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할머니가 돌아가신 지 올해로 3년이 지났다. 회사에서 근무 중 엄마의 전화를 받았었는데, 전화 건너편 목소리에 울음이 가득 섞인 채로 내 이름을 불렀을 때 불현듯 드는 내 직감이 맞아떨어졌다. 나이가 들면 죽음을 맞이하는 게 당연한 자연의 섭리라지만 나에게 있어 무척이나 가까웠던 할머니의 죽음은 쉽사리 받아 드려 지지가 않았다.
장위동 어느 단독주택
태어나서 초등학교 입학 전까지 우리 집은 할머니 댁 2층에서 살았었는데, 1층에는 큰아버지네 식구와 할머니, 할아버지 그리고 2층에는 우리 식구가 함께 살아 꽤나 큰 대가족이었다. 어릴 적 바빴던 부모님의 부재는 늘 할머니가 채워주셨는데, 유치원 시절 뜨문뜨문 기억이 나는 대부분의 날들은 할머니의 기억들로만 가득 차 있다. 이런 나에게 할머니의 죽음은 아직도 생각할수록 눈시울이 뜨거워진다.
큰 아버지한테는 두 형제가 있는데 그중 둘째 오빠와 나이 때가 비슷해 어린 시절에는 친오빠가 있었던 거와 다름없다. 우리들의 유년시절에는 늘 할머니가 함께해서 그런지 장례식 장에서 오빠들과는 할머니가 자주 해주셨던 오므라이스와 감자튀김을 떠올리며 할머니를 기리었다.
캔 뚜껑 1000개로 쌓아 올린 추억
옛 시절 은행에서 캔 뚜껑(?) 1000개를 모아 오면 자전거를 사은품으로 받을 수 있다는 소식을 듣고 할머니가 나를 데리고 온 동네방네 데리고 다니셨었다.
둘째 오빠에게 자전거 선물을 해주시겠다며 온 동네를 돌며 캔 뚜껑을 모으고 다녔는데 결과적으로 너무 오랜 시간이 걸려 1000개를 모았을 때엔 이미 행사가 끝나고 난 직후였다. 지금 생각해보면 할머니는 무척 아쉬우셨겠지만 덕분에 나에겐 캔 뚜껑 1000개가 할머니와 단 둘이 쌓아 올린 추억이 되어주었다.
12색 사인펜, 그림을 좋아하던 할머니
아빠와 내가 항상 아쉬워했던 점이 할머니의 그림솜씨 었다. 12색 사인펜으로 날짜가 지나간 달력 뒷 장에 항상 꽃, 나비, 새 그림을 그려주셨는데 고작 12개 색밖에 없는 사인펜으로 달력을 스케치북 삼아 그리는 할머니의 그림이 나에겐 최고의 작품이었다.아... 할머니의 그림 솜씨를 반이라도 닮았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아빠의 바람대로 다음 생에선 좋은 집안에 태어나 제대로 된 미술 교육을 받으며 못다 한 할머니의 꿈을 이루길 간절히 기도해본다.
마지막 인사
할머니의 죽음을 계기로 사후세계, 영혼에 대해 믿게 되었는데 이유는 즉슨 발인이 끝나고 다음 날 꿈속에
할머니가 찾아오셨기 때문이다.
내가 태어나기도 전 남대문 시장에서 꽤 오래 장사를 하셨다고 들었는데, 꿈속 어딘가 시장터에 돌아가신
할아버지가 언뜻 보이며 할머니가 앉아 계시는 거 아닌가? 심지어 할머니의 모습이 내 어린 시절 기억 속에 건강하고 통통했던 그때의 할머니 모습으로 찾아오셨다. 꿈속에 나는 시장 사람들에게 영문도 모르고 떡을 돌리며 인사를 나누다 할머니에게 기쁘게 다가갔는데, 할머니의 허리를 꼭 안고 향기를 맡는 그 순간 눈이 딱 떠져버리고 말았다.
꿈이 어찌나 생생하던지 깨어난 직후에도 할머니의 포근했던 허리의 느낌과 향기가 계속 맴돌았다. 하지만
깨어난 직후 할머니가 정말 이 세상에 없다는게 더욱
실감이나 그때 느꼈던 공허함은 글로도 표현할 수가 없다.
사랑하는 누군가를 떠나보내는 아픔을 어떻게 표현할 수가
있겠는가. 제대로 된 인사도 없이 할머니를 보냈어야 했는데 이렇게나마 꿈에서 할머니와 마지막 인사를 나눌 수 있어 가시는 길 나에게 찾아와 준 할머니가 너무 고맙고 보고 싶다.
시간이 꽤 지났음에도 이별의 슬픔은 때를 가리지 않고 찾아온다. 낡은 기억 속에 갑작스레 떠오르는 추억들이 때론 나를 웃음 짓게 하면서도 슬픔 속으로 끌고 내려가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많은 추억을 되세이며 그리워할 수 있다는 건 또 다른 위안이다. '떠난 후 후회하지 말고 있을 때 잘해'라는 말이 할머니의 부재 후에 더욱 와닿았다.
그러니 가족들에게 최선을 다하면 살아야겠다. 최대한 많은 추억을 쌓고 먼 훗날 낡은 기억이 되어 도로 끄집어냈을 때 후회보단 웃음 지을 수 있는 기억들로 가득하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