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으로의 간증]
『4) 예수께서 가라사대, 여자여!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내 때가 아직 이르지 못하였나이다. 5) 그 어머니가 하인들에게 이르되, 너희에게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그대로 하라 하니라. 7)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항아리에 물을 채우라 하신즉 아귀까지 채우니, 8) 이제는 떠서 연회장에게 갖다 주라 하시므로 갖다 주었더니, 10) 말하되, 사람마다 먼저 좋은 포도주를 내고 취한 후에 낮은 것을 내거늘, 그대는 지금까지 좋은 포도주를 두었도다 하니라.』(요한복음 2장 중에)
「신약성서에서 가장 중요한 책은 사복음서이다. 사복음서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기록이다. 마태복음은 예수님의 탄생과 제자들의 선택에 대한 기록 후에는 산상에서 가르치신 말씀이 나타난다. 마가복음에는 귀신 들린 자와 시몬의 장모의 열병을 고치시는 이적들이 나타난다. 누가복음에서는 탄생의 배경과 상세한 성장과정 그리고 시험받은 후에 그의 소문이 퍼져 회당에서 가르치는 모습이 나타난다.
그러나 요한복음에서는 유대인의 전통적인 혼례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고, 여기에 예수님의 어머님이 참석하여 일을 돕고, 예수와 그의 제자들까지 초청을 받아 혼인잔치에 참석하고, 여기서 예수님이 표적을 나타내신 말씀부터 시작된다.
어떤 신학자는 요한이 예수님을 등장시킨 예화일 것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어떤 신학자는 헬라 신화에 나오는 것을 인용한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많은 신학자들은 오히려 실제 일어났던 사건임을 주장하는 편이다.
사실 그렇다. 진리이신 하나님의 복음에 있어서 이방인들의 것을 인용한다는 것은 매우 큰 모순을 낳는다. 요한복음의 서두에 가나의 혼인잔치를 드러낸 것은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다.
신학적 논리보다는 신앙적인 차원에서 살펴보아야 한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성령의 인도하심에 따라 기록하였다고 믿기 때문이다. 따라서 성경을 읽는 자세도 성령의 인도하심이 따르도록 해야 한다. 성령은 보편성을 가지신다. 그러므로 누구나 성령의 인도를 받을 수 있고, 성경의 진리를 깨달을 수 있다.
그런데 신학을 졸업한 자만이 성경을 해석할 수 있으며, 가르칠 수 있다는 전제가 교회 안에서 목사들에게 잘 훈련되어 버렸다. 그래서 아무리 성경을 읽는다 해도 성령의 역사가 일어날 수 없고, 말씀에 감동을 얻지 못하고, 길들인 방식대로만 은혜를 느끼게 한다.
그러한 은혜는 거짓이다. 성령은 누구의 통제를 받을 수 없다. 성령은 하나님이시며, 스스로 행하시는 분이시다. 그런데 목사의 길들인 방식대로 성령의 은혜를 받는다면, 성령 위에 목사가 존재하는 것이 될 것이다. 그러므로 누구나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을 수 있다.」
이 부분에 있어서는 매우 두려움을 가지게 된다. 그 이유는 커다란 세력이 뒷받침을 주고 있기 때문이다. 즉 예수의 제자들이 기록한 복음서는 하나님의 영에 의해 기록되었다고 신학자들도 그렇게 말한다. 그러므로 성경은 무흠 하다는 전제를 두고 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권능 안에 있다는 것임을 말한다. 그리고 또 다른 세력은 인본주의적인 신학적 해석을 하는 세력, 즉 신학계의 세력이 뒷받침하고 있다는 것이다.
마치 조선시대에 정치세력 뒤에 또 다른 세력이 뒷받침해주고 있는 세력은 유학(儒學), 유생들의 세력인 것이다. 이 유생(儒生) 원들은, 유교를 신봉하고 공부하는 선비들은 조선시대에 상위층의 신분으로서 그 당시에 최고의 엘리트인 셈이다.
