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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레마정 May 06. 2023

규슈 3일 차, 다시 만난 다자이후

규슈 한일 고대사 여행기 

이키섬(壱岐島) 입도 포기

출국 전 계획했던 답사 일정표에 따르면 오늘은 '이키섬'(壱岐島)을 들어가는 날이었다. 

이키섬은 규슈 후쿠오카와 대마도 사이에 위치한 섬이다. 

일본의 행정구역상으로는 '나가사키현'에 속해 있다.

후쿠오카 하카타항(제2터미널)에서 고속선(제트포일 비너스2호)으로 70분 정도면 도착할 수 있다. 

'이키섬'을 가려고 한 이유는 일본 역사에 등장하는 '일지국'이 바로 이 섬에 있었기 때문이다. 

'이키섬'에 가면 '요시노가리'와 함께 중요 유적지 중 하나인 '하루노츠지세이에키'와 '일지국'과 관련된 전반적인 정보들, 그리고 조선통신사 관련 전시의 관람이 가능하다는 '이키코쿠박물관(현립)'을 가려고 했다.  

    

오전 8시경, 우리는 습관대로 숙소의 대욕장을 다녀온 후 계획했던 일정 상의를 하면서 중대결정을 했다.

'이키섬 일정'을 취소키로 한 것.

'일지국', '통신사'에 대해 사전 학습도 하고 이번 답사일정처럼 당일치기가 아닌 숙박 일정으로 계획하여 다음 답사에 입도하기로...


이키섬 당일치기 일정은 오전 10시 30분 하카타항에서 고속선을 타고 들어갔다가 오후 5시 10분 이키섬에서 후쿠오카로 나와야 한다. 또한 입도는 '이시베'항, 출도는 '고로우라'항으로 이키섬의 입도와 출도의 항구가 각각 다르다.


비너스2로 불리는 제트포일의 1인 기준 왕복요금이 11,600엔, 2인 23,200엔.

한국 돈으로 무려 23만 원이다.(허걱!)

'하루노츠지세이에키'와 '이키코쿠박물관'을 둘러보고 관람하는 소요시간은 약 3시간.

'이키섬에 머무를 3시간'을 위해서 고속선 승선요금으로만 23만원을 쓰기엔..... 팍팍한 답사 예산의 부담이 너무 컸다.  


고속선과 페리, 각각 일장일단(一長一短)이 있다.

고속선 소요시간은 70분, 페리 소요시간은 130분 정도로 고속선은 빠르게 이키섬으로 입도할 수 있는 반면 이키섬 내에서의 이동은 섬내 별도 렌트카를 이용 하거나 섬내버스(일반 대중교통 버스)를 이용해야 하며 페리의 경우 입도 소요시간은 고속선의 2배지만 차량 선적이 가능하기 때문에 입도 후 섬내 이동이 용이하다.


자세한 사항은 '하카다-이키-쓰시마' 항해 노선을 운영하고 있는 '규슈유센' 여객선 사이트(하단 링크 , 한국어 가능)를 이용하면 된다.


규슈 유센 여객회사 홈페이지 화면

九州郵船 | Official Site (kyu-you.co.jp)



이키섬 일정 취소와 대체 일정 발굴

그때부터 대체일정을 찾기 시작했다.  

4일차 일정으로 예정했었던 '후쿠쓰'의 '신바루・누야마 고분군(新原・奴山古墳群)'과 답사 1일차 우천으로 가지 못한 '다자이후 텐만구'와 '다자이후 정청터'를 가기로 했다. 

4일차는 '후쿠오카시립미술관' 외, 박물관과 성터 등 '후쿠오카' 관련 역사 유적 관람에 더 할애하기로 했다. 

이키섬 일정 취소, 대체일정 발굴에 들어간 시간은 1시간. 

답사기간 중 최고의 순발력을 발휘한 순간. 그렇게 오전 9시에 숙소를 나섰다.  


