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의 사회 진출이 많아지고 일잘녀들이 사회에서 인정받아 승진 가속도가 붙는 사례도 많아지고 있다. 여성의 사회적 고위 관료 비중은 현저히 남성에 비해 저조하지만 조금씩 개선되어 가고 있다고 본다. 열심히 자기 분야를 개척하고 노력해서 사회에서 인정받는 것은 개인에게도 영광이고 가족이나 지인에게도 기쁜 소식이 아닐 수 없다. 함께 축하를 건네고 받으며 축배를 나눈다. 특히 가족들의 축하는 마음껏 자랑하고 인정을 나누는 가장 편한 구성원 집단이다. 그래서 한 지붕 아래서 함께 산다.
축하와 함께 동반되는 숨겨진 감정이 있다. 바늘과 실처럼 함께 다니는 감정 패키지다. ‘질투’와 ‘부러움’이다. 티가 나는 강도와 빈도 그리고 타이밍의 문제지 누구나 갖는 감정이다. 사회의 동료나 지인의 축하, 가족의 축하 모두에게서 이 패키지는 유효하다.
우리가 사회의 축하에서는 겸손하려고 노력한다. 과한 우쭐함을 경계하는 시선이 많음을 의식하기 때문이다. 경쟁구도 안에서 생활하는 사람들이기에 조심스럽다.
상대적으로 가정은 경계의 시선에서 자유롭다고 느낀다. 그래서 넘치는 축하도 우쭐도 미담으로 가볍게 넘길 수 있는 곳이다.
하지만 가족 안에서축하받는 것이 유독 불편한 사람이 있는 경우도 있다. 바로 남편의 축하다. 남편의 승진은 모든 가족이 행복한 일이다. 그러나 부인의 승진은 조금 다르다. 남편보다 더 빠른 고속 승진이 마냥 즐거운일만은 아닌 것이다. 남편보다 높은 부인의 연봉도 불편한 진실이다. 말은 못하지만 어딘가 불편하다. 찌질이로 볼까 봐 더 솔직할 수 없다. 남편의 마음은 그렇다.
그것을 아는 부인도 불편함은 매 한 가지다. 이유가 다를 뿐.
아는 사회 후배가 어느 날 부부동반으로 만나는 자리에서 내게 슬쩍 부탁을 했다.
“언니, 저 승진한 거 너무 과장해서 칭찬하지 말아 주세요.” 왜?라고 묻지 않았다. 이런 부탁하면서 그녀가 느낄 부끄러운 마음도 이해가 되고, 그녀가 원하는 상황도 감이 왔기 때문이다. 그러던 몇 해 후 문자가 왔다. “언니, 남편이 승진을 했어요. 오늘 분위기 좀 확 띄워주세요.”
남편은 가정에서 경제적 우위를 선점하고 싶어 한다. 그것이 권위이고 남자로서 위상이라 여긴다. 특히 우리 문화는 가부장적 문화가 깊게 뿌리내려있다. 많이 개선되어 가는 시대에 살고 있다 하더라도 그 흔적은 아직도 짙다. 몇 세기를 이어온 긴 문화가 쉽게 희석될 리 없다. 말은 수평적 관계의 부부관을 지향하면서 실제 행동으로 보이는 모습은 다르다. 아마 자신도 축하 인사 이면에 스미는 씁쓸한 감정에 놀랄 수도 있다. 이성적으로는 티끌 없는 축하가 맞지만 뭔가 무겁게 고개 내미는 무거운 감정에 내적 갈등을 경험한다. 남편에겐 단어 하나로 표현 할 수 없는 답답한 감정이 있다.
결혼 전 남편에게 들었던 말이다. 그의 아버지의 생각을 이렇게 전했다. ‘부인감은 한 단계 낮은 사람을 선택해야 집안이 편안하다’. 사실 자존감에 대한 공격이었고 무례함을 느끼기도 했지만, 합리적인 이유를 찾아 나를 위로했다. 가부장적인 아버지 시대의 사고라고. 구시대 사람의 뿌리 깊은 고정관념을 따져 물어 긁어 부스럼을 만들고 싶지도 않았다. 바뀌지 않는다는 사실 또한 알 정도의 지혜는 있었다. 사랑의 감정이 이성적 논리를 삼켜버리는 시기이기도 했다. 가부장적 사회관에서 부인의 승승장구는 남편이 마음대로 할 수 없다는 지표처럼 인식되었다. 뻑뻑한 자동차 운전대로 차를 운행하는 불편함처럼 말이다. 그것도 수십 년 장기 운전을.
