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달리기를 못한다.
중고등학교 체육시간에 태생적으로 운동체질이 아니라는 걸 일찍이 깨우쳐 버렸다. 그렇게 38년을 살아온 내가 한 달 전 무슨 바람이 불어 '경기수원국제하프마라톤'에 덜컥 지원해 버렸다. 이 사건의 시작은 일말의 호기심이었다.
일곱 살 터울의 남동생이 매년 마라톤을 즐겨하는 모습을 옆에서 지켜만 봐왔던 나였고 늘 헬스장을 같이 다니자는 남편의 제안에 나는 헬스는 체질에 맞지 않는다며 반듯하고 냉정하게 선을 그었다. 각자에게 맞는 운동이 있으니 나는 외길 요가인생으로 꾸준히 요가만 하겠다고 호언장담했다. 그러다 문득 달린다는 것이 궁금해졌다. 턱끝까지 차오르는 숨을 내뱉고 마시면서 두 다리에 의지해서 앞으로 나아가는 것. 그것의 매력은 무엇이기에 사람들은 그렇게 달리는 것일까. 달리기를 못하든 말든 일단 마라톤 대회 신청을 하면 달리게 되지 않을까 라는 호기심으로 신청했다.
경기수원국제하프마라톤은 5k, 10k, 그리고 하프로 총 3종류가 있다. 물론 나는 초짜 중에 초짜이고 궁금증에 시작한 일이기에 당연히 5k를 도전해보고 싶었다. 자신감이 없던 나는 경력자인 동생에게 이것저것 물어보고자 전화를 걸었다.
"마라톤 5k로 나가볼까?"
"누나... 5k는 초등학생도 뛰어. 기왕 할 거면 10k로 해!"
아니 5k랑 10k가 2배나 차이 나는데 무슨 옆동네인 것처럼 쉽게 말하네. 차암나. 투덜거리면서도 내 안의 쓸데없는 자존심이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기왕 하는 건데 한번 도전해 봐? 아니 초등학생도 뛴다는데 내가 못 뛰겠어? 해 봐? 응? 해?
이렇게 어처구니없게도 나는 10k를 도전하게 되었다. 그때가 바로 딱 마라톤 한 달 전이었다. 결제는 했고 시간은 한 달이 남았고 발등에 불이 떨어진 나는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호기롭게 10k를 뛴다고 했는데 과연 완주할 수 있을까? 아니 아니 완주가 문제가 아니었다. 꼴찌로 들어오는 건 아니겠지? 그날부터 온갖 걱정들이 나를 헬스장으로 향하게 만들었다. 처음부터 무리하지 말고 조금씩 늘려가라는 동생의 조언에 당장 그날부터 나는 러닝머신 위로 올라갔다. 처음에는 3k만 해보자는 마음으로 가볍게 걷다가 달리기 시작했다. 그런데 놀랍게도 고작 300m를 달리자 숨이 턱까지 차오르고 그만 뛰고 싶다는 생각이 내 몸을 더 무겁게 만들었다.
이렇게 쉽게 생각이 몸을 지배한다면 한 달 뒤 나는 10k를 완주할 수 없을 것만 같았다. 겁도 없이 10k를 한다고 객기를 부린 건 아닌지. 그래도 평생에 한 번쯤은 10k 마라톤은 뛰어보고 싶기도 한데. 기왕 하기로 마음먹은 거 열심히 해보자. 최선을 다해보고 그때 가서 정 안되면 포기하면 되지. 하지만 마음과는 다르게 절대 포기하지 않고 최선을 다하고 싶다는 마음이 뛰면 뛸수록 강해지기 시작했다. 조금만 더 조금만 더 하는 버티는 마음으로 달리다 보니 8k, 9k로도 달릴 수 있게 되었다.
이틀에 하루씩 달리기를 3주가 되었을까. 이제 일주일만 더 열심히 달리면 10k를 완주하는 것은 물론이고 한 시간 안에 들어오는 것도 거뜬해 보였다. 그때의 내 마음이 거만했을까. 다리를 접질리지도 않았는데 갑자기 왼쪽 뒤 발목이 시큰하게 아파오기 시작했다. 심지어 달리지 않고 일상생활에서 걸어 다닐 때도 약간의 통증이 시작되었다. 혹여나 통증이 심해질까 봐 남은 기간 동안 찜질과 파스를 붙여가며 컨디션 조절을 했다.
