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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현수 Sep 26. 2021

맥린이에서 맥잘알으로

나를 거쳐간 그 많은 맥주들에게

  나는 주당이 아니다. 한때는 ‘김술현’이라 불린 적도 있었지만 적어도 지금은 그렇다. 과로 사회에 찌들어 간에 피로가 쌓였는지, 더는 술을 물 대신 마실 수 없는 ‘김수현’이 되었다. 김술현은 맥주를 싫어했다. 맥주를 마시면 취하기 전에 배가 먼저 불러 버리니 취할 수가 없었다. 맥주의 냄새도 김술현의 취향은 아니었다. 매번 맑고 투명한 이슬만 찾아 마시던 이십 대의 김술현은 삼십 대가 되면서 간 건강과 함께 ㄹ을 잃어버렸다.


  지금의 김수현은 맥주를 좋아한다. 소주보단 간에 덜 나쁠 거라는 억지 이유를 만들었다. 맥주는 배가 불러 취하지 않으니까 말이다. 요즘은 일주일에 한두 번 퇴근길에 맥주를 마시러 간다. 동행은 없어도 괜찮다. 단골집에 새로 들어온 맥주 맛을 음미하려면 오히려 혼자인 게 편하다. 좋아하는 맥주를 시켜두고 글을 쓰거나 책을 읽기도 한다. 그렇게 맥주와의 시간을 보내고 알차게 하루를 살았다는 기분에 취해 집에 돌아간다.



  사실 맥주의 매력을 처음 느낀 건 스무 살이었다.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남의 돈을 벌어먹는 것이 녹록지 않는다는 것을 배워가던 때였다. 유난히 힘들었던 날, 친구가 이럴 땐 시원한 맥주를 마셔줘야 한다고 했다. 같이 가까운 치킨집에 가서 생맥주 오백을 시켰다. 오래 얼려두어 하얗게 서리가 내린 잔에 얇은 거품이 덮인 맥주가 나왔다. 차가운 손잡이를 잡고 첫 한 모금을 목구멍으로 넘기고선 나도 모르게 캬 소리를 냈다. 맥주가 이렇게 맛있었나 싶었다. 청량한 맥주가 고된 피로를 씻어내려 주는 것 같았다. 물론 그때는 아직 김술현이었기에 그날 이후 다시 맥주의 참맛을 느끼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렸다.



  맥주도 종류마다 각기 다른 맛이 있고 여러 가지 향이 담길 수 있다는 것을 배운 건 스물여덟 살 때였다. 첫 직장을 관두고 인생 최초로 한량 같은 삶을 살던 시기였다. 그때 독서모임을 나가면서 다양한 사람들을 만났다. 펍을 운영한다던 회원은 맥주에 관한 책을 소개해 주었다. 나는 그전까진 편의점에 있는 네 캔에 만 원짜리 맥주에도 신세계를 경험하던 맥린이(맥주+어린이)였다. 일본의 맥주는 아사히나 겨우 알던 나에게 그는 마리하나라는 맥주를 소개해 주었다. 마리하나는 일본어로 홉 꽃을 의미한다. 마약만큼 중독성이 있다는 뜻이었는지도 모르겠다. 나는 그 맥주에 빠져 한동안 헤어 나오지 못했다. 맥주에선 상큼하고 상쾌한 꽃향기가 났던 것 같다. 마셔본 지 오래되어 향기가 생생하게 기억이 나지는 않지만, 그때 중독자처럼 마리하나를 달라고 외쳐댔던 내 모습이 떠오른다. 지금은 그 맥줏집도 마리하나의 향기처럼 기억의 저편으로 사라져 버렸지만.



  본격적으로 맥주를 즐기는 취미가 생긴 건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지금 다니는 회사 근처에 근사한 펍이 있다는 걸 입사한 지 2년이 지나서야 알게 되었다. 몇 개월 동안 준비했던 프로젝트를 끝내고 직장 동료들과 저녁을 먹으러 가던 날이었다. 그동안 쌓인 스트레스를 제대로 풀려면 대단한 것을 먹어야만 했다. 분위기도 좋고 괜찮은 곳 없나 고민하며 떠올린 곳은 ‘만리단길’. 서울역 뒤쪽 만리재로에 예쁜 카페와 레스토랑들이 들어서면서 어디에나 있는 별명이 붙은 거리였다. 그날따라 눈에 들어온 만리단길 펍에서 나는 충격적으로 맛있는 맥주를 만나게 되었다.



  유자에 천일염, 상큼한 향에 짭짤한 맛이 나는 맥주였다. 직전까지 회사 욕을 하던 내 입은 어느새 맥주 맛을 음미하고 있었다. 나는 유자즙을 더한 연한 바닷물 맛이 난다고 말했다. 그 독특한 맥주의 이름은 ‘바닷바람’. 세상에 이런 맥주도 있구나, 사장님을 보고 너무 맛있다며 감탄사를 연발하니 맥잘알(맥주를 잘 알고 있다)이라는 칭찬을 돌려받았다. 그 이후에도 바닷바람을 찾아 만리단길에 갔지만 매진되어 마실 수 없었다. 사장님은 다시 바닷바람을 마시려면 양조장이 있는 부산에 가야 한다고 말했다. 그리고 잔뜩 실망한 나에게 오이와 청양고추 맛의 맥주를 소개해 주었다. 이름은 ‘소박이 고스트’. 오이소박이나 매운 동치미 맛이 나는 맥주를 마셔본 적이 있는가? 세상엔 이렇게 재밌는 맥주가 많다.



  맥잘알이란 칭호를 받았지만 나는 여전히 맥주를 잘 알지 못한다. IPA가 뭐니 라거가 뭐니 그런 건 잘 몰라도 좋다. 세상에는 아직 내가 마셔보지 못한 맥주가 가득하다. 나는 맛있는 맥주를 발견해가는 과정이 좋다. 그러다 생각지도 못한 맛의 맥주를 만날 땐, 어느덧 직장의 고인물이 된 내가 다시 맑아진 기분이 든다. 맥주는 언제나 긴장을 품고 사는 나에게 여유를 허락한다. 가끔은 눈물의 짠맛을 함께 마실 때도 있지만 그래서 더 후련해질 수 있다. 맥주가 선사하는 삶의 위로를 위하여. 맥린이가 맥잘알이 되는 동안, 나를 거쳐갔던 모든 맥주들에게 감사를 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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