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록하는 2022년│Episode 87│2022.05.02-06
#1. 2022.05.02│전원이 꺼진듯한 월요일 밤
매월 말일의 금요일이 바쁜 것처럼 매월 일일의 월요일 역시 정신이 없다. 내 일의 절대적인 양이 감당하기에 너무 많거나 한 것은 전혀 아니다. 다만 업무는 상대적인 거라서 나의 다른 날들에 비해 약간 일이 몰린다는 것이다. 그리고 사람은 또 적응의 동물인지라 어느새 편안해진 가운데서도 몰리는 일에 나도 모르게 허덕이고 있다. 에너지를 회사에서 쏟아버리고 집에 오자마자 잠이 들었다. 아무것도 하지 않았고 월요일이 끝났다.
조금은 괜찮은 월요일 일기를 쓰고 싶어서 미루고 미루다 여기까지 왔다. 그날 내가 도대체 무엇을 했는가. 그래도 하나는 남겨두고 싶은 일이나 생각을 하지 않았을까 떠올려봤는데 아무것도 없었다. 생각 없이 하루를 보냈다는 자괴감에 일기 쓰기가 갑자기 버겁게 느껴졌다. 그날부터 밀린 일기가 결국 일주일이 되었다.
#2. 2022.05.03│날 좋은 날. 아름다운 길을 걸었다
좋아하는 선배와 점심을 먹었다. 선배는 날이 좋다며 갑자기 나를 차에 태우더니 회사 근처 하늘공원로 향했다. 그리고 차에서 내린 내 눈앞에 이렇게나 아름다운 길이 펼쳐졌다.
바로 근처 노을공원에서 결혼사진을 찍을 정도로 이곳을 좋아하고 많이 왔었다고 생각했는데 여기에 이렇게 아름다운 곳이 있는 줄 몰랐다. 끝없이 펼쳐진 나무 길을 무작정 걷고 또 걸었다. 만약 시간이 더 있었다면 끝없이 걷고 싶은 길이었다. 어느새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맺히고 신경 쓰이던 것들은 잠시나마 잊혔다. 이 길을 지금 이 순간 이렇게 걷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나는 참 행복한 사람이구나 싶었다.
#3. 2022.05.04│어른이날 작은 잔치 준비는 실패했지만 어쨌든 즐거운 저녁
집에 사람들이 놀러 오는 것이 좋다. 내 공간을 내가 좋아하는 누군가와 함께 나눈다는 것도 좋고, 집에 갈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 역시 좋다. 코로나 전에는 이런저런 핑계로 집에 사람들을 왕창 왕창 불렀었다. 새우 철에는 대하 파티를 열었고, 연말 즈음에는 크리스마스 파티를 열었었다. 집은 좁았지만 바글바글 함께 하는 것이 즐거웠다. 코로나 발생 이후 2년 넘게 그런 일들은 없었다.
문득 달력을 보니 곧 어린이날이고, 마침 5월 1일부터 대부분의 제한도 사라졌다. 게다가 어린이날 다음날이 금요일이다. (평일에 회사에 안 간다는 것과 파티를 하고 나서 충분히 치울 시간과 체력 보충이 가능하다는 것이 중요한 부분이다.) 친구들을 부르고 싶었다. 시간이 별로 없어 엄청난 계획을 세우기는 어렵겠지만, 그래도 분위기는 충분히 낼 수 있을 것 같았다. 초대장부터 만들기 시작한다.
문득 스스로 어이가 없어서 웃음이 난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늘 이런 식이다. 이런 것들을 하는 것이 너무 좋다. 사람들을 초대하는 것에 있어 집을 치우거나, 친구들에게 파티 계획을 공유한다거나, 먹을 것을 준비하는 것과 같은 중요한 일들보다 늘 이런 자잘 자잘한 일들부터 한다. 그런데 어쩌겠는가. 일단 이런 것들이 나는 너무 재미있고, 또 내가 재미있어야 누군가도 즐겁게 부를 수 있는 거 아닌가.
초대장을 만들고, 프로그램을 대충 짜고 나서야 집을 둘러본다. 집이 엉망이다. 누군가를 부를 수 있는 수준이 아니다. 약 3시간 정도의 대청소가 필요한 정도다. 의욕이 갑자기 사라진다. 집을 치울 수 있는 에너지는 없다. 대신 6월에 체육대회를 한 번 열어보기로 남편과 협의하고 어른이날 파티는 둘 만 하기로 했다.
남편과 둘만의 어린이날 전야제가 시작됐다. 집 근처 조개구이 집으로 향했다.