매일 뛰어도 모자랄 판에 아직 10k를 한 번도 다 뛰어보지도 못했는데 기록을 줄이기도 모자란 시간에 쉬어야만 한다니 답답하기 그지없었다. 그때부터 힘들기만 했던 달리기가 그립고 아쉬웠다. 흠뻑 달리고 난 뒤 흘린 땀을 닦아내던 쾌감이 그리워 안달이 났다. 아 난 도대체 언제부터 달리기에 스며들었던 걸까. 이쯤 되니 마라톤을 위해 달린 건지 내가 좋아서 달린 건지 헷갈리기 시작했다.
아 사람들이 이래서 달리나 보다
드디어 마라톤 당일 날. 걱정되는 마음으로 몸을 풀고 많은 무리 속에서 출발음을 듣고 달리기 시작했다. 나를 앞질러가는 사람들 속에서 왼쪽 발목의 통증이 느껴지지 않는지 살피며 나의 페이스로 나아갔다. 너무 서두르지도 너무 느리지도 않은 속도로 3k, 5k를 달렸다. 습습하하 호흡을 가다듬으며 무사히 완주하고 말겠다는 마음으로 한 걸음씩 뛰었다.
그렇게 5k 반환점을 찍고 달리자 왼쪽 발목의 통증이 슬금슬금 올라오기 시작했다. 턱끝까지 차오른 숨에 한 번만 쉬었다 갈까. 통증을 참고 달려도 괜찮을까. 지금까지 안 쉬고 달렸는데 지금 쉬는 건 너무 아깝다. 조금만 더 참아보자. 작은 기대감과 버티는 마음이 모여 어느새 골인지점이 멀리 눈에 보이기 시작했다. 그래 조금만 더 하자. 조금만 더 하면 쉴 수 있어. 그런 내 마음이 보였을까. 결승점이 눈앞에 보이기 시작하자 옆에서 뛰던 사람들이 너나 할 것 없이 파이팅을 외쳐대기 시작했다. 마라톤 안전요원은 처음 보는 나에게 웃으며 하이파이브를 내밀기도 하고 여기저기서 아자아자 하는 기함소리가 메아리쳤다. 모두가 나에게 힘내라고 하는 것만 같았다.
공식기록 01:03:28.70
생각했던 것보다 기록은 좋았지만 아쉬웠다. 왼쪽 발목이 아프지 않았다면 1시간 안에 들어올 수 있지 않았을까. 이렇게 연습하다 보면 하프도 나갈 수 있지 않을까. 달리기의 매력이 이렇게나 무섭다. 거친 숨을 몰아쉬고 평안해졌을 때 밀려오는 아드레날린은 그 어떤 운동을 해도 느낄 수 없는 쾌감이다. 내가 드디어 해냈다는 성취감과 온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기분 좋은 땀이 최선을 다했다는 걸 말해주었다. 세상에 어떤 일을 했을 때 이렇게 온몸으로 결과를 보여주는 일이 또 있을까.
완주하고 받은 메달과 수십 장의 인증사진을 찍으며 나의 첫 번째 마라톤 도전기는 막을 내렸다. 왼쪽 발목은 조금 아프지만 잘 회복하고 다음 마라톤도 나가보고 싶었다. 기록을 앞당기고도 싶고 하프까지도 해보고 싶었다. 그런데 아픈 발목을 재활하기 위해 찾아간 정형외과에서 달리기에 부적합한 발목을 갖고 있다고 달리기 대신 자전거를 타는 건 어떠냐는 이야기를 들었다. 너무 아쉬웠다. 이제 막 달리기에 재미를 붙였는데 하지 말라고 하니까 더 하고 싶었다.
그 후로 한 달이 지났다. 나는 여전히 달리기에 목마르지만 내 발목을 위해 다른 유산소운동을 찾아보는 중이다. 달리기에 관심은 있지만 도전할 용기가 없는 사람들이 이 글을 본다면 당신은 좋은 발목을 가졌을지 모르니 한번 뛰어보라고 권해보고 싶다. 언제 또 이렇게 신명 나게 달릴 수 있는 날이 오겠는가. 달리지 않을 이유가 하나도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