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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 영 Sep 15. 2022

꿈의 일기장

내 생에 최초 기억은 다름 아닌 꿈이었다. 4살, 강원도 귀내미 산골짜기에서 할머니와 컸던 난 작은 단잠에 나타났던 꿈을 지금도 잊을 수 없었다. 아빠가 내게 다가오고, 저 멀리서 엄마가 하염없이 눈물을 떨구며 나를 바라보았다. 드넓게 펼쳐진 배추밭 위로 차디찬 태백산 겨울바람이 지나갔어도 나를 보러 온 부모님이 있어 춥지 않았다. 그럼에도 어딘가 마음 한편은 외롭고 불안해서 작은 고사리 손으로 아빠 옷깃을 꼭 쥐었던 그 잔상이 난 스물여덟이 먹었음에도 잊혀지지 않았다. 


남들보다 유달리 난 꿈을 많이 꾸는 사람이었고, 특히 아침에 일어나면 그때의 감정과 기억이 생생해 가슴 벅찬 일도 많았다. 99% 감성만으로 만들어진 나란 인간한테 밤마다 일어나는 꿈들은 괴로울 뿐이었다. 실제가 아닌 걸 알면서도 코 끝이 시큰해져 눈물을 흘렸고, 재수가 없는 꿈을 꿀 때면 하루 종일 무슨 사단이 날까 싶어 몸을 사렸다. 반대로 운수가 좋은 꿈을 꾸면 복권을 꼭 샀어도 실제로 당첨되는 일은 드물어 쓰레기가 된 복권 용지를 씁쓸하게 버린다. 현실도 벅찰 때가 많은데, 잠이라도 편하게 잘 수 없다니. 뭔가 불공평했다. 


오늘도 선명한 꿈을 꾸었다. 전 직장 동료가 나왔고, 새까만 흑발에 멋진 복장으로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나는 아는 척하고 싶었지만, 꿈속에서의 내가 너무 초라해 보여서 차마 가까이 다가갈 수가 없었다. 주변 사람들이 나를 비웃을 거 같았고 덩달아 그분께 실례가 될 거 같아 나는 벽 속에 숨죽여 앉아 가슴을 쓸었다. 그리고 전체가 어두워지더니 모든 게 사라졌고, 눈이 떠졌다. 손이 엉덩이에 깔린 채로 저릿저릿해 한참을 주물렀다. 그제야 꿈인 게 실감이 나 허리를 펴고 느린 아침을 맞았다. 다행이었다, 모든 게 꿈이라.


나같이 지독한 몽상가들은 꿈에 쉽게 동요됐고 또 망각과 환상을 현실에 비출 때가 많았다. 그래서 가끔 내가 마주했던 꿈의 조각들을 가두기 위해 일기를 쓸 때가 종종 있었다. 하루의 있었던 현실을 쓰는 게 아닌, 그날 꿨던 꿈을 기록하는 꿈의 일기. 한동안 쓰지 않다가 오늘 불현듯 생각 나 메모장을 뒤졌다. 가장 처음 썼던 기록을 보니 2011년이었다. 하나같이 범상치 않았고 우스웠던 내용도 많았지만, 적어 놓은 것을 보니 나의 상상과 환상의 동력체가 '꿈'인 것 같아 기분이 묘해졌다. 


아래는 일부 나의 꿈 일기장에 관한 내용이다. 



2011.01.013

친구가 누군가를 소개해 준다고 했다. 만나는 장소에 나가보니 나타난 건 사람이 아니라 큰 곰이었다. 곰은 내가 마음에 들었는지 시내에 있는 CNA에 들어가 나에게 맞는 안경을 사주었다. 나는 무서워서 안경을 받고 부리나케 집으로 갔다. 그런데 실수로 안경을 잃어버렸고, 그걸 알게 된 곰이 나를 죽이려 쫓아오고 있다는 걸 들었다. 나는 지하주차장으로 급하게 달려갔고, 뒤쫓아 오는 곰을 피하기 위해 빨간 차에 탄 아저씨들에게 도움을 청했다. 아저씨들은 나를 차에 태워주셨고 차가 생생 달리자 뒤에서 곰이 날 쫓아오며 주변 차들을 부수고 다녔다. 그때, 신호등 때문에 차가 멈추면서 결국 난 곰한테 잡히고 말았다. 곰이 매우 무서운 얼굴로 나한테 묻길, "내가 사준 안경을 버린 이유가 뭐냐?"라고 하자 나는 벌벌 떨며 버린 게 아니라 잃어버린 거라고 말했다. 그러자 곰은 울었다. _END


2015. 06. 23

눈이 오는 학교에서 내 졸업식이 열렸다. 처음 보는 낯선 남자가 나에게 꽃을 주고, 또 다른 사람들이 나에게 계속해서 꽃 한 송이 씩을 주었다. 분홍색 국화꽃을 난 오른쪽 주머니에 넣고, 나머지 꽃들을 안고 길을 걸었다. 받은 꽃들이 너무 많아 길을 걸으면서 몇 송이씩 떨어졌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난 눈이 오는 날씨를 뚫으면서 길을 걷는 내내 끝까지 꽃을 안고 걸었다. _END


2017. 06. 16

집에서 나와 산을 보니 묘하게 아름다운 사슴 한 마리가 보였다. 그런데 남학생들이 주먹만 한 돌을 갖고 그 사슴을 맞추기 시작했고, 나는 그 아이들을 말렸지만 소용없었다. 사슴은 도망쳤지만 아이들은 끝까지 돌을 던지면서 서로를 맞추다 죽는 아이들이 생겨났고, 나는 한 아이에게 너도 돌로 맞으면 좋을까 하며 울먹거렸다. 모두에게 그만하라고 강력하게 소리치자 그제야 아이들은 멈췄고 나는 죽어 있는 아이들을 바라봤다. 처참했다. _END




대부분 기록한 꿈들은 좋은 꿈보다는 악몽이 많았다. 현실에서는 일어나지 않을 일들이 수면 속에서 멋대로 활개 치는 게 언짢았지만 한 편의 영화를 감상하는 기분이었다. 그래서 나는 나쁜 꿈일지라도 하나하나 기록하고 싶었다. 다양한 장르가 나를 중심으로 펼쳐진다는 건 꿈이 아니고서야 경험해 볼 수 없는 일이니깐.

적어 놓은 것들을 살펴보니 나름 재미가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더 이상 환상 속에서 헤엄치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기록하는 것은 일여 년 전에 그만두었다. 현실이 아닌 것에 집착하고 감정을 낭비하는 건 바보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꿈은 허언이고 사막의 오아시스 같은 것이었다. 내 머릿속에 품었던 기억과 감정이 멋대로 조작되어 스토링텔링 된 그것을 현실에서도 진짜 인 것처럼 느끼는 나의 순진함이 싫어졌다. 


이렇게 조잡한 것에도 골똘히 깊게 생각하는 나는 골치 아픈 몽상가이다. 그중에서 내 '꿈의 일기'는 그런 몽상가의 타이틀에 맞는 이상한 기록서 같다. 밤과 어둠이 주는 기묘한 판타지가 더 이상 내 감정을 울리지 않기를 바라면서도, 반대로 한 번쯤은 현실이 내가 이룰 수 없는 꿈같아지기를 바란다. 꿈 일기가 아닌 그냥 일기를 쓸 수 있도록. 진부한 일상에서 벗어나 동화 같은 하루가 펼쳐지도록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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