'신바루・누야마 고분'까지는 고속도로 대신 무료 도로(일반도로)를 이용하기로 했다.

일반도로를 이용하면 시간이 다소 소요될 수 있지만 고속도로를 달리면서 놓치는 아기자기한 '일본 사람들의 동네' 곳곳의 모습을 볼 수가 있다.

'후쿠쓰'까지 대한해협 바다에 연한 해안길로 '가는 즐거움과 보는 즐거움'을 동시에 만끽할 수 있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신바루・누야마 고분군을 찾아서

오전 10시 30분 '신바루누야마 고분군'에 도착했다. 시골마을의 논밭을 지나 찾아냈다. 

안내 표지판을 보며 얼마나 기뻤는지 모른다. 

모두 구글 지도의 힘과 남편의 탁월한 내비게이션 감각 덕분이다. 


이 시골 마을의 고분군을 찾아온 이유는 4세기~6세기 무덤 44기가 마을 안에 흩어져 있는데, 일본의 고훈시대 무덤 양식인 '전방후원분'을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함평(신덕 고분), 해남(장 고분), 영암(자라봉 고분)에서 유사한 양식의 무덤들이 나와, '임나일본부'의 흔적이 아니냐는 등의 여러 설들이 있다.  

한일 고대사에는 어떤 사연들이 있는지, 일본의 '전방후원분' 무덤을 보고 싶었던 것이 여기까지 온 이유다. 

  

이곳 고분군은 멀지 않은 섬 '오키노시마'와 연계 유적으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이름을 올렸다. 

'오키노시마'는 규슈와 한반도 중간에 위치한 섬으로 고대부터 바닷길 안전을 기원하는 제사가 이루어졌다. 

일본인들이 '신들이 머무는 곳', '신의 섬'으로 부르는 이유다. 탄복할 만한 네이밍, 스토리텔링의 힘이다. 

제사가 이루어진 곳이라 해서 '신의 섬'으로 이야기를 만들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한 일본, 역사유적에 대한 스토리텔링의 중요성을 이렇게 실감 나게 말해주는 사례가 있을까. 

일본은 현재 20개, 우리나라는 13개의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을 보유하고 있다. 

(남편은 일본인들의 '비정상적 오컬트 습성 중 하나'라며 여기저기 '신'을 가져다 붙이기 좋아한다고 비아냥을 쏟아냈다. 나는 그냥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렸다.)


당시 제사의식을 담당하는 계층 또한 신성한 지위를 가진 자로 취급되었다. 

'오키노시마' 제사 의식을 담당하는 고대 호족 '무나가타 가문'의 무덤군이 '신바루누야마 고분'이다.

'오키노시마'가 내려다 보이는 곳에 40기가 넘는 무덤들이 줄지어 있다.

현재 이곳에 논밭이 들어선 곳엔 과거에는 대한해협 바닷물이 들어찼던 곳이다.

마을과 고분군 입구에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임을 알리는 기념비가 자랑스럽게 서 있었다. 

그곳에서 바다와 무덤군을 멀리 조망할 수 있다.


<좌> 신바루・누야마 고분 안내 표지판 , <우> 신바루・누야마 고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등재 기념비
신바루・누야마 고분군 전경, 멀리 오름과 숲처럼 보이는 봉우리들이 고분들이다. 


자그마한 시골길과 두렁을 따라 무덤들이 펼쳐져 있다.

43호분, 42호분, 41호분 이렇게 하나하나 확인해 나갈 수 있다.


가장 중심이 되는 고분은 22호분이다.

22호분 가까이 근접하려면 한참이 걸린다. 30여분 정도는 걸어내려가야 한다.

열쇠구멍과 같은 '전방후원분'이 처음으로 보인다.

그곳에 도달했다면 30호분이다. 그리고 내려가다 보면 25호분이 보인다.

