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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trustwons Apr 01. 2024

65. 또 하나의 나와 관계

[독서와 생각]

65. 또 하나의 나와 관계    


가끔 또 하나의 나가 나에게 말을 걸어온다.     


  전 세계에 고통 받고 있는 사람이 이렇게 많은데 너는 언제까지 네 자신의 즐거움만 추구하며 살아갈 생각이니? 뭔가 너에게도 너만의 ‘역할’이 있지 않을까?

글쎄…

  기부나 자선활동 혹은 자원봉사만이 타인에게 도움을 주는 방법일까? 사람은 각자 역할이 있다. 모두가 자기 자신의 마음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해야 할 일을 열심히 한다면 그것으로 충분해.

  나는 내가 정말 좋아하는 일을 통해 내 자신을 표현할 뿐이야. 그것이 결과적으로 다른 사람들에게 도움이 된다면 그보다 좋은 일은 없겠지.

<Love&Free/다카하시 아유무 글차수연 옮김/동아시아>



  참으로 이성을 제대로 활용한다면, 정말 올바른 논리와 선한 합리를 바탕으로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할 것이라 하겠다. 

본디, 인간을 창조한 분이 참 논리와 선한 합리를 가진 분이시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고통을 받는 인간이 많다는 것은 그릇된 논리와 비합리에 의한 인간관계에서 오기 때문이다.

  이렇게 말하면, 대부분의 인간들은 무엇이 논리인지, 합리인지를 이해를 잘 하지 못한다. 그러면서도 논리적인 사고를 한다고 생각하고, 합리적인 행동을 한다고 말한다. 가장 어리석은 인간은 생각나는 대로 말하고, 맘이 가는대로 행동한다고 하면서 그것을 순수하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때문에 젊은 남녀의 사랑에 있어서도 순수한 사랑을 추구하면서도 사실은 그릇된 사랑에 빠지고, 괴로워하고, 미워하고, 결국은 고통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사랑이 무엇인지를 알지 못하면서 말이다. 사랑을 노래한다. 반면에 이성적 사랑은 위험하다고 하며, 즉흥적으로나 본능적으로 표현하는 애정이 안전한 사랑이라 생각을 한다.    

 ‘사랑’은 이성적으로 가장 논리와 합리에서 나온다고 생각한다. 아니 사랑은 하나님의 본성이라고 말할 수가 있겠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을 우리가 알고 믿었노니,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사랑 안에 거하는 자는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도 그의 안에 거하시느니라.」(요일4:16)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요일4:8)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의 성경의 말씀은 천지를 창조하실 때부터 사랑으로 하셨으며, 그 사랑은 변함이 없으시며, 독생자를 주심에도 그 사랑으로 하셨음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즉흥적으로, 대안으로, 대책으로 독생자를 보내신 것이 아닌 것이다. 

  여기서 ‘전능하신 하나님’이란 성경에 많이 나오는 여호와 하나님이 어떤 뿐인지를 말해주고 있다. 이에 대해서 인간의 지식으로는 헤아릴 수가 없는 분이시다. 또한 그런 분이 사랑이시다고 했다. 그러므로 ‘사랑’이란 단순한 남녀의 본능적 충동에서 나타나는 현상, 감정으로 표현할 수 없는 너무나 큰 인격적인 성품인 것이다. 

  그러한 사랑에 대해서, 단순한 감정반응이나 동물적 본능으로 대체하거나 비교해서는 안 된다. 물론 동물의 암수 간에 행위나 인간의 남녀 간에 감성(感性) 표현을 애정, 사랑 등으로 인식되어지면서 보편화 되었고, 그리스 로마신화에나 나오는 사랑의 신으로 쿠피도(cupido), 아모르(amor), 에로스를 대중적 사랑으로 인식되었으나, 사실은 인간의 욕정을 의미한다는 사실을 잊어버렸는지 모른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에 가장 가까운 것은 모성애, 어머니의 사랑이라 할 수가 있다고 말해주고 싶다. 

  왜? 여기서 사랑에 대한 이야기를 길게 말했어야했나? 인간의 존재, 자아(自我)의 가치에 있어서는 사랑을 빼놓을 수가 없기 때문이었다. 인간의 고통이나 갈등, 두려움 등등에 의해서 상처를 치유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사랑뿐이라고 생각된다. 또는 인간의 정체성이나 자아의 성숙에 있어서도 사랑이 유일하다고 말할 수 있겠다. 

  자아를 찾아 여행을 떠나 여행기를 쓴 그녀의 글에서 많은 감동을 받게 된다. 「뭔가 너에게도 너만의 ‘역할’이 있지 않겠니?」라는 말은 참으로 많이 듣는 말이 아닐까? 특히 한창 자랄 나이인 청소년소녀들에게 어른들이 말이다. 하지만 그녀는 놀라운 말로 이어간다. ‘글쎄’라는 말로 생각을 열어놓았다. 흔히 말하는 사회적인 타인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사람? 직업? 방법을 말이다. 그러나 그녀는 이렇게 정리를 했다.

「모두가 자기 자신의 마음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해야 할 일을 열심히 한다면 그것으로 충분해.」

  참으로 그녀는 자신에게만은 자유로움을 가지고 있는 것 같았다. 즉 ‘자유’를 잃지 않았다고 생각된다. 오늘날에 많은 젊은이들이 그녀처럼 자신의 자유를 잃지 않았으면 한다. 외부환경에서 수많은 억압과 강박감을 받을지라도 자신의 자유를 지킬 수 있는 지혜를 가졌으면 한다. 그러려면 항상 자신의 마음의 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고 생각된다. 

  나 역시 외부의 환경의 압박에서 피할 수는 없었지만, 그럴 때마다 스스로 외로움을 즐기며, 산과 들로 돌아다녔던 것이다. 그렇게 산과 들을 돌아다닐 때에 나의 벗은 내 마음이었던 것이다. 나를 가장 잘 이해해주는 것은 자신의 마음뿐이었다. 그녀가 말했듯이 ‘또 하나의 나’가 나에게 말을 걸었다는 것을 충분히 공감을 하겠다. 그렇다. 나와 또 하나의 나는 세상을 살아가는 데에 큰 힘이 되고, 위로가 되고, 판단을 잘 이끌어 주고, 자유를 잃지 않도록 깨어준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녀는 자신을 찾아 여행을 떠나는 이유는, 현지에 구속되지 않는 이방인의 나그네와 같다. 그러므로 또 하나의 나와 대화를 할 수 있으며, 자유가 무엇인지를 깨닫게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녀는 이렇게 말했던 것이다. 

「나는 내가 정말 좋아하는 일을 통해 내 자신을 표현할 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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