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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trustwons Apr 17. 2024

68. 믿고 기다리는 마음

[독서와 생각]

68. 믿고 기다리는 마음   

  

    삶과 어깨동무한다는 것은 때로 아주 복잡한 일이다. 때로 우리는 무조건 다른 사람을 보호하고 도와주려고 할 때가 있다. 하지만 대개 임시적인 방편이 될 뿐이다. 

  우리가 다른 사람의 삶을 진정으로 축복해 주는 방법은 그가 자유롭게 결정할 수 있도록 믿고 기다려주는 것이다. 스스로 어떤 일을 해나가도록 지지해 주면서 가만히 어깨동무해 주는 것이다. 누군가에게 아직 신뢰가 가지 않더라도 우리는 그를 무조건 신뢰하는 것이 중요하다. 우리의 그 믿음이 그의 삶에 커다란 버팀목이 된다.

<할아버지의 기도/ 레이첼 나오미 레멘 지음>


  부모가 자식을 바라볼 때, 마음을 놓지 못하고 결국에는 부모가 강요하게 된다. 자식이 스스로 어떤 일을 선택하고 헤쳐나가도록 기다려주지 못한다. 또는 친구나 애인에게도 보호하고 도와준다는 마음이 앞서 그의 진실한 문제를 보지 못하거나 가볍게 생각하여 마음에 상처를 주게 되는 경우가 있다. 이는 진정한 어깨동무가 못되기 때문이다.

  삶은 스스로 사는 것이 아니라 부여된 것임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부모도, 자식도, 친구도, 애인도 말이다. 자신의 삶을 어깨동무할 수만 있다면 다른 사람의 삶도 어깨동무할 수가 있게 된다. 그럴 때 자신의 삶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의 삶도 진정으로 축복해 줄 수 있게 된다. 그것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의 삶이다. 하나님을 신뢰하는 자는 믿고 기다릴 줄 안다.


  인간의 교만함의 특징은 무엇일까? 겉보기에는 늘 그는 옳고, 똑똑하고, 멋져 보인다. 흔히 사람들은 그런 사람을 리더심이 있다고 말한다. 그러면 그는 더욱 잘난 척을 한다. 또 어떤 사람은 그 정도의 자부심이 있어야지, 적어도 자존심을 가져야지 한다. 그러면서 세상은 그렇게 사는 거라고 말한다. 정말 세상은 잘난 사람들이 사는 세상인 것 같다. 그래서 열심히 공부하고, 열심히 일하고, 열심히 사는 거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참 인생은 경주하는 삶인가 보다. 

  태어나서 한 번도 누군가 경쟁을 해야겠다는 생각을 가져본 적이 없었다. 단 한 번? 초등학교 1학년 때였다. 경쟁하려고 한 것은 아니었다. 특별히 선생님의 사랑을 받고 있다고 생각해서 멋지게 반장이 되려고 자청한 적이 있었다. 그때에 선생님은 웃으시면서 반 아이들이 선출하는 거라고 했다. 

  그런데 나를 힘들게 하는 분이 있었다. 왼손잡이는 병신취급을 받는다고 오른손잡이로 고쳐주겠다고 식사할 때나 글씨를 쓸 때나 조금도 빈틈을 주지 않았다. 그때부터 언어장애 같은 현상이 왔다. 그래서 침묵하는 버릇이 되었었다. 결국은 오른손으로 식사하고 글씨를 쓰게 되었다. 

  그리고 유독 장남이라고 온 동네를, 친척을 만나면 자랑을 했다. 마치 일 등급 상품처럼 말이다. 그때부터 인간의 가식적인 모습을 보았다. 또는 예쁜 옷을 입힌다고 여자 옷 같은 것을 자주 입게 했다. 친구들이 놀려대어 거부하여도 끝까지 입혀선 포기하게 했다. 그때부터 혼자 있는 것을 즐겨했었다. 

  「할아버지의 기도」란 책제목을 보는 순간, 그때에 고향 할머니가 떠올랐다. 집 근처에 가까이 사셨는데, 친할머니처럼 반가워하시며 잘해주셨다. 무더운 여름날 땀을 흘리며 할머니 집에 들어서니 시원한 미숫가루 물을 주시고, 옆에 오셔서 끝까지 말을 들어주시며 미소를 잃지 않으셨다. 이 책을 쓴 레이첼 할아버지도 그런 분 같았다. 잔잔한 글 속에서, 마치 연못에 돌 하나를 던져 파문이 퍼져나감을 바라보는 그런 한가로움을 주면서도 그 파문을 지켜보는 소년의 마음이랄까? 그런 느낌을 준다. 

