배려하지 않고 툭하면 분노를 폭발시킨다는 점에서 그 상사의 성격이 부도덕하거나 성숙하지 못한 점은 맞다. 하지만 ‘공감’에 대해서는 오히려 이쪽에서 부족했다. 왜냐면 이 쪽에서 먼저, 그 상사의 언행에서 드러났을, ‘인정 욕구 결핍에 따른 토라짐’이나 ‘외로움’을 포착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거듭 강조하지만, ‘공감’은 ‘감정’을 포착하고 공유하는 것일 뿐, 거기에 대해 긍정적으로 행동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공감’은 하되, ‘공감적 행동’은 하지 않을 수 있고, 오히려 ‘부정적으로’ 반응할 수도 있다. 팀장님이 외로워보이지만, 들어주다 보면 피곤해지니까 죄송하지만 얼른 도망칠 수도 있다.
'공감'은 도덕적 판단이 아니고, 기능적 문제다. 히스테리컬한 팀장이 쉬는 날에도 직장에 나오려하거나, 부하들을 불러내고, 쓸데없이 주변을 어슬렁거리며, 시시콜콜한 잔소리를 늘어놓을 때, 뉴로티피컬은 그 팀장을 보고 ‘저 양반이 외롭고 심심하구나’라고 공감할 수 있다. 그렇다고 꼭 팀장에게 ‘커피 한잔 하실래요?’ 라거나, ‘머리 염색 새로 하셨나봐요’ 혹은 ‘넥타이가 멋지십니다’ 따위의 대사를 해야 할 도덕적 의무는 없다. 그리고 이렇게 정서적 욕구가 큰 상사의 비위를 맞추는 것은, 직업적 의무도 아니다. 공감되지 않음에도 호의적으로 반응하는 것은 이른바 ‘감정 노동’이다.
요점은, 상사의 일관적이지 않은 짜증과 거절이, 그의 정서적 욕구에서 나온다는 점을 알고 있으면, 그 히스테리를 견디기가 훨씬 더 수월하다는 것이다. ‘저 분이 내가 말을 걸지 않아서 외롭구나’라고 알면, 그 짜증을 그냥 흘려보낼 수 있지만, ‘상사가 이유 없이 자신의 보고서를 반려하면서 화를 내고 있다’고 추정하면, 결국 분노를 참을 수 없다.
그리고 설상가상, 타인의 정서적 욕구를 포착하지 못하는 나는, 나 자신의 정서적 욕구도 포착하기 어렵기에, 조직 생활은 점점 더 외롭고 지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