길이 갈라진다. 한 길은 큰 도로로 내려가는 곳이다. 25호분이 있는 반대편에 15호분이 있다.

갈라진 곳을 내려다가 보면 저 멀리 큰 무덤이 보인다.

그 무덤을 향해 올라가면, 무덤의 정체가 '전방후원분'임을 알게 된다. 24호분이다.

24호분을 지나 오른쪽 큰 무덤 20호분이 보인다. 22호분을 찾아 한참을 헤매었다.


드디어 22호분 표지석을 찾았다. 그러나 무덤은 보이지 않는다.

주변을 한참을 찾아보니 큰 숲이 무덤을 가렸다.

그 큰 숲 속에 22호분, 21호분, 23호분이 숨었다.

22호분도 '전방후원분'이다.


도로 건너 월류지라는 저수지가 보이는 곳에도,

호수처럼 물이 모여있는 곳에도 여러 구의 무덤이 보인다.

월류지 등의 호수는 과거 바다가 있었던 흔적이다.


<좌> 멀리서 본 고분 30호분 , <우> 고분 30호분 앞에서 촬영한 사진(30호분을 안내하는 표지석이 보인다.)


<좌> 고분군 주변에 위치한 월류지 전경 ,  <우> 숲에 가려진 고분 22호분(22호분의 표지석을 보고 위치를 알 수 있다.)



이곳에서 '전방후원분' 3~4개를 보았다.

우리나라 함평, 해남, 영암 등 '마한의 무덤'에서 보았던 무덤 양식이다. 

이 무덤들은 '일상의 공간'에 서 있었다. 

산 위를 장식하는 것이 아니라 생활 공간과 거의 평면적인 곳에 있었다. 

그리고 무덤의 규모는 마한 지역에 남아있는 전방후원분 규모보다 훨씬 작은 것들이었다. 

그렇다면 '영산강 일대 전방후원분'들의 정체는 무엇일까.


'신바루누야마 고분군'은 시골길에 자연스럽게 어우러지는 무덤군이다. 

이토록 단조롭게 보이지만 많은 노력이 모여진 것들이다. 

이곳의 마을 사람들은 정기적으로 무덤 주위의 풀을 베고 자발적으로고분 주변을 관리한다. 

그들은 하나씩 '무덤(쓰가)의 풍경'을 추억으로 가지고 있다. 

어려서부터 그들은 무덤 주위 신령한 기운들이 흐른다 생각하며 함부로 대하지 않고 조심했다.  

그들은 이곳 '풍경에 얽힌 추억'의 한 장면을 모두 가지고 있다. 

저 산의 조망이, 좋은 무덤이 어떤 것인지, 석양이 질 무렵 붉은 빛이 가장 아름다운 무덤이 어느 것인지, '자기만의 쓰가 풍경'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마을 사람들에게 삶의 추억이 되는 문화유산.


<신바루・누야마 고분 위치>

新原・奴山古墳群 https://goo.gl/maps/59ux5c9TQrqdWz8o9

616 Nuyama, Fukutsu, Fukuoka 811-3522 일본


다자이후 정청터 : 고대 일본의 서쪽 도읍 

오후 12시 '후쿠쓰'를 출발했다.

'다자이후'까지 가려면 '후쿠오카'를 거쳐 다자이후로 가는 일정이다.

무료 도로를 타고 이동했다.

오후 2시경 '다자이후 정청터'에 도착해 주차장에 들어섰다.(이 곳 주차장은 무료다.)

하늘색 트레이닝복 바지와 흰색 티를 입은 초등학교 아이들이 무리를 지어 정청터 이곳저곳을 뛰어다니고 있었다.

봄소풍을 나온 모양이었다.

  

다자이후는 '고대 일본의 서쪽의 도읍(니시노미야코)'이라 불리는 곳이다.

'일본 유산(Japan Heritage)'으로 지정되어 있다.