물론 신학을 통해 안정적인 기독교계가 유지되어 왔다고 할 수 있겠다. 그렇지 않았다면, 기독교는 하나의 신흥종교로 수많은 가지치기를 했을 것이며, 또는 일개의 제도종교로 정착을 했을 것이다. 다시 말하면, 비체계적인 종교화나 샤머니즘, 무속신앙으로 발전했을 수 있겠다. 그런 면에서 인간의 합리적이고 건전한 이성에 의해서 바람직한 방향으로 자리를 잡게 되었다고 말할 수 있겠다. 또한 전통성을 지닌 종교로써의 역할을 할 수 있게 되었다고 말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믿음의 차원에 따라서는 상당히 위험한 노선을 그려지게 될 수 있다는 것을 배제할 수는 없을 것이다. 즉 성령에 대한 신학적 해석도 그렇고, 천사에 대한 해석도 그렇다. 그 외에도 많은 부분들이 있지만 말이다.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요한 14:26)
“내가 아버지께로부터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 곧 아버지께로부터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 오실 때에 그가 나를 증언하실 것이요.”(요한 15:26)
그리고 예수가 하늘로 오르기 전에 사십일 동안을 그들에게 나타내시어 하나님의 나라의 일을 가르치시고,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말씀하시면서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라고 했다.
더욱 놀라운 것은,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하고 말하시고 하늘로 올라가셨다.
정말 그들이 유하는 다락방에서 합심하여 기도할 때에. 오순절 날이 이르러,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었고, 불의 혀처럼 갈라지는 것들이 그들에게 보이더니 사람 위에 하나씩 임하였다고 한다. 즉 그들은 성령의 충만함을 받았다고 하였다. 그리고 성령이 충만한 그들은 각국에서 예루살렘으로 모여든 큰 무리의 각각의 방언으로 제자들이 성령의 이끄심대로 복음을 전하였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성령의 역사, 활동은 그 당시에만 일어났으며, 오늘날에는 극히 드문 일처럼 생각하게 되는 이유가 무엇일까? 이는 인간의 인본사상에 의한 이성적인 관념(觀念)에 의해 이해하고 받아들이려는 의식이 지배적이기 때문에 성령의 역사하심과 성령의 활동을 멀리 느껴지게 되었거나 배척하는 불신앙심이 지배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분명 말할 수 있는 것은 그때나 지금이나 성령은 전혀 차별 없이 한결같이 일하고 계신다는 것이다. 누구를 통하여 일하시는가? 그 당시에는 제자들을 통하여 일하셨으며, 오늘날에도 그리스도인들을 통하여 일하시고 계신다는 사실이다. 땅 끝까지 이르러 증인이 되도록 말이다. 또는 땅 끝까지 복음이 전해져서 하나님의 자녀를 찾아내신다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는 추수할 일은 많은데, 추수할 일꾼이 부족하다고 말하셨다.
그럼 요한복음에만 나오는 이야기로써, 가나 혼인잔치에서 일어난 기적, 물이 좋은 포도주가 된 이야기는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예수와 제자들까지 초청받은 것으로 보아, 예수의 어머니의 친척 중에서 혼인잔치, 집안의 일이었을 것이다. 그렇기에 예수의 어머니는 분주하게 잔치를 도우셨으며, 예수와 제자들까지 초청을 한 것으로 보아, 지나가다 참석한 것은 아닌 것이다.
여기서 놀라운 것은 며칠 동안 치르는 혼인잔치에서 매우 중요한 포도주가 바닥이 났음을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는 하인들에게 지시하여, 예수께 청하여 떨어진 포도주를 준비해 주기를 부탁하였다. 그것도 우습지 않은가? 객으로 참석한 예수에게 부탁을 하다니, 잔치의 주인공에게 부탁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 마리아는 예수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결국 예수는 어머니의 성화에 못 이겨, 하인들에게 눈앞에 있던 손님들의 발을 씻기 위해 준비해 둔 항아리도 하나가 아닌 여러 개를 가져다가 물을 채우라고 지시를 했다. 그리고는 가져다 잔치 상에 놓으라고 했다.
