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이 짧게 지나간다고, 기후 변화로 단풍조차 아름답지 않다고 여기저기서 말했다. 올해는 단풍을 못볼 수도 있다는 소식에 마음은 벌써 가을을 지나가고 있었다. 그런데 며칠 기온이 뚝 떨어지니 주변의 나무들이 조금씩 물들기 시작한다. 어제오늘이 다르다. 집 주변의 은행나무와 단풍나무는 조화롭게 주변을 물들인다.
가을의 묵직한 공기는 나를 바닥으로 조금씩 끌어내리는지 어제부터 사뭇 감성의 솟는다.
(집 주변의 어제와 오늘의 단풍들)
어릴 적 센티한 감성으로 음악을 듣고 눈물 흘리던 습관이 나오려 하는지 뭔지 자꾸 솟을 것 같은 마음이다. 노을이 슬프다고 하면 그때마다 나는 노을이 아름답다고 말한다. 반대편에는 또 해가 떠오를 테니 객관적으로 슬프지 않고 아름답게 보이기까지 하는데 단풍 든 잎 떨어진 채 낙엽 되어 뒹굴어 거리에 쌓여갈 때는 왠지 모를 서러움이 생긴다. 회자정리라고 하여 헤어짐이 있어야 만남이 있다고는 하지만 아마도 낙엽이 새로운 새싹으로 태어나기도, 사람과 어떤 만남으로 관계가 이어지기도 할 그런 일은 불가능할 것이다.
가을은 결실의 계절이라기도, 성숙의 계절이라고 도, 사색의 계절, 독서의 계절 여러 가지로 불린다. 겨울 초입의 차가운 공기는 가을이 더욱 쓸쓸하게 느껴지게 하는데 일조를 한다. 아름다운 단풍과 찾아오는 가을의 외로움을 감싸 안은 이 센티한 감성은 노을 같은 아름다운 슬픔이기도 하다. 서럽고 초라하고 그런 느낌이 아닌 풍성한 느낌의 이 울컥하는 마음은 나에게는 안심이고 여유이다. 슬프고 기쁜 음악에도 무감한 정서이고 아무런 느낌이 오지 않는다면 나의 덤덤함에 가슴 아파해야 할 것이다.
어제도 어떤 장소에서 멈춘 채 1초 뒤의 일과 상황이 안 보였으나 한 발자국을 더 가서 보니 길이 보이고 해결책이 보이는 경험을 했다. 인생도 그럴 것이다. 지금 무언가 앞이 안 보이는 상황이라도 한 발자국만 더 걷는다면 모든 답이 보일 수도 있을 것이다. 올 가을은 단풍 없이 지나나 했는데 눈앞에 단풍이 이렇게 곱게 피어난 모습을 보이니 갑자기 가을이 밀려오고 추억도, 생각도 파도처럼 밀려온다.
Richard marx의 Right here waiting이라는 노래가 무한 귓전에 울린다. 감성 아름다운 노래와 단풍으로 또 한 번의 가을을 지난다. 김현승 시인의 시구처럼 누군가를 위한 가을에는 기도하게 하소서를 읊조려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