고대 '다자이후'에는 규슈 전체를 통치하고 외교나 대외 방비 등의 역할을 하는 관청이 있었다. 

그곳이 '정청'이고 지금은 주춧돌만 남아있는 것이다. 


'다자이후'는 우리 대한민국과도 관계가 깊은 곳이다. '남 같지 않은' 일본의 도시다.

'다자이후' 곳곳에 우리 조상들의 흔적을 찾고 예민한 감성으로 그 숨소리를 들을 수 있다. 

백제 멸망 이후 사건들과 아주 관계가 깊다.  


일본의 '천지 천황(天智天皇)'은 백제 지원을 위한 백강 전투(백촌강 전투)에 대규모 원병을 보낸다. 

그러나 지금의 군산 인근 백강에서 백제-왜 연합군은 신라-당 연합군에 패배한다. 

이 사건이 있은 후, 일본 열도까지 진격해 올지 모르는 당과 신라를 막기 위해 축조한 성이 이곳 다자이후의 수성(水成, 미즈키성), 대야성(大野成, 오노성)이다. 

특히 오노성은 백제에서 망명해 온 귀족의 지휘 아래 축성된,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산성이다. 

백제 도성을 모방하여 세워진 것이다. 


<좌> 다자이후 정청터 전경(소풍 나온 초등학생들이 보인다.) , <우> 다자이후 정청 본관터 앞(도독부고적이라고 쓰인 표지석이 보인다.)
<좌> 다자이후 정청터 전시관 앞에 세워진 시비 , <우> 과거 오토모노 타비토가 개최한 매화연 복원 상상도(안내 리플릿에 삽입된 사진이다.)


'다자이후 정청터'에는 전시관이 별도로 마련되어 있다.

그 전시관에는 '다자이후 정청터'의 역사에 관한 자료들이 소장되어 있다. 관람료는 200엔.


전시관에서 만난 안내직원의 친절한 설명이 인상 깊었다.

'텐만구(천만궁)'의 뜻이 무엇인지, 정청터에 얽힌 사연은 무엇인지, 여성 직원은 열심히 설명했다. 

'파파고'를 쓰며 우리에게 안내를 해준 전시관의 여성. 


전시관을 나오니 '시비'가 세워져 있었다.

8세기경 '다자이후'에 머물며 시를 쓰는 시인 그룹이 있었다. 이름은 '지쿠시사단.' 

그들은 만엽집에 320수의 시를 남겼다 한다. 


'정치경제 중심지'인 '다자이후'에 왜 시비일까.  

'다자이후'는 동아시아의 국가 간 교류 장소로 외국에서 온 귀빈들이 많았다. 

해외 사절들은 상륙 직후 바다에서 가장 가까운 '하카타'의 해외사절 영빈관인 '고로칸'에 1차로 머물다, 다자이후 정청으로 온 후 정청에서 의례와 환대를 받았다. 


'다자이후'는 외교사절과의 만남을 위한 문화적 소양을 가진 이들이 필요했다. 

문화적으로 앞선 중국, 한반도의 백제와 신라에서 온 사람들과 만나 대화를 나눌 수 있어야 했다. 

이 중 유명한 사람이 7세기에서 8세기 활약한 '오토모노 타비토(大伴旅人)' 장관이다. 

그는 자신의 관저에서 '매화연'이라는 연회를 열었다. 

중국에서 가져온 매화를 보고 서로 감탄하면서 시를 짓는 모임이다.  

매화는 중국 당에서 건너온 식물이기에 중국문화의 하나로 받아들여졌다. 

당시 '다자이후'의 이런 문화적 배경 가운데 시인 그룹이 '다자이후'를 방문했던 것이다.  

살펴보니 다자이후에서 매화는 당연 중요한 나무이자 꽃이다.

'오토모노 타비토의 매화연', '텐만구의 미치자네 비매(비매) 전설' 등.

