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을 나설 때마다 고양이를 마주친다. 밤이 될수록 각각의 공간에서 무리를 지은 고양이 몇몇을 만나곤 한다. 그들의 얼굴은 꽤나 귀염성 있다. 몸집도 살집도 귀엽다. 일단 마르지 않았고 모나지 않았다. 반면 퉁퉁한 녀석들은 우리가 얼굴을 빤히 쳐다보아도 도망가지 않고 유유히 자신의 길을 걸어간다. 몸집이 어느 정도 있는 어른 고양이는 쓰레기 처리장에서 음식을 찾아 먹으며 애교는 비교적 없는 편이고 털도 흉흉스럽기도 하다. 이렇듯 절대적으로 못난 고양이는 본 적이 없지만 조금은 못 생긴 아이들도 있긴 있다.
전자는 주변에 다른 고양이가 있으며 어쩔 땐 인간으로부터 융숭한 대접을 받는다. 후자는 주변에 고양이가 잘 없으며 인간 주변의 영역을 크게 쓰며 그런 관점에 봤을 때에 좀더 자유로운 행동 반경을 가진다. 적은 공간을 가지며 누군가의 도움을 받으며 살아가는 이는 귀엽게 생겼다. 큰 공간을 가지며 누군가의 도움을 비교적 덜 받으며 살아가는 이는 덜 귀엽게 생겼다. 이슈를 불러올 이야기이긴 하지만 빤히 그런 걸 안 그렇다고 말할 수도 없다.
못생기지 않은 개체들은 인간에 의해 간택되어 거세를 당하고, 조금 못생긴 개체들은 어디에도 속하지 않은 죄로 자신보다 조금 나은 개체를 낳는다. 그래도 고양이들의 얼굴은 같은 종인 경우 비슷비슷하다. 비견한 예로 똥개들도 얼굴들이 비슷하다. 이미 유전적으로 우월한 얼굴의 완성본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고양이도 벌써 그 마지막 단계에 서서히 도달한 것이 아닐까? 못생긴 개체들도 결국 못 생기지 않아 버리는 결말? 이미 정해진 결말에 번잡한 과정들이 있을 뿐인가.
그렇다면 인간의 생김새는 어떤가. 미적으로 귀염성이 느껴지는 얼굴들로 판이 박히게 모두 변하지는 않은 이 시대를 감상하면, 결말이 있지만 ‘아직’이라는 안도가 느껴지는가? 못생긴 개체들이 열심히 번식하여 다음 세대, 또 다른 세대를 견인하는 우주가 있고, 못생기지 않은 개체들은 번식을 중단하는 우주. 각자의 우주 시계는 돌아가고 있다. 나의 우주는 어느 쪽인가? 인간의 마지막 얼굴은 어떻게 생겼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