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로나(Girona)
지로나는 바르셀로나에서 북쪽에 위치한 까딸루냐의 아름다운 중세풍 도시로 알려져 있다. 미드 ‘왕좌의 게임’의 촬영지로도 유명하다.국내에서 유명했던 '알람브라 궁전의 추억'이라는 드라마의 촬영도시이기도 하다. 영어로는 ‘히로나’ 까딸루냐어로 ‘지로나’로 발음한다.
바르셀로나 산체스 역에서 Renfe기차로 30분여를 달려 지로나 역에 도착해 나오자 바르셀로나보다 더 뜨거운 태양이 나를 반겼다. 더욱 강렬하면서도 무심하게 내리쬐는 해!
구엘 공원에서 이미 무리를 한 무릎이 걸을 때마다 통증이 밀려왔다. 예약한 호텔과의 거리는 도보 30분. 이 정도 즘이야 걸어서 가보자 했는데 몇 분 안가 벌써 힘들고 다리는 아프고 대략 난감하다. 한 십분 정도를 겨우 걸어가다 보니 작은 공원에 벤치가 보였다. 우선은 다리를 쉬고 싶은 마음에 벤치에 앉았다. 옆에는 아줌마 한 분이 앉아 계셨다. 온 몸을 관통하는 열기에 날씨에 대해 저절로 말이 나왔다. 그 분도 일을 끝내고 집으로 돌아가다가 휴식을 취하는 중이셨고, 여기는 왜 왔고, 내 여행에 대해 물어보면서 대화가 시작됐다. 그 분은 Cordoba 출신이었고, 안달루시아는 늘 돌아가고 싶은 고향같은 푸근한 곳이라고 했다. 안달루시아는 역시 내가 가장 좋아하는 지역이라 흥이 나서 말을 이어나갔다. 감탄사 Madre mia!를 연발하면서 혼자 여행하는 내가 부럽다고 했다. 10분여 앉아 있다가 다시 일어서는 나에게 Que tenga buen viaje, guapa! 라고 인사해 주셨다.
스페인어 중에 내가 좋아하는 말, guapa(멋쟁이),carino(애정스러운~) mi amor(내 사랑~) 등으로 끝나는 말이 참 좋다. 대화할 떄 친근하게 습관처럼 붙이는 말로, 한국인에게는 혹은 과장스러울 수도 있는데 사람과의 소통에 멋과 따스함을 더해 준다.
20여분을 혼신을 다해 걸어 호텔 costabella 에 도착했을 때 완전히 기진맥진해 있었다. 시내에서는 좀 멀리 떨어져 있지만 그 호젓한 분위기에서 쉬어 가기 위해 선택한 이유이기도 했다. 그를 위해 뙤약볕 아래서 체력을 좀 많이 소진했지만 후회하지 않을 정도의 아담하고도 이쁜 수영장이 있었다!
나를 맞은 호텔 직원들은 조용한 방을 요청하는 나에게 처음에는 미리 요청한사항이 아니라고 까다롭게 구는 듯 하더니, 나도 그에 맞게 응수하자 나의 스페인어가 훌륭하다며, 당신은 대학에서 스페인어를 가르치는 교수가 되어야 한다며 너스레를 떨었다. 일단 짐을 풀고 수영장에 나와 파라솔 밑 비치 의자에 몸을 뉘였다. 그 곳에서는 프랑스, 독일에서 온 가족들과 아이들이 한껏 수영을 하며 즐기고 있었다.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행복하다. 몸이 너무 피곤했지만, 아 이 순간을 위해 이렇게 멀리까지 왔구나 싶었다.
점심시간 막바지고 너무 지쳐 나갈 기력이 없어 호텔의 Menu del dia(식당,레스토랑에서 제공하는 그날의 메뉴로, 보통 세트메뉴로 구성됨) 를 먹기로 했다. 대구요리가 메인이었고, 가스파초와 비슷한 살모레호(Salmorejo: 토마토와 빵을 으깨어 만든 차가운 수프) 특히 수제요구르트가 일품이었다.
좀 쉬다가 저녁시간이 되어 나가기로 했다. 호텔에서 준 지도에 나오는 명소들을 찍고 (성당, 아랍 목욕탕 등) 골목 골목 오랜 역사의 흔적이 남아 있는 듯한 작은 도시를 걷는다. 무릎의 통증은 아직 진행형이다. 몸이 너무 힘들고 지치지만, 이 곳을 탐방해야 한다는 욕망이 나를 계속 움직이게 했다. 구글지도가 알려준 아랍목욕탕 지점까지 도착했는데, 도대체 출입구가 어디인지 보이지 않는다. 근처에 있던 젊은 여성에게 말을 걸었다. 오늘은 벌써 문을 닫았단다. 그러면서 우리 대화가 시작됐다.
