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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효주 Jan 31. 2024

기억하라, 인류의 잔혹함을

[도시]아우슈비츠, 폴란드

매년 1월 27일은 국제홀로코스트 희생자들의 날입니다. 

1945년 악명 높았던 아우슈비츠 수용소에 소련군이 진격해 들어와 수용소를 해방시킨 날이었기 때문입니다. 

홀로코스트는 대량학살을 의미하는 일반적인 행위를 일컫지만, 제2차대전 이후 독일 나치가 행한 유대인 학살을 의미하게 되었습니다. 독일은 제2차 대전에서 패전이 짙어지자 수많은 수용소들을  파괴하고 증거를 인멸하려했지만, 아우슈비츠만은 소련군이 너무 일찍 진격해들어오는 바람에 다행히도 그들의 끔찍한 만행을 증명하는 살아있는 홀로코스트의 증거가 되었습니다. 

세계인권선언이 만들어지게 된 가장 결정적인 사건이었던 유대인 학살의 증거, 아우슈비츠로 가는 길은 크라코프부터 시작이 됩니다. 


폴란드의 수도 바르샤바에서 기차로 3시간이면 크라코프라는 오래된 도시에 도착합니다. 바르샤바가 폴란드의 수도가 되기 이전 16세기가 다하도록  폴란드의 수도였고, 도시 자체가 세계문화유산이 될만큼 역사의 유산이 아름답고 풍부한 곳입니다. 이토록 아름다운 도시지만, 이 곳은 제2차 세계대전의 아픔이 고스란히 담겨 있는 곳이기도 합니다. 


 세계대전의 포화 속에서 폴란드의 70%가 파괴되었을 때도 이 아름다운 도시가 온전히 문화유산을 보전할 수 있었습니다.  아이러니하게도 나치 독일의 전략적  본부로 이곳을 사용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차로 1시간거리에 그 유명한 아우슈비츠 수용소가  위치하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크라코프 인근 위치한 도시 오슈비엥침(Oświęcim)으로 이동합니다. 우리에게는 아우슈비츠라는 지명으로 더  익숙한  폴란드의 공업도시입니다.  


 독일은 유대인을 절멸하기 위한 목적으로 여러곳에 수용소를 세웁니다. 아우슈비츠는 독일이 수많은 절멸수용소 중 하나이지만, 규모가 크고 시설이 현재까지 온전히  보전되었다는 이유로 나치 대학살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독일이 점령한 폴란드 영토에 세워진 최초의 나치 집단  수용소로 당시  최대규모였습니다. 원래는 정치범과 일부 유대인들을 수용하고자 했던 시설이었지만, 1942년부터는 유대인 인집단 학살 시설이 되어버렸습니다. 

 앞서 말한 절멸  수용소 중 첫번째인 아우슈비츠의 입구에 다다르면 '노동이 자유를 가져다준다(ARBEIT MACHT FREI)'라는 유명한 문구가 그로테스크하게 걸려진 철문을 만날 수 있습니다. 수많은 유태인들이 그 문으로 들어가 죽음에 이르는 노동에 시달렸을겁니다. 노동이 그들을 자유롭게 하는 것은 아마 죽음에 이르러서였을 것입니다. 

 두번째 수용소는 몰러드는 유태인들의 수용을 감당하기 어려워 새로 지워진 대규모의 시설이었습니다. 전 유럽에서 유태인들을 태운 기차가 길고 긴 기찻길을 달리다가 기차길이 끝나는 곳에 커다란 문이 있습니다. 그 문으로 들어서면 가혹하고 거대한 비르케나우 수용소가 시작됩니다. 슬프게도 같은 유태인들을 학살하기 위한 이 건물들을 제1수용소에 있던 같은 유태인들이 건설했다는 것입니다. 두번째 수용소는 아우슈비츠 옆 비르케나우라는 에 있습니다. 이 곳은 본격적인 대량학살을 자행했던 곳입니다. 홀로코스트를  다룬 프로그램이나 영화에서 자주 마주했던, 샤워실이라고 명칭한  곳에 사람들을 몰아 넣고 치클론-B라는 살상가스로 사람들을 학살했던 그 곳입니다. 

 그 외에도 아우슈비츠-비르케나우 지역엣는 5개의 절멸수용소들이 위치해있고, 목적은  오로지 독일게르만 민족과  다른 이들에 대한 학살이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곳에서  유태인에 대한 학살만이 진행되었다고 생각하지만, 집시, 장애인이나 흑인,  동성애자들도 희생자였습니다. 명백히 다름에 대한, 사회적약자들에  대한 잔혹한 차별과 학살이었습니다. 

  나치 정권은 독일 사회에 해로운 생활을 한다고 여긴 사람들을 표적으로 삼았습니다. 남성동성애자, 범죄자, 노숙인이나 성매매여성, 알콜중독자와 장애인, 집시까지 말입니다. 특히 장애인은 유전적으로 건강하지 않으며, 의료재정에 부담을 주는, 즉 국가에 도움이 안되는 존재로 규정했습니다. 지독한 혐오를 기반으로 한 학살이었습니다. 

1945년 1월 27일 소련군의 진격으로 수용소가 해방될때까지 130만명이 수용되었고, 그 중 110만 명이 사망했습니다. 


폴란드와 이스라엘과 독일은 이 아우슈비츠를 끔찍한 역사의 현장으로만 남겨두지 않았습니다. 

 전쟁이 끝나고 2년 뒤 폴란드 정부는 이 곳 아우슈비츠를 희생자 박물관과 추모공간으로 지정합니다. 

 가스실로 들어가기전, 여자들은  머리를 잘랐고, 사람들은 안경과 신발을 벗었습니다. 머리카락은 카펫을 만드는데 사용되었고,  안경의 알은 군수공장으로 보내졌습니다. 하물며 시체를 화장하고 남은 뼈는 비료로 사용했다는 기록도 새겨져 있습니다. 너무나 체계적으로 진행되었던  학살이었습니다. 

이렇게 끔찍했던 만행을 기록하는데 가해국가인 독일 역시 수많은  비용을  지불하고  연구를 이어나가고 있다고 합니다. 

 유태인들은 매년 봄, 아우슈비츠와 비르케나우를 를 잇는 3km를 걷는 교육프로그램을 마련하여 생존자와 청년들이 함께할 수 있는 '산자들의 행진(March of the Living)'을 기획하고 운영합니다. 

 

세계인권선언문을 만들 때 가장 첫번째 조항으로 이 문장을 넣은 이유도 바로 이 홀로코스트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모든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자유로우며 동등한 존엄과 권리를 가진다. 모든 사람은 이성과 양심을  타고나며 인류애의 정신으로 서로를  대해야 한다."


 유태인이든, 흑인이든, 동성애자나 장애인이든 인간이라면 차별과 혐오로부터 자유로워야 하겠죠. 거기에 더해 동등하게 존엄할 것입니다. 독일인이 가지고 있는 권리라면 유태인도 당연히 그 권리의 향유자가 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어떤 민족이나 인종이 되었든, 사람이기에 이성적으로 행동해야하며 양심에 반하는 일은 하지 않아야할  것입니다. 인류애라는  것이 바로 그런것이 되겠죠. 

 

 인간이라면 결코 행할 수 없는 수많은 일들이 일어났던 아우슈비츠. 그  곳에서 세계인권선언이 탄생할 수 밖에 없는 이유일 것입니다. 





참조 : 홀로코스트 백과사전 https://encyclopedia.ushmm.org/content/ko/article/death-marches-1

참조 : https://www.motl.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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