  삶과 어깨동무한다는 것? 어릴 적에 ‘어깨동무’의 노래를 참 많이 불렀었다. 

“어깨동무 씨동무 미나리 밭에 앉았다. 동무동무 씨동무 보리가 나도록 씨동무.  어깨동무 씨동무 미나리 밭에 앉았다. 동무동무 까치동무 예쁘게 예쁘게 날아라.”

  요즘은 ‘동무’ 보다 ‘친구’란 말을 많이 한다. 이유는 북한에서 많이 쓰기 때문인지, 학교에서 쓰지 못하도록 했었다.

  그런데 ‘동무’는 순우리말인데, ‘친구(親舊)’는 한자의 표현이 아닌가? 이젠 옛말이 되어버렸다. ‘삶의 어깨동무’라고 하니깐 따듯한 느낌을 받는다. 마치 코트를 어깨에 걸쳐줄 때에 느낌? 또는 예수가 베드로에게, “넌 날 사랑하니?” 그때에 베드로의 마음은 어깨에서 따뜻한 느낌을 받았을 거라고 생각하게 된다. 

  인생에서 그런 친구? 어깨에 손을 얹어 줄 수 있는 사람? 그래서 어른들이 하는 말, “평생에 함께 할 친구를 만들라!” 그런 말이었나 보다. 누군가가 믿어주는, 일어서길 기다려주는, 언제나 지지해 주는 그런 어깨동무가 필요한 것이기보다는, 그런 어깨동무가 되라는 것이었구나.   

  그러하기 위해서는 먼저 자신에게 어깨동무가 되어야 한다는, 자신의 삶의 어깨동무가 될 때에 다른 사람에게도 어깨동무의 역할을 할 수가 있다는 것이었다. 먼저 자신에게 신뢰가 있어야 남에게도 신뢰할 수 있는 거지. 그래, 그것이 바로 자신에 대한 자존심인 거였어. 그러한 믿음을 가질 때에 다른 사람에 대해서도 믿음이 생기고, 상대편의 자존심을 존중할 수가 있는 거였어. 얼마나 신뢰해야 하나? 베드로는 그렇게 말했지. 얼마나 신뢰해야 하는지를 말이다.

“여러분을 부르신 분이 거룩하신 것처럼 여러분도 모든 행실에 거룩한 사람들이 되십시오.”

  다른 사람을 신뢰하려면 먼저 자신에게 신뢰해야 한다는 것이지. 누군가가 아직 신뢰가 가지 않더라도 그를 무조건 신뢰해 주는 것이 중요하다. 이것이 바로 거룩한 마음인 거야. 끝까지 믿고 기다려주는 마음, 하나님처럼 말이다. 탕자가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아버지처럼 말이다. 넘어진 아기가 스스로 일어나기를 기다려주는 믿음, 마라톤에서 마지막으로 달려오는 선수를 끝까지 응원해 주는 그런 믿음 말이다.

  그것이 삶과 어깨동무를 하는 것이지. 먼저는 자신의 삶에  어깨동무가 되어 주고, 그리고 다음은 다른 사람의 삶에 어깨동무가 되어주는 거지. 

  그런데 세상에 위선자들은 이렇게 말하지, “나보다 네가 더 중요해!”, “나에겐 너밖에 없어!”, “난 상관 마! 너만 믿어!” 정말로 놀랍도록 믿어지게 하는 말이다. 다들 그렇게 속아 넘어가는 거지.

  그러나 창조주 하나님은 그렇게 말하지 않았어.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해라.” [Be holy, because I am holy.]

  바로 이 말씀이야. 나에게 신뢰해야 남을 신뢰할 수가 있는 거지. 내 삶의 어깨동무가 되어주어야 다른 사람의 삶에 어깨동무가 되어줄 수가 있는 거지. 이 말의 본질은 뭐지?

  먼저 너 자신에게 정직하라는 거야. 그래야 남에게도 정직해질 수가 있다는 거지. 이제야 생각이 난다. 내 아내에게 사랑의 고백을 했던 것을....... 첫사랑에 내 모든 것을 쏟았기 때문에 당신에게 해 줄 수 있는 것이란 진실한 사랑뿐이라고 말이다. 얼마나 오만한 말인가? 그런데....... 늙음에 돌아보니 내 삶의 어깨동무가 되어주지 못했어. 그러니 아내의 삶에 어깨동무가 되어주지 못한 것이었어. 결국 위선자의 길을 걸어온 셈이었지. 그래서 내 마음에 주홍글씨를 새겨놓게 됐지. 

「죄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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