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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시청년 Nov 12. 2023

부인, 가장 소중한 존재죠. 그러나 재산 상속은 글쎄요

중년여성이 독립을 선언하는 진짜 이유, 남편이 부인에게 상속 꺼리는 이유

사랑한다는 의미에는 모든 것을 포용하거나, 혹은 포용할 의향이 있는 것처럼 우리의 인식을 유도한다. 그러나 절대로 그렇지 않음을 서서히 깨닫게 된다. 살면서 조금씩 누적되다 어느 시점에 터진다. 마치 풍선에 공기 주입이 계속되면 어느순간 ' 펑!'하고 터지듯이.


현실에서 사랑한다는 것은 타인보다 조금 더 특별한 애정이 있다는 다. 맛있는 것이 있으면 나눠 먹고 싶고, 보고 싶은 영화가 있으면 같이 보고 싶은 관계다. 연인에서 부부로 연을 맺으면 더 발전된 관계로서 일상의 대부분을 공유한다. 화장실을 같이 쓰고, 침대를 같이 쓰고, 집안 대소사에 협력한다. 친밀한 이웃과 확연히 구분되는 사이가 된다. 모든 것을 함께 포용하는 동등한 사이처럼 다. 그래서 부부는 서로를 반쪽이라고 부른다. 반쪽과 반쪽이 하나를 만드는거라 믿으며 살아간다.


그러나 그것은 주입된 인식의 외부 해석이다. 결코 동등하지 않은 내부 현실들이 삶 속에서 튀어나온다. 갈등이 발생하고 골은 깊어진다. 타협점을 찾지 못하면 깨지는 수순을 밟기도 한다. 평등을 찾아 정리하는 중년이 많아지고 있다. 특히 50대 이상의 여성이 많다.


저녁시간이면 가족은 한 지붕 아래에 모인다.

“아들, 오늘 하루는 어땠어?”

“응, 바빴어. 아빠가 내 이름으로 삼*주식 미리 상속해 준다고 해서 서류 준비하고 업무 처리하느라 은행과 증권사 방문했어. 상속을 미리 해야 세금 폭탄을 피할 수 있다고 하더라고.”


멈칫했다. 아들에게 어떻게 대꾸해야 하나 적당한 것을 찾지 못했다.

‘어 그랬구나’

이건 가식이다. 솔직한 감정을 숨긴 맨트다.


‘뭐라고? 엄마랑 상의도 없이?’

이건 조심스럽다. 아들에게 주는 것을 아까워하는 엄마처럼 비칠까 봐


차오르는 화남, 억울함, 계속되는 독단 등 복잡한 억눌림 범벅이 순식간에 목구멍을 채운다.

아무 말도 못 하고 자리를 피했다. 그 방법밖에는 없었다.




집, 이사하면서 공동명의를 제안했었다. 공동명의가 이렇게 남편 설득이 어려운지 몰랐다. 당연히 수락할 줄 알았다. 자식 둘을 낳아 키우면서 20년을 넘게 산 부부니, 고민거리도 아닌 줄 알았다. 공동명의로 올리면 세금 감면도 있어서 유리했다. 그러나 실패했다. 그때 알았다. 나는 조연이었다. 이 집의 조연으로 사는 것이 내 역할이라는 것을. ‘부부’라는 말은 한쪽의 입장에서는 동등이 아니라 종속의 관계라는 것을. 적어도 내 상황은 그랬다.




집 등기 사건 이후로 급속도로 마음가짐이 재정비되었다. 정신이 번쩍 들었다고 하는 것이 더 맞는 말이다. 조연의 삶을 정리하기 위해 주체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의견을 묻는 일이 줄었고, 내 삶을 공유하는 내용도 줄었고, 무엇보다 나 자신을 더 가까이서 보게 되었다.


외적 인식의 틀을 벗어나는 일들이 많아졌다. ‘도리’라는 명분으로 시댁 대소사를 꾸준히 지켜오던 것도 조금씩 내려놓았다. 시어머님께 며느리 손맛 음식을 드려야 한다는 생각도 내려놓았다. 그 대신 드시고 싶은 음식이 있으면 언제든지 배달해 드린다로 대체했다.


내 인생이 누군가의 조력자로 살다 끝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은 변화에 가속도가 붙었다. 주체적으로 변화했다. 부부의 반쪽은 이렇게 표현했다. “당신 변했어.” 자신의 입장에서 불편하거나 부정적 측면의 해석이다. 나로서는 엄청난 긍정의 변화인데 말이다.


상속, 자식에게는 당연하고 부인에게는 왜 고민해야 하는 사안일까?

심지어 명의 이전도 꺼린다. 대신 핑계를 댄다. 이혼하게 되면 반반이라고. 이 핑계가
더 화근임을 모른다.
‘이혼해야 반이 내 것이 되는구나. 이혼해야 법률적 반을 실감할 수 있는 거구나’


새집에서 1년 차 내 생일에 선물처럼 집 등기 공동명의 서류를 받았다. 50% 공동명의가 아니고 1/3이었다. 그다지 기쁘지 않았다. 이미 반쪽의 마음을 읽어버린 후였다. 우리 속담이 있다. ‘소 잃고 외양간 고친다.’


손범수, 진양혜 30년 차 부부의 갈등 스토리가 화제다. 화성에서 온 남자와 금성에서 온 여자의 이야기다. 같은 언어를 사용하는데 소통은 외계어 수준이다. 남편은 부인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몰라 답답해한다. 대화 맥락을 짚지 못한다. 부인의 관점에서 무엇이 그녀를 힘들게 하는지 진지하게 고민하지도 않는다. 자신이 누렸던 삶의 방식에서 찾아낸 방법으로 노력하거나 눈치를 본다. 헛발질이다.


지금의 중년 여성은 남편 내조와 자식 양육을 우선시하는 삶이 대부분이었다. 직업이 있고 없고 별반 다르지 않다. 자식들이 성인이 되어 독립하니 몰입했던 마음 창고에 여유가 생긴다.


그제야 보이는 내 자신의 삶. 내 이름에 부여된 흐릿한 존재가 보이기 시작한다. 재산에 대한 상속을 주저하는 남편의 행동으로 내 현실이 선명해진다. 더욱 슬픈 거는 사회도 가족들도 한 단어로 퉁쳐서 해석하려 애쓴다. ‘갱년기!’ 마치 독감처럼 찾아온 질병 취급한다. 시간 지나면 나아지려니 기다린다. 모든 사건은 느닷없이 발생하지 않음을 모르는걸까, 모른척  하는 것일까?




중년의 남편이 두려운 것은 힘을 잃어가는 주인공의 삶이다. 사회에서는 어쩔 수 없이 2선으로 물러났지만, 가정에서는 물러서고 싶지 않은 마음이 재산 움켜쥠으로 나타난다.


 부인이 두려운 것은 인정받지 못하고 끝나는 조연의 삶이다. 계속 조연을 강요하면 독립을 선택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사람을 바꿀 수 없으니 내 의지로 내 환경을 바꾸는 선택을 한다. ‘당신 변했어’가 두렵지 않다. 변해야만 내 존재의 가치를 온전히 인정해 줄 수 있기 때문이다.


인생의 반쪽을 내려 좋고 완전한 하나를 선택하는 여성이 늘고 있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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