'다자이후'를 오려면 매화가 피는 2월 말에서 3월 중순이 좋겠다.

(남편은 이에 대해서도 "우리나라는 과거 임금의 변을 매화라고 불렀다."며 별 것 아닌냥 씩씩거렸다. 이럴 때 마다 정말 모르는 사람이고 싶다.)


다자이후 텐만구의 스가와라노 미치자네 : 이야기가 역사가 되고 명소가 된다 


'다자이후 정청터'에서 10분정도 거리에 '다자이후 텐만구'가 나온다.

'텐만구'는 한자로는 '천만궁'이고 '일본의 신사'다.

주차장에 차를 주차(주차요금 500엔)하고 신사 앞에 늘어선 상점을 지나 신사로 향했다.


이곳은 학문의 신으로 추앙받는 '스가와라노 미치자네(菅原 道眞)'를 모시는 신사다.

헤이안 시대 인물인 그는 시 뿐만 아니라 무예에도 능했다.

천황의 총애를 받기도 하였으나 당시 라이벌이었던 '후지와라노' 대신의 시기로 '다자이후'로 좌천되었다.

901년 교토에서 '다자이후'로 온 후 903년 생을 마쳤다. 

그가 죽자 시신이 안치된 관을 소 달구지에 싣고 장례를 치르기 위해 이동하려고 하였다.

그런데 소가 지금의 텐만구 지역에서 꿈쩍하지 않으며 움직이지 않았다.

사람들은 소를 다독이기 위해 이 지역에 '미치자네'를 기리는 공간을 조성하였다.

그것이 바로 '다자이후 텐만구'이다.


'다자이후 텐만구'에 근무하는 안내원을 통해 알게 된 재미있는 사실 하나.

'미치자네'가 좌천되어 '교토'에서 '다자이후'로 올 때,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소 한 마리를 보게 되었다.

자신이 도살 당할 것을 아는지 슬피 우는 소를 보고 가엽게 여긴 '미치자네'는 그 소를 주인으로부터 사서 '다자이후'로 함께 왔다.

이후, '미치자네'는 사망할 때까지 그 소를 기르며 생활했다.

바로 그 소가 '미치자네'의 마지막 길을 함께한 것.

그 때문인지 신격화 되어 신사에 봉안된 '미치자네'의 각종 초상에는 그 소가 함께 그려져 있다.   


내부는 관광을 온 중국인들과 한국인들만으로도 붐볐다.  

우리나라 모 국립대의 한 학과가 이곳으로 답사를 온 듯했다. 

대학생으로 추정되는 청년들이 한국어로 대화하며 신사 이곳저곳을 마냥 즐거운 듯 다니고 있었다.

대한민국 국립대의 학생들이 일본의 신사로 답사를 오다니, 무언가 불편한 기분이 들기도 했다. 

대일항쟁기 조선의 문화를 말살하고, 창씨개명을 강요하고 참배를 시킨 곳이 신사다.

그 역사적 기억이 있어 여전히 신사는 내게 불편한 곳이기 때문이다.

(남편은 "일본인들이 좋아라하는 사람을 신격화 해서 만든 신사에 대한민국 국립대 학생들이 몰려와 뭐가 좋다고 여기저기 생각없이 웃으며 사진 찍고 다니는거냐!"며 대학생들이 들을 정도로 투덜거렸다. 물론 난 이 때도 일행이 아닌 척 했다.)


'다자이후 텐만구'에는 소장품을 보여주는 전시관(관람료 500엔)과 간코 역사관(관람료 200엔)이 있다.  

우리가 1일차에 다녀온 '국립규슈박물관'으로 이어지는 길도 있었다. 

'텐만구 박물관', '간코 역사관', '국립규슈박물관'까지 함께 관람할 수 있는 패키지 상품권도 있다. 

'다자이후 정청터', '다자이후 텐만구', '국립규슈박물관'으로 이어지는 일정으로 '다자이후'를 다녀보는 것이 좋을 듯하다.  