처음 와본 곳인데 분위기가 제법 조개구이집 느낌이 난다. 조개도 실하다. 계획했던 어른이날 작은 잔치는 못했지만, 남편과 함께 하는 둘만의 조개구이 파티도 충분히 즐겁다.
#4. 2022.05.05│언제까지나 어린이고 싶은 어른이의 즐거운 어린이날
어린이날을 맞아 백만 년 만에 영화관에 갔다. <닥터 스트레인지: 대혼돈의 멀티버스>를 보기로 했다. 마블 영화를 제대로 챙겨보지 않았지만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 시리즈와 '닥터 스트레인지'만은 챙겨봤었다. 오랜만에 찾은 영화관은 낯설었다. 내 옆과 앞뒤에 이렇게나 사람이 빽빽하게 있다. 게다가 다들 무엇인가를 먹고 있었다. 불과 이년 전만 해도 너무나 당연한 모습일 텐데, 새삼 그 모습이 어색하다. 짧은 시간 참 많은 것이 바뀐 것 같다.
영화를 보고 나왔다. 오랜만에 실내 세차를 하기로 한다. 하는 김에 스팀 청소도 같이 하기로 했다. 세차비로 6만 원을 썼다. 예상에 없던 큰 지출이다. 불과 한 시간 전만 해도 어린이날을 맞아 영화를 보고 솜사탕을 구경하며 오락실에 가고 싶어 하던 어린이였는데, 갑자기 어른이 된 것 같다. 현실이다.
저녁은 갈비를 먹기로 한다. 이런 날은 달짝지근한 양념갈비가 딱이다. 그런데 나만 그런 생각을 한 것은 아닌지 갈빗집에 줄이 길다. 그래도 시간을 잘 맞춘 덕분인지 생각보다 오래 기다리지 않고 들어갔다. 남편과 갈비를 먹다 보니 부모님과 함께 보냈던 내 어린이 시절의 어린이날들이 떠오른다. 생각만으로도 즐겁다. 어쩌면 올해가 나와 남편이 오롯이 둘만 보내는 마지막 어린이날이 아닐까 싶다. 그랬으면 좋겠다. 물론 내가 잘할 수 있을지에 대한 걱정은 여전하다. 아직 이렇게 철없는, 어린이고 싶은 나인데 잘할 수 있을까. 어른이 될 수 있을까. 그럼에도 어쨌든 내년 어린이날에는 진짜 어린이(라고 하기엔 너무나 작겠지만)와 함께 보내고 싶다.
언제까지나 어린이고 싶은 어른이의 즐거운 어린이날이다.
#5. 2022.05.06│피자와 함께 하는 마블 정주행 첫날
어제 <닥터 스트레인지: 대혼돈의 멀티버스>를 보고 나니 마블에게 버림받은 기분이었다. 이렇게 버림받고 싶지는 않다. 남편 역시 챙겨보던 사람이 아니다. 이참에 함께 정주행을 해보기로 하고 디즈니 플러스를 구독했다. 주행의 순서는 인터넷 전문가의 도움을 받기로 했다.
마블 여행, 그 첫날이다. 퇴근 후 집에 오는 길에 피자를 시켰다. 우리가 좋아하는 나쵸 피자다.
피자와 함께 <아이언맨>과 <인크레더블 헐크>를 봤다. 재밌다. 이렇게 유명한 영화를 처음 보다니. <아이언맨>을 본 적 없는 내가 부럽다던 선배의 말이 이해가 된다. 마블의 세계관과 다양한 연결고리에도 놀랐다. 아직 갈 길이 멀다. 그래서 좋다. 앞으로 볼 것이 이렇게나 많이 남았다니. 기대가 된다.
일기를 쓰기 시작한 이후로 이렇게 일기를 밀렸던 적이 없다. 일기 쓰기가 의미 없게 느껴지기도 했고 귀찮음에 꾀가 나기도 했던 것 같다. 포기하고 싶기도 했다. 그럼에도 어쨌든 꾸역꾸역 5일의 일기를 다 썼다. 이렇게 밀린 일기를 몰아서 쓰다 보니 나의 널뛰는 감정들과 체계적이지 못한 시간들이 한눈에 그려진다. 이 정도였나. 새삼 놀랍다. 밀린 일기를 이렇게라도 몰아 쓰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싶다가도 또 이렇게 적어두고 보니 매일매일의 기록이 내 하루에 꽤 많은 도움이 된다는 당연한 사실을 다시 한번 느낀다. 일주일이 지났고, 어쨌든 밀린 일기를 몰아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