사회에서 나의 성장이 남편에게 그다지 마냥 기쁜 일은 아니라는 신호를 감지하기 시작했다. 아이들이 어릴 때는 남편의 수입을 초과하는 인컴은 만들지 못했다. 독박육아와 일을 병행하는 것은 여러모로 쉬운 일이 아니었다. 기본적으로 일할 시간이 충분치 않았고 체력적으로도 많이 힘들었다. 아이들이 초등 고학년이 되면서 본격적으로 일에 투자하는 비중을 높였다. 3.3% 근로자에서 시작해 종합소득세가 커지고, 지금은 여러 명의 4대 보험료를 납부하는 법인으로 확장됐다.
대중 앞에서 스피치도 하면서 점점 내 영역은 한 뼘, 두 뼘 성장해 갔다. 누구나 그렇듯 기쁨을 나누고 싶었다. 더 좋은 선택을 위한 지혜도 필요했다. 찐 내편이 필요했다. 그런데 남편과 대화는 길어지지 못했다. 매번 단답형 피드백으로 끝났기 때문이다. ‘잘했네’, ‘이쁘네’, ‘좋네’..... 가끔은 입꼬리 아래로 향한 채 고개만 두어 번 끄덕이는 정도로 끝나기도 했다. 점점 내 말수는 줄어갔다. 내편이 아닌 느낌은 늘어갔다.
부부의 경제활동은 요즘 시대에는 대부분 선택이 아닌 필수다. 외벌이로 가정을 꾸리는 것이 힘들기도 하지만 여성도 자신의 역량을 키우려는 자아실현 욕구도 커졌기 때문이다. ‘딩크족’이라는 새로운 부류로 분리하는 신조어가 만들어지기도 했다. 아이 없이 둘이 벌어서 더 경제적으로 자유로운 삶을 추구하는 사람들을 일컫는 말이다. 과연 딩크족이라 칭하는 젊은 부부 사이에서는 어떨까? 나보다 빠른 부인의 빠른 승진이 그저 기쁜 일이기만 할까?
‘나의 아저씨’ 드라마에서 이선균의 아내는 변호사다. 어머니는 평범한 회사원인 아들이 기를 못 피고 산다며 불평을 한다. 사회에서 계급적 위상을 갖고 있는 며느리가 불편한 거다. 잘난 며느리가 집안에 융화되지 못한다는 고정관념으로 해석한다. 아들이 집에서 대접받지 못한다 생각하고 안쓰럽게 바라보며 밥을 챙긴다. 아들이 변호사면 어땠을까? 며느리가 평범한 근로자로 남편보다 수입은 반드시 적다면? 어떤 맨트로 바뀌었을까? ‘몇 푼이나 번다고 시댁에 뜸해!’, ‘남편 챙겨야지!’, ‘너 시집 잘 온 줄 알아!’ 이러면서 더 당당한 분위기였을까? 어쩐지 그랬을 것 같은 느낌이 진하다.
남성이나 여성이나 자신의 전문분야에서 커리어를 쌓아 가는 성장하는 사람을 선호한다. 그러나 남편으로서 부인의 성장은 제한을 둔다. 자기 어깨까지만 성장하기를 바란다. 더 넘어서는 성장은 자신을 작아져 보이게 한다고 믿는 것이다. 외부에 보이는 시선이 자신을 무능력하게 볼까 봐 불편해한다.
어불성설이지 않은가. 내 어깨높이까지만 성장했으면 하는 바람은 과실 나뭇가지에 무거운 돌을 매다는 것과 같다. 높이 성장하면 수확이 힘드니 돌을 매달아 위로 성장을 제한하는 방법이다.
부인의 성장에 돌을 매달기보다는 사다리를 준비하는 게 어떨까? 높은 곳에 열린 과실을 함께 잘 딸 수 있도록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