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치온더비치, 밤치기, 하트
고백은 이미 마음에 있었던 사실을 솔직하게 말하는 일이다. 그리고 성공적인 사랑의 고백이 되려면, 이를 받는 사람도 그 사실을 미리 알고 있어야 한다. 상대방이 준비되지 않았을 때 하는 고백을 공격이라고 표현하듯, 예기치 못한 사실을 접하게 되면 당혹스러움과 부정적인 반응으로 이어지곤 한다. 이는 상대가 좋아해서는 안 될 사람일 때 그 반응이 극대화된다. 단순히 자신의 사랑만을 고백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과 하는 사랑을 넘어서 나를 사랑해달라는 고백으로 받아들이며 그 의미가 더욱더 강하게 전달된다. 더욱 흥미로운 그런 상황들은, 대신 영화 속에서 체험되며 즐거움을 만든다.
남녀는 둘만의 장소에서 술잔을 기울인다. 대화는 주로 가영이 묻고, 남자가 답하거나 가영이 자신의 이야기를 하고, 남자가 이에 대해 반응하는 식으로 이뤄진다. 가영은 이내 성적인 소재를 꺼내 남자를 당황스럽게 만들지만, 상황을 이용해 남자가 그에 대한 답변을 피하지 못하게 만든다.
<비치온더비치>에서 가영은 헤어진 남자친구의 집에 찾아온다. ‘받지마’라고 저장된 여자의 전화를 남자는 꾸준히 무시하지만, 그녀는 이를 무시하고 집 안으로 들이닥친다. 남자는 투덜대면서도 익숙하게 그녀를 들여보낸다. 그녀는 남자의 새로운 여자친구를 질투하다가도, 자신이 좋아하는 사람과 자신이 자는 사람에 대해 이야기한다. 함께 했던 사랑 이야기는 절절한 고백보다는 성적이거나 감정적인 상황만을 되짚어주며 진행된다. 잠깐 있겠다던 그녀는 이윽고 그와 함께 맥주 캔을 딴다.
<밤치기>에서는 영화감독 지망생 가영이 소재 취재를 위해 아는 오빠를 만난다. 그러나 그에게 던지는 첫 질문은 하루에 자위 두 번 한 적 있는지이다. 취재를 핑계로 첫 번째 질문에 대해 답을 얻은 그녀는, 이어서 세 번은 한 적 있는지, 무슨 생각을 하며 하는지를 지나, 현재 여자친구와의 사랑은 어떤지, 첫경험은 어땠는지로 이어진다. 중간중간 진심으로 누군가를 좋아했던 경험이나 좋아하는 영화가 무엇인지 같은 평범한 질문을 섞으며, 남자 또한 섞여 있는 질문들에도 빠져들며, 장소를 옮기며 다른 자리로 이어진다.
<하트>에서는 보다 노골적으로 변한다. 가영은 유부남을 좋아하게 된 것이 너무 고민이라고 유부남 미술 작가에게 말한다. 장소는 그의 작업실이고, 맥주는 이번에도 빠질 수 없다. 성에 대해 논하면서 대화는 깊어지고, 어두운 방에서 두 사람의 분위기는 무르익는다. 더 진한 대화는 자연스레 더 깊은 속마음으로 향한다. 그리고 상대도 이에 참여하게 되었을 때, 가영은 그들에게 같이 자자고 한다.
비슷하게 흘러가는 이야기는 두 번째 작품쯤 되면 이야기 전개가 예상되고, 세 번째 작품쯤 되면 다음 장면도 맞출 수 있을 것 같다. 그럼에도 인물의 가장 솔직한 대화는 매 장면이 각자의 마음에 대한 고백처럼 전달되어 즐겁다. 애인이 있는 사람을 좋아하는 것은 낯선 이야기는 아니지만, 이를 너무나도 당당하게 말해서 오히려 흥미롭게 지켜보게 된다. 술자리를 가지고 있는 남녀의 옆에서 몰래 관찰하는 것 같이, 영화의 대사는 사실성에 집중하여 분위기를 살린다. ‘아니’나 ‘그냥’ 같은 일상 언어들이 대화에 자연스럽게 붙고, 토라졌거나 들뜬 정도도 과장되어 표현되지 않고 그 안에서 오간다.