'스기와라노 미치자네' 즉, '관원도진' 공의 일생을 기린다는 의미의 간코 역사관(관공 역사관.)

티켓박스의 여성 직원이 "한국인이세요. 안녕하세요."를 연발하는 이 곳에서는 '미치자네' 공의 일생을 16개의 장면으로 구성하고 있었다. 

일본 점토 인형, 하카타 인형(하카타 린요)이 그 장면을 연기하고 있었다. 

역사적 인물을 소개하는 특별한 방식이다. 디지털영상이 많은 요즘, 아날로그 감성을 자극한다.  


다자이후 천만궁 내부에 위치한 간코 역사관 입구와 티켓박스
<좌> 미치자네의 일생 16개 장면 중 7번째 '모미지노 니시키' , <우> 미치자네의 일생 16개 장면 중 15번째 '덴파이산에서 기도'


1. 매화의 노래(849년) 5세

미치자네 공은 어린 시절부터 학문에 힘썼다.

다섯 살 때 이미 일본의 고유시 '와카'를 지었고 그 재능에 미치자네 공의 부모는 무척 기뻐했다.


2. 어머니의 기도(859년) 15세

미치자네 공의 어머니는 몸이 허약했던 미치자네 공을 위해 부처님께 정성껏 기도를 올렸다.

그 정성이 하늘에 닿아 미치자네 공은 건강하게 성장했다.


3. 문무양도(870년) 26세

사람들은 모두 미치자네 공이 학문뿐만 아니라 훌륭한 활 솜씨도 겸비하고 있음에 놀랐다. 


4. 학자로서의 활약(877년) 33세

미치자네 공은 어려운 시험에 합격하여, 학문에 있어 젊은 나이로는 이례적으로 상당히 높은 위치의 관직까지 오르게 되었다. 그의 가르침을 받고 수 많은 우수한 학생이 배출되기도 했다. 


5. 우수한 외교관(883년) 39세

발해의 대사가 일본을 방문했을 때 미치자네공은 외교관으로서 그들을 맞이했다.

미치자네 공이 지은 한시를 접한 대사는 매우 훌륭하다며 극찬했다. 


6. 백성을 위한 정치(886년) 42세

미치자네 공은 지방의 행정 장관으로 부임했을 때, 기근시에 영지 내 백성에게 신속하게 음식을 나눠주는 등 배려 깊은 정치를 행했다. 


7. 모미지노 니시키(아름다운 단풍), 898년, 54세

교토로 돌아온 미치자네 공은 우다 천황에게 깊은 신뢰를 받는 신하가 되었다.

천황의 여로에 동반했을 때 지은 산에 물든 단풍의 아름다움을 노래한 '와카'는 백인일수(일본의 전통 카드게임)의 노래 중 하나로 포함되어 있어 많은 일본인들에게 알려져 있다.


8. 천황의 옷(900년) 56세

9월 10일 다이고 천황이 신하들에게 '가을의 사색'이라는 테마로 시를 짓도록 했다.

미치자네 공은 천황에 대한 감사의 마음을 시로 읊었고 이에 천황은 매우 감격하여 입고 있던 옷을 상으로 미치자네 공에게 하사했다. 


9. 억울한 누명(901년) 57세

이례적으로 출세하며 승승장구하는 미치자네 공을 시기한 '후지와라노 토키히라'는 다이고 천황에게 거짓을 고하여, 미치자네공에게 누명을 씌웠다.

그로 인해 미치자네공은 다자이후로 좌천되게 되었다.  


10. 가족과의 이별(901년) 57세

미치자네 공은 가족과의 이별을 안타카워하며 정원에 있는 매화나무에도 작별을 고하였다.

전설에 의하면 이 나무는 미치자네 공을 따라 다자이후까지 날아왔다고 전해지고 있다.

