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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남대로는 가로인가 세로인가?

길치의 세계관

by 둥근네모

제목에 대한 대답으로 길치인지 아닌지를 구분할 수 있다. (이쪽 지리를 잘 모른다면 평소 잘 아는 지역의 큰길로 대체 가능하다.)


나는 강남역 부근을 자주 가는데, 강남구와 서초구를 구분 짓는 강남대로를 무의식 중에 항상 수평으로 생각하고 살아왔다. 그런데 어느 날 남편과 대화를 하는 와중 손짓을 하다가 남편이 "강남대로를 왜 자꾸 가로로 그리냐"고 해서 처음 알게 되었다. 지도를 정북 방향으로 놓고 봤을 때 강남대로가 실은 살짝 기울어진 세로형이라는 것을. 충격이었다. 남편이 그 외에도 우리가 자주 가는 지명을 몇 개 불렀고 지도에서 그걸 확인할 때마다 번번이 내 인식과 실제가 많이 다르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더불어 길치가 아닌 사람들이 세상을 어떻게 인식하는지에 대해서도.


나로 말할 것 같으면 사는 동네에서도 가끔 안 가던 길로 가면 길을 잃는 길치다. 그런 내게 세상은 항상 의뭉스러운 곳이었는데, 예를 들면 이렇다. 엄청 자주 가서 길을 빠삭하게 알고 있는 지역이 두 곳 있다고 하자. 나는 A지역도 잘 알고 B지역도 잘 알지만 그 둘이 서로 어떻게 연결되는지는 모른다. 말하자면 둘 다 같은 구라면 그 안에서 A가 어디쯤 있고 B가 어디쯤 있는지에 대한 그림이 없는 것이다.


그래서 이런 상황을 심심찮게 맞닥뜨리기도 한다. 지하철로 자주 가던 친구네를 어느 날 차를 끌고 가는데 가는 길에 뜬금없이(?) 최근에 이사한 친정집이 보이는 것이다. 여기가 거기였어...? 하고 보면 여기가 거기였다. 분명 친구네도 자주 가고 친정집도 자주 갔는데 항상 네비를 찍고 가라는 대로만 가니 실제 위치가 어디쯤인지는 모르고 가는 길만 알았던 것이다. 강남대로가 가로라고 생각했던 것도 같은 맥락이다. 지하철 출구로 올라와서 지도를 이리저리 돌려가며 길만 찾았지 이 길이 어디에 어떻게 놓여있는지 넓은 관점에서 생각해 본 적이 없는 것이다.


그런 깨달음이 있은 뒤에 또 강남역에서 친구 둘을 만났는데, 한 명은 길치고 한 명은 길잘알이었다. 그 둘에게 강남대로가 가로인지 세로인지 물었더니 아니나 다를까 길치는 가로라고 하고 길잘알은 세로라고 했다. 그들과 대화를 하며 길치인 사람은 세상을 내비게이션처럼 '길'만 지엽적으로 보고, 길치가 아닌 사람은 방향과 위치까지 자연스럽게 파악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러니까 우리나라에서 강원도가 오른쪽(동쪽)에 있고 부산이 아래쪽(남쪽)에 있는 것을 알듯이 길치가 아닌 자들은 근처 동네를 가더라도 그곳이 출발지를 기준으로 동쪽인지 서쪽인지 같은 '방향'과 '위치'를 인지하고 있는 것이다. 그냥 내가 길치구나 하고만 살았지 왜 길치인지는 몰랐는데 처음으로 이유를 알게 되었다. 마치 알을 깨고 새로운 세상에 나온 듯한 깨달음이었다.


내가 이렇게 길치인 것에 대해 변명을 좀 얹자면 기술의 발달을 핑계 대고 싶다. 요즘 지도 어플은 내가 보는 방향대로 지도를 돌려주는 기능이 있어 그대로 따르기만 하면 웬만한 길치도 다 길을 다 찾을 수 있다. 나 역시 하도 길을 잃다 보니 나에 대한 믿음이 없어서 길을 찾을 때는 최대한 내 생각이나 주관을 배제하고 내비게이션이나 지도의 지시만 따르려고 하는 편이다. 그러다 보니 가뜩이나 없던 방향감각이 더 퇴화된 것 같기도 하다.


평소 길치인 사람이라면 자주 가던 지역들을 지도상에서 아주 작게 축소해서 위치를 한 번 확인해 보는 것을 추천한다. 내가 무의식 중에 생각하고 있었던 위치나 방향과 완전히 다를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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