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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쉬어가기 Jul 27. 2021

자유의 공포

자유 의지의 그림자


코로나 확진자와 접촉으로 격리를 당한 적이 있다. 침대 하나와 책상 하나, 작은 주방과 화장실이 전부인 공간에서 갇혀서 지내는 것은 정말 힘들었다. 어디 나가지 못하는 것, 자유가 제한되는 것, 누군가와 만나지 못하는 상황들은 정신 건강에 좋지 않을 수 있구나 싶다.


그러나 이런 제한된 상황이기 때문에 더 규칙적인 생활을 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기도 한다. 맨몸 운동을 하기도 하고, 평소 궁금했던 것들을 찾아보기도 하고 인생의 계획도 세운다. 아마 무한한 자유가 주어졌다면 이렇게 보내지 않았겠지. 군대 생활이 떠오른다. 훈련소는 자유가 매우 제약되는 곳이었다. 6시 반에 아침 기상을 해야 하고, 밥을 먹을 때는 줄지어서 가고, 핸드폰도 사용할 수 없고, 정해진 구역에서만 생활을 하는 것, 정해진 식단과 다양한 규칙들이 존재한다. 자유를 갈망하며 고통스러워하던 부분도 있었지만, 반면에 자유가 제약되었기에 풍요로워진 점도 있었다. 주변 사람들과 이야기도 더욱 많이 나누고, 놀잇거리도 찾아내고, 운동도 규칙적으로 하고, 객관적으로 보면 훨씬 건강한 삶이었다. 만약 더 자유가 주어져 더 편안한 삶이었다면, 원하는 대로 모든 것을 할 수 있어서 핸드폰도 주어지고 외출도 자유롭고 했던 생활이었으면, 이렇게까지 추억이 많이 쌓였을까 싶다. 실제로 훈련소를 나온 뒤에 자유 시간은 훨씬 많아졌지만 일상생활은 타성과 게으름에 짓눌려 원래대로 돌아갔다.  



자유의지


그러고 보면 자유라는 것은 평소 생각했던 것보다 더 많은 의미를 담고 있다. 현대 사회에서 자유는 절대적 가치로 칭송받고 있지만, 그 자유가 마냥 좋은 것인지 의문을 던져본다. 한 가지 방향만 주어진다면, 그 방향을 따라가는 것에만 집중하면 된다. 그러나 만약 방향이 주어지지 않는다면, 어느 방향으로 나아가야 할지 그 시작부터 매우 혼란스러운 상황이 될 것이다. 군대에서처럼 한 가지 방향만 주어진다면, 그 방향성을 잘 따라가느냐 못 따라가느냐로만 모든 것이 결정될 것이다. 많은 것들이 단순해지고 그 안에서 방향을 따라가며, 스스로에게 의문을 던지지 않고 그 세계 안에서 노력하기만 하면 된다. 그러나 모든 제약이 풀리고 방향성을 스스로 선택해야 한다면 그 선택에 따른 책임을 온전히 스스로 져야 한다. 만약 일이 잘 풀리지 않았을 경우, 자기 자신 말고는 비난할 대상이 없다. 그 책임을 온전히 감당할 수 있는가?


의식의 자율성이 왜 현대 사회에서 충분히 보장되지 않는가, 하는 물음을 던진 적이 있다. 의식은 성장해나가고, 예전에는 극소수만 부여되었던 자율성이 확대되어가고 있다. 민주 사회의 발전과 더불어 자유가 보장되는 상황에서 개개인은 스스로 선택을 내릴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이상적으로 생각하는 것만큼 자율성이 실제로 발휘되고 있는가? 자신의 판단에 오롯이 자신의 의식만 관여하는 경우는 많지 않다. 공산주의와 독재체제, 매스미디어와 집단의식 등, 많은 사람들이 타인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물론 타인의 시선을 신경 쓰는 것은 사회적인 측면에서 매우 중요한 능력이지만, 남이 보기에 어떨까 봐 그렇게 행동하는 것과, 스스로 자유롭다고 믿어버리고 행동하는 것은 다르다. 자유롭지 못하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고, 스스로 자유의지라 믿으면서 행동할수록 무의식적인 간섭에 얽매이게 된다. 왜 그렇게 되는 것일까?



자유로부터의 회피


나는 자율성에 대한 두려움과 불안감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회피하는 것이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부분일지도 모른다. 위에서, 훈련소이기 때문에 그리고 격리된 상태이기 때문에 더 풍요로울 수 있다고 표현했다 - 그렇다면, 자유가 보장되는 상황에서는 그렇게 풍요로울 수가 없는 것이다. 왜 자유가 풍요로운 삶과 직결되지 않는 것일까? 이론 상으로는 자유로운 상황에서 더 생산적인 일을 많이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왜 실제로는 삶을 다채롭게 할 수 있는 방법을 오히려 더 선택하지 못하는 것일까? 핸드폰을 하면서 시간을 때우고, 충동에 맡겨 일차원적인 생활을 하고, 왜 그렇게 보내는 것일까?


제한된 생활 속에서는 이런저런 삶의 문제들을 생각해도 되지 않으니 마음이 편하다. 방향성이 주어져있으니 그대로 따르기만 하면 된다. 삶의 무거운 책임들을 회피할 수 있다. 눈앞에 주어진 임무와 스트레스와 환경에만 집중하면 된다. 잘 안 되면 그 방향성을 제시한 시스템에 비난도 마음껏 할 수 있다. 그러나 온전히 자유가 주어지면 삶의 온 책임들을 온몸으로 지탱해야 한다. 무섭다. 그림자는 깊고 어둡다. 삶이 높은 곳을 바라보고 있을수록 그 그림자는 더욱 짙어지는 법이다. 자신의 그림자를 두 눈 똑바로 뜨고 바라볼 수 있으려면 어마어마한 용기가 필요하다. 삶의 비밀들은 심연처럼 숨겨져 있다. 탄생과 죽음, 고통과 자기희생에서 스며져 나오는 감정들은 인간 의식이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로 그 농도가 짙다. 나를 마주하면서 이성적으로 버티기는 어렵다. 압도당하게 된다 - 인간 의식은 그 정도로 작고 연약하다. 그런 자아보고 인생의 모든 책임을 짊어지라고 한다면 그건 너무나 가혹한 일이다. 차라리 책임은 무의식에게 떠넘기는 편이 속이 편하다. 그래서 자유를 한 구석으로 밀어놓은 채 스스로 비(非)자유로 얽맨다. 남이 정해주면 편하다. 단순히 다른 사람의 의견을 의식적으로 기대는 것뿐만 아니라, 인생의 방향을 무의식이 결정해주면 편하다.


내가 나의 것이라고 인식했던 많은 판단들은 사실은 나의 것이 아니다. 그런데 그 사실조차도 감당하기 어렵다. 그래서 나는 자유롭다 외치면서, 실제로는 나의 것이 아닌 것들을 나의 것마냥 외치고 다닌다. 사람들은 억압을 그렇게 두려워하고 이겨내기 위해 애쓰지만, 내 생각에 정말로 무서운 것은 자유다.


사람들은 자유를 외치는 동시에, 자유에서 멀어지기 위해 오늘도 애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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