<비치온더비치>의 가영이 홍상수 영화가 100만 관객이 되는 방법을 이야기하듯, 영화 속 가영의 모습과 영화의 모습도 홍상수 영화를 닮았다. 하지만 원하는 것이 이뤄지지 않는 상황에서 남자가 보여줄 수 있는 찌질한 모습들을 홍상수 감독의 영화에서 다룬다면, 원하는 것을 이루기 위해 집착하는 상황에서 여자가 보여줄 수 있는 찌질한 모습을 정가영 감독의 영화에서 그린다. 그 방식 또한 마냥 부끄러워지는 주사를 부리는 것이 아니라, 여우짓이라고 일컬어지는 은근한 방식으로 이뤄져 주인공의 마음에 빠지게 만든다.
그리고 그 안에서 추억을 건드리는 지점을 남겨 더 강한 감정을 남긴다. <비치온더비치>의 남자, 정훈은 가영과 헤어져 새로운 여자친구와 연애하고 있지만, 그의 핸드폰 속에는 여전히 가영의 모습이 담긴 영상이 있다. 가영이 잠시 떠난 뒤, 조금은 비어 있는 마음으로 그는 그 영상을 연다. 부끄러워하면서도 그대 안의 블루를 열창하는 그녀의 모습과 이를 보고 웃는 정훈의 모습은 이미 지난 사랑에 대해 가지는 두 남녀의 모호한 마음을 조금 전 술자리에서의 대화보다 더욱 진실하게 전달한다.
가영의 사랑은 대체적으로 성공을 거두며 마무리된다. <비치온더비치>에서는 조금 어렵게, <하트>에서는 조금 쉽게 상대와 잔다. <밤치기>에서는 비록 상대와 자지는 못했지만, 애교 속에 전화를 걸어 상대가 늦은 밤중에 그녀를 위해 마중 나오게 만든다. 장면과 고백의 시작에는 육체적인 사랑을 원하는 듯했지만, 결국 그녀가 원했던 것, 혹은 그녀가 실제로 얻어낸 것은 정신적인 사랑이다. 가영이 아예 사라져버린 <비치온더비치>에서는 가장 완전히 상대의 마음을 얻은 상태이고, 둘이 함께 있는 모습으로 마무리되는 <밤치기>에서는 아직 상대의 정신적인 사랑을 얻으려는 상황이다. 상대의 마음을 온전히 얻으면 다시 도망칠 수도 있겠지만 그 모든 과정에서 고백을 통해 위로를 얻으며 외로움으로부터 잠시 벗어나려는 것처럼 느껴졌다.
현실을 최대한 모방해오던 영화는 그 끝에서는 영화와 자신을 분리하며 마무리된다. <밤치기>에서는 앞선 이야기를 대본으로 작성하던 작가의 모습으로, <하트>에서는 앞선 이야기의 영화화를 위해 배우와 미팅을 진행하는 감독의 모습으로 넘어간다. 감독의 단편인 <극장에서 한 생각>에서 친히 관객을 총으로 죽여버리듯, 조금 전까지 본인이 직접 화면에 들어가 이야기하고 현장감 있는 대화를 하던 것을 멈추고 장면에서 카메라가 자리를 뜬다. 이를 통해 즐거웠지만 불편했던 고백들을 영화로 남겨두며 앞에 모든 것을 유희거리로 남긴다. 그렇게 관객과 함께 영화의 이야기로부터 떠나면, 현실에서 다른 사람에게 전하는 고백과 술자리에서 진행되는 그 뒷 이야기들 속에, 영화 속의 더욱 솔직한 대화와 재미가 다시 기다려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