오늘이 지로나 도시 일년에 한번 있는 축제라고 했다. 멀리서 아득히 들렸던 노래와 공연 소리가 이제서야 그래서였구나 싶다. 동네 사람들이 모여 작은 바자회도 열고, 음료, 음식들을 사 먹으며 춤,노래 등의 공연을 한다. 축제는 누구나 관람할 수 있었다. 이게 무슨 기회냐 싶어 같이 공연장으로 갔다. 축제분위기로 한껏 흥이 오른 테이블에 우리는 자리를 잡았다. 그녀의 친구 한명이 오늘 댄스 공연이 있어 그녀를 기다리는 중이라고 했다. 본인도 현대 무용을 전공했고 공연을 하기도 하고 공연 관련 사업을 한다고 했다.
본인은 Vegetarian 보다 더 완벽한 채식을 추구하는 Vegan 이었고 큰 개 한 마리를 키운다며 본인의 애완견 사진도 보여주었다. 스페인 정부에 대해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은 예술에 대한 국가의 지원이 턱없이 부족하고 세금을 많이 뜯어간다고 불만을 늘어놓았다. 그 어느 나라보다 예술과 문화가 잘 발달되어 있다고 생각했는데 의외였다.
그녀가 친구를 찾으러 간 사이, 많은 인파에 섞여 우리는 서로를 잃어버렸고 어쩔 수 없이 배가 고파진 나는 근처 레스토랑에서 식사를 하고 돌아왔다. 메뉴는 역시 Gambas al ajillo(올리브,마늘 소스 새우 요리)와 pimientos del padron(고추 튀김 요리) 너무 맛있었고 와인도 훌륭했다. 역시 까딸루냐는 미식가들의 지역임이 맞다.
다시 공연장에 돌아왔을 때 공연은 한창 열기를 띠며 막바지로 가고 있었고 젊은 스페인 여성이 노래를 하고 있었다. 처음 들어보는 노래였지만 반복되는 단어가 많고 음색이 묘한 중독성이 있다. 어느 새 밤이 되어 어둑해진 밤에 울려퍼지는 그 노래를 들으면서, 그에 취해 따라 부르는 지로나 사람들에 섞여서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나왔다. 형언할 수 없는 미묘한 기분이었다. 슬픔도 아니었고, 무언가 내 깊숙한 곳의 감정을 건드렸다. 건너편에는 기가 막히게 아름다운 색감으로 일몰하는 하늘을 배경으로 평화로운 성당 종탑이 펼쳐졌다.
하루 동안 정말 너무나 많은 일이 일어난 것 같은 기분이다.
<Girona 성당 종탑을 배경으로 하늘 석양질 무렵>
그날 밤도 한동안은 윗층에서 갖은 움직임의 소리가 들려오는 듯 했지만, 쓰러지기 직전까지 갔던 내 몸 상태 덕에 꿀잠을 잤다. 스페인 사람들은 밤 늦게까지 움직이지만 아침에는 비교적 조용하고 늦게 시작하는 덕에, 아침은 늘 내 의지대로 깨고 시작할 수 있었다.
종류가 많지는 않지만 양질의 치즈와 햄, 요구르트,빵 등으로 구성된 맛있는 조식을 끝내고 디카페인 커피 한잔을 내려 수영장 앞 작은 테이블에 자리 잡았다. 태블릿과 무선 키보드, 그리고 핸드폰으로 멀티 확인을 하며 1시간 정도 시간을 할애해 개인적으로 급하게 보내야 할 숙제를 끝냈다. 그 시간동안 더 시내를 돌아볼 수 있었으면 했지만, 여하튼 그래도 짧은 시간안에 끝내고 털어낼 수 있어서 기뻤다. 이제 남은 도심의 숨겨진 곳들을 더 탐방하고, 1시에 예약해 놓은 버스에 늦지 않게 도착해야 한다.
어제 못본 아랍인 목욕탕에도 다시 갔지만 정작 매표소에서 보니, 별 것 없을 것 같았고 더군다나 입장권이 필요하기도 해서 굳이 들어가는 것은 생략하기로 했다. 어제 그렇게 찾았던 것은 실상 그 아랍목욕탕 자체가 아니라, 현대 무용을 전공한 스페인여성과의 만남, 그리하여 지로나 마을 축제로 인도하기 위함이 아니었다 싶었다.
그렇듯이 인생에서 우리는 늘 무언가를 계획하고 염원해 찾아가지만, 자주 여정이 변경되거나, 우리가 목표했던 것은 기대했던 것이 아닌 경우가 많기도 하다. 어쩌면 목표 자체보다는 그것을 얻기 위해 부딪히고 만난 사람들 혹은 그 중간의 여정이 더 의미 있고 우리 안에 깊숙이 남겨지는 것인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