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누구인가?
철학의 근본적인 사유인 "나는 누구인가?"는 좋은 질문이 아니다. 질문의 초점이 나의 정체성 인지, 존재 의미인지, 삶의 목적인지가 분명치 않다. 무엇보다, 나는 너와 나, 우리로서 존재하는 데, 나 홀로 나의 정체성, 의미, 목적을 정의할 수 없기 때문이다. "나는 누구인가?"는 방황의 시작이다. 오히려, "사람은 누구인가?"라고 묻고, 더불어 살아가는 사람의 관계에 관한 질문을 하면, 의미 있는 답을 찾아 진행할 수 있다.
왜, 하나님이 사람을 만드셨을까?
"사람은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신(神)이 개입하면, "왜, 신이 사람을 만들었까?"라는 질문이 생기게 마련이다. 성경, 창세기에서 하나님이 사람을 만드셨다고 말한다. 왜, 하나님이 사람을 만드셨을까? 우연이 아니라면, 하나님이 사람을 만든 목적이나 의도가 있을 것이다. 다행히, 이 물음은 개신교 교리문답의 첫 물음이기도 하다.
사람의 제일 되는 목적이 무엇인가?
사람의 제일 되는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과 영원토록 그를 즐거워하는 것이다. (웨스트민스터 요리문답)
사람의 목적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을 지혜롭게 함축한 대답이다. 하지만, 상당히 추상적인 대답으로 들린다. 어떻게 살아야 하나님을 영화롭게 할 것인가에 관한 직접적인 가르침도 부족하다. 하나님이 사람을 만드신 목적을 좀 더 구체적으로 설명할 수 없을까?
하나님이 사람을 만드신 근본적 목적
왜, 하나님이 사람을 만드셨는지는 하나님 만이 답하실 수 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과 경륜을 살펴보고 추론할 수 밖에 없다. 사실, 하나님이 사람을 만드신 후, 사람에게 하신 명령과 돌봄으로 사람을 만드신 근본적인 의도를 알 수 있다.
하나님은 "우리의 모습을 닮은 사람을 만들어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가축과 온 땅과 땅에 기어 다니는 모든 생물을 지배하게 하자" 하시고 자기 모습을 닮은 사람, 곧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셨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들을 축복하여 이렇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많은 자녀를 낳고 번성하여 땅을 가득 채워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의 모든 생물을 지배하라."
하나님은 태초에 하늘과 땅을 만드시고 하늘과 땅에 있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게 하기 위해서 사람을 만드셨다. 사람이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가장 기본적인 사명은 번성하여 땅을 채우고, 살 수 있는 땅을 개발하고, 이 땅의 모든 생물을 잘 관리함이다. 그리고, 하나님은 자기가 만든 사람을 기쁨(에덴)의 동산에 두어 그곳을 관리하며 지키게 하셨다.
하나님께서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명의 숨을 그의 콧구멍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살아 있는 혼이 되니라. 하나님께서 동쪽으로 에덴에 동산을 세우시고 자신이 지은 남자를 거기 두셨으며 (킹제임스 한글성경)
살아있는 혼으로서의 사람은 흙으로 된 육체와 하나님의 숨을 받은 영을 지니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자신이 조성한 에덴동산에 두시고, 하나님 앞에서 기쁨과 행복을 누리며 살도록 하셨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신 의도를 좀 더 쉬운 말로 표현해 보자. 육체를 지닌 사람은 이 땅에서 자식 놓고 번성하여, 이들이 잘 살 수 있는 공동체(마을, 도시, 국가, 세계)를 만들고, 그 안에 있는 생물과 환경을 잘 관리해야 한다. 이와 함께, 영을 지닌 사람으로서, 하나님이 거하시는 기쁨의 동산에서 행복을 누리며 살아야 한다.
하지만, 인류의 조상이 하나님께 불순종하여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그들은 기쁨의 동산에서 쫓겨나 방황하고 죽게 되었다. 그들이 아차, 잘못하여 불순종하고 죄를 지은 것이 아니다. 누가 인류의 조상이 되었던지, 아마, 그들도 같은 죄를 지었을 것이다. 사람은 완전으로 향하는 상태로 창조되었기 때문이다. 가톨릭 교회 교리서(302)는 "사람은 고유의 선과 완전성을 가지고 있기는 하지만, 창조주의 손에서 완결된 상태로 나온 것은 아니다. 사람은 하느님께서 정해 주신, 아직도 다다라야 할 궁극적인 완성을 향한 ‘진행의 상태’로 창조되었다"라고 말한다. 사람의 궁극적인 완성은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으로 하나가 되어 하나님의 영광'을 누리는 것이다 (요 17장). 하나님은 완전하지 않아 죄짓는 사람을 불쌍히 여기신다. 그래서, 사람은 계속된 하나님의 말씀과 돌보심을 받는다. 창조 시, 주어진 하나님의 말씀과 돌보심이 선언적이었다면, 이후의 말씀과 돌보심은 생성적이라 할 수 있다.
하나님이 사람을 만드신 생성적 목표들
사람이 하나님의 영광을 향한 진행의 상태에 있다면, 인간 역사 속에서 생성하는 이정표들과 목표들이 있을 것이다. 하나님의 구속사는 인간 역사 속에서 발전적으로 전개되고 있다. 구속사의 대략은 메시아 예언, 예수의 출생, 복음 전파, 예수의 죽음, 부활, 승천, 재림, 새 하늘과 새 땅으로 이어지고 있다. 구속사의 때와 시기는 하나님의 신비로운 경륜 속에 감추어져 있지만, 인간 역사 안에서 전개될 것이다. 복음의 주제인 '하늘나라'도 사람의 시간 속에서 더욱 분명해지고 있다. 하늘나라는 아브라함이 멀리서 믿음으로 바라보았고, 다니엘이 예언하였고, 예수가 전파하였고, 지금, 이 땅에 임하고 있다.
이와 함께, 하느님께서는 당신 계획의 주인이시지만, 이 계획의 실현을 위하여 사람의 협력을 사용하신다. 하느님께서는 사람을 단순히 거기 있게만 하신 것이 아니라, 스스로 행동하고, 서로가 서로에게 원인과 근원이 되게 하신다 (가톨릭교회 교리서 306). 우리는 지금, 주기도문의 "나라이 임하옵시며"를 위한 적극적이고 생성적인 목표들을 세우고 실행해야 한다. 오늘도 유효하지만, 20세기 교회들은 의료, 교육, 민족 복음화, 세계 복음화, 미전도 종족 선교, --나라 선교 등의 목표들을 생성했다. 오늘, 우리는 또 다른 도전들에 직면해 있다. 몇 가지 예를 들면, 환경오염, 기후변화, 분쟁, 전염병, 고물가, 등이다. 유전자 복제와 관련된 접근성, 공평성, 윤리적인 문제와도 직면해 있다. 오늘, 우리가 당면한 도전과 문제들은 21세기 기독교회 선교의 영역이 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고 있다. 사람은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으로 하나가 되어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는 궁극적인 목적을 향해 전진하고 있다. 이 과정에서 사람은 공동체로서 적극적이고 생성적인 목표들을 세우고 실행해야 한다. 하지만, 이 모든 과정을 하나님이 경륜(經綸)하신다. 하나님이 하늘과 땅에 일어나는 모든 일을 신비롭게 예정하시고, 계획하시고 경영하신다는 뜻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