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ttachment, 1829 by Sir Edwin Henry Land
Attachment, 1829 by Sir Edwin Henry Landseer
동서양을 막론하고 죽은 주인의 곁을 지키다가 희생하는 충실한 개 이야기는 어디나 있는 모양이다.
19세기 초반 영국의 한 귀족이 등산하다 추락 사망 개는 시신이 발견될때까지 온갖 들짐승을 물리치며 시신을 온전하게 지켰고 이에 감동 받은 월터 스콧이 헌시를 썼고 또 그 시에 감명받아 에드윈이 그림을 그려낸 것이다 라는 것.
충성이라는 단어에는 군사주의가 가득 담긴거 같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 충성이 어디 죽은자들에게 돌아가기나 한 역사가 그리 있었나. 살아 있다하더라도 권력의 흥망에서조차 그 무게는 하늘과 땅만큼 달라진다.
정승집 개가 죽어도 오는 인간들이 정승이 죽으면 코빼기도 안비친다 했다.
개는 충성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을게다 뭐든지 계급짓고 양분하기 좋아하는 인간들이 자신을 우주만물 창조주의 가장 뛰어난 창조물이라는 착각하에 다른 창조물에게 충성을 새겨넣었을 뿐이다.
인간-동물 관계의 이상화된 이미지(충성하는 개)일 뿐이다. 인간 중심으로 ‘감상용 이상(ideal)’을 그린 것이며, 현실의 복잡성(동물의 고통, 인간의 책임 등)은 생략되어 있다.
이 세상 모든 사회의 정치가 다 그러할게다. 죽음 이후에도 저렇게 받을 수 있는 건 권력을 전제로 하는 충성심에서 발로 된 희생은 절대 아니라고 생각한다.
충성이라는 단어 보다는 신뢰 믿음이 아닐까 싶다.
인간에 대한 신뢰가 보여준 희생이겠지
누군가 죽어서도 혹은 권력이 쇠락하고 나서도 그 곁에 그를 지지하고 보호해주는 이들이 남았다면 그건 충성심이 아닌 신뢰라고
권력이 영원할거라 믿는 이들에게도 그 권력에 호가호위하며 권력을 나누는 자들도 한심하고 역겨워보이는 이유일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