현재는 신목 '도비우메'로 불린다. 


11. 교토를 뒤로하고(901년) 57세

미치자네 공은 호송하는 관리들에게 둘러싸여 있어 일반 백성은 직접 말을 건네지도 못한 채 먼 발치에서 이별을 안타까워했다. 


12. 도묘지 절에서(901년) 57세

다자이후로 가는 도중에 미치자네 공은 오사카에 있는 도묘지 절에 머물렀는데 그 절에 살던 숙모와 작별을 고했다. 그런데 심보가 고약한 관리 한 명이 새벽 닭을 일부러 울게 하여, 예정보다 빨리 출발하게 되었다. 


13. 하카타에 도착(901년) 57세

미치자네 공은 어린 자녀와 우마사케 야스유키(제자)와 합류하여 하카타항에 도착했다.

미치자네 공은 어부가 그물로 만든 방석에 앉아 휴식을 취했다. 


14. 작년 이맘때 즈음(902년) 58세

9월 10일 밤 미치자네 공은 천황으로부터 하사 받은 옷을 꺼내어 천황을 모셨던 시절을 그리워하며 시를 읊었다. 


15. 덴파이산에서 기도(902년) 58세

미치자네 공은 원망 한마디 하지 않고 근신생활을 보냈다.

어느 날 덴파이산에 올라 나라와 천황의 평안을 한마음으로 기도했다.

그 기도가 하늘에 닿아 마침내 미치자네 공은 신의 경지에 이르렀다. 


16. 안라쿠지 절(903년) 59세

미치자네 공이 죽은 후 우마사케 야스유키는 시신을 태운 수레를 끄는 소가 엎드려 움직이지 않게 된 곳에 미치자네공을 묻었다. 그곳이 지금의 '다자이후 텐만구'의 본전이 세워진 장소이다. 


'다자이후 텐만구'는 일본인들은 물론 한국인, 중국인 등 외국인들이 많이 찾는 곳이다.

이러한 현재의 유명세는 한 시절에 바로 만들어진 것은 아니다. 

학문의 신으로 추앙되는 '미치자네'는 9세기의 인물이다. 우리나라의 최치원과 비슷한 인물. 

'다자이후 텐만구'라는 공간이 조성되고 이야기가 만들어지고 시대를 넘어 전해진다. 

공간과 이야기가 천년을 흐르며, '다자이후 텐만구'의 명성이 축적되었다. 축적의 힘! 

우리의 역사 인물들에게도 공간을 허락하고 이야기의 옷을 입히자. 

그렇게 만들면 사람이 찾고 그것이 길이 되며 역사가 된다. 


남편은 '다자이후 텐만구' 관람 후 "나이 60이 다 된 사람이 산에 올라 기도 몇 번 했다고 '신'이 될 정도면 지구상에 예수가 한명 뿐이 아니었을 것"이라며 또 투털덴다. 아...정말 왜 이러나 싶다.


세계가 과거를 기억하는 방법에 대하여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과 일본 유산을 하루에 다녀온 날이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일본 유산을 지정하는 방식으로 세계는 과거를 기억하고 있었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은 하회마을, 서원 등 우리나라에도 잘 알려진 유산 지정 방식이다. 

일본 유산은 일본 문화청이 지역의 역사적 매력이나 특색을 통해 일본 문화와 전통의 이야기를 '일본 유산'이라는 이름으로 기억하는 방법이다. 

아울러 일본 유산은 지역의 활성화와도 관계가 있다. 

지역이 주체가 되어 매력 넘치는 유형, 무형 문화재들을 정비하고 활용하여 국내뿐만 아니라 해외에도 전략적으로 홍보하려는 것이다. 

우리의 문화재도 국보, 보물, 사적의 이름으로 문화재청 주도로 지정되고 있는데 지역의 매력을 많은 이들에게 알릴 수 있는 좋은 매개가 될 수 있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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