이때에 새로 가져온 포도주를 맛본 연회장에 객들이 마시고는 말하기를, 어찌 이 집은 먼저 좋은 포도주를 내고 나중엔 낮은 포도주를 내어놓는데, 그렇지 않고 좋은 포도주를 내어 놓느냐 하고 칭찬을 하였다고 했다. 연회장 주인을 진상을 알고 있었을까? 천만에 말이다. 하인들은 알고 있었다. 직접 가져온 것이니 말이다. 물로 포도주를 만든 사실을 말이다. 그것도 아주 좋은 포도주로 말이다.
그러나 가나 혼인잔치에서 좋은 포도주를 만든 이적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그냥 단순하게 연회장을 망칠까 봐? 그렇게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이 무의미한 일을 하실까? 결코 그렇지 않다고 믿는다. 물론 천지를 창조하신 일도 말이다.
여기서 깨달을 것은, 혼인잔치의 줄거리에 그치는 것이 아니다. 어떤 이적을 선보이기 위함도 아니다. 요한이 이 부분을 기록한 이유는 분명 큰 의미가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요한복음 앞부분에 기록하게 되었던 것이다.
가나 혼인잔치의 이야기는 전체적 의미를 보고 깨달아야 한다. 연회장이 말했듯이, 잔치 끝에 취한 후에야 낮은 포도주를 내오는 것이 통상적인 관례인데, 어찌 좋은 포도주를 내어오느냐에 핵심이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혼인의 구상은 바로 하나님의 나라와 관련이 있는 것이다. 즉 율법의 물이 복음의 포도주로 바뀌는 것이다. 새 시대를 의미하는 것이다. 모세로부터 시작된, 내려온 하나님의 백성, 유대인의 율법 시대가 복음의 시대로 전환됨을 의미하는 것이다. 즉 예수가 말했듯이, 율법을 폐하는 것이 아니라 완성되는 것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가 가르쳐준 기도문에서도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는 말씀이 여기서 시작되는 것이다. 또는 왜곡되어 버린 안식일의 회복도 의미하는 것이 된다.
이와 같이 물이 포도주로 변하였듯이 예수의 때가 이르면 그렇게 된다는 것이다. 좀 더 쉽게 말한다면, 하나님의 백성, 즉 하나님의 자녀를 선별해 내는 시대가 시작됨을 말하는 것이다. 이 일을 예수가 전한 복음을 그리고 예수가 이 땅에 온 뜻을, 즉 하나님의 약속된 메시아, 그리스도, 예수라는 것을 알게 하는 일에는 성령이 임하심으로 일어난다는 것이다.
예수 시대에서 제자의 시대 그리고 오늘날에 그리스도인 시대가 바로 성령이 함께 하는 추수 할 일꾼이라는 것이다.
좋은 포도주,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비싼 포도주를 마시며 만족해하던가? 그처럼 하나님의 독생자, 요한은 그 사실을 꼭 강조하려는 것이었다. 요한복음 3장 16절의 말씀을........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이것이 바로 좋은 포도주가 상징하는 의미인 것이다. 이제는 율법의 시대에서 복음의 시대로, 약속을 기다리는 시대가 아니라 성취하는 시대가 되었음을 말이다. 아브라함의 자손들, 믿음의 조상이 실현되는,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짐을 말이다.
이 좋은 포도주! 예수는 다락방에서 마지막 식사였던 만찬에서 제자들에게 빵과 포도주를 나누실 때에 하신 말씀을 생각나게 하심인 것이다. 초대교회는 이를 실천했던 것이었다. 그래서 이방인들은 그들을 말하기를 특별한 민족이라고 칭찬이 자자했다고 한다. 초대교회의 사람들은 무엇을 했는가? 그것은 예수가 주신 새 계명, “서로 사랑하라!”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요한 13:3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