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엔지니어의 에세이]<호안미로:여인,새,별>을 다녀와서

Joan Miró:Women, Birds,Stars @마이아트뮤지엄

by 채유

어딘가 다녀오거나 문화생활을 하게 되면 티켓이나 영수증을 모아서 티켓북에 정리를 하곤 한다. 스무 살부터 시작해서 지금이 다섯 권째, 10년어치다. 하지만 피곤하다, 시간이 없다는 인간적인 이유(라고 쓰고 핑계라고 읽는다)로 이벤트 직후에 바로 정리하는 경우는 많지 않았다. 올해 3월이었나, 식탁 한 구석에 쌓아 올린 이런 전리품들을 카페 가서 정리해야지~ 하고 가방에 한 데 담아놓고 나니 또 눈에 안 보인다고 자연스레 미뤄버렸다. 이렇게 모인 것들을 우연한 계기로 드디어 정리할 마음이 생겼는데, 풀어헤치고 보니 밀린 숙제가 무려 7개월치였다. 정말 뜻밖이었다. 나름 2021년도를 마무리하며 정리한 듯 시간 순으로 채워진 페이지조차도 작년 8월부터는 누구와, 어디서, 무엇을, 감상은 어땠는지에 대한 짤막한 코멘트도 없이 그저 증거물만 가지런히 꽂혀있었다. 뒤늦게 이것들을 정리하려고 하니 머리가 아팠다. 다행히 인스타에는 꽤 부지런히 사진을 올려서 구글 타임라인과 함께 참조해 조금씩 글씨를 써나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의 1년 치를 정리하면서 잊힌 기억 속 섬세한 감상, 느낌, 생각 등은 뭉뚱그릴 수밖에 없었다. 어딜 다녀오면 당일 혹은 익일에 부지런히 남기자라고 마음먹은 계기가 되었다.


어제는 마이아트뮤지엄에서 진행되고 있는 <호안 미로 : 여인, 새, 별>을 다녀왔다. 마이아트뮤지엄은 작년 이맘때쯤 앨리스 달튼 브라운 전시로 알게 되었는데, 이후에 샤갈 특별전도 다녀오고 다음 전시는 뭘까,하고 기다리다가 호안 미로의 작품을 보기 위해 다시금 방문하게 되었다. 사실 호안 미로는 알고 있던 예술가도 아니었고(물론 그 전 전시도 아는 작가라서 다녀온 것은 아니다…), 검색을 통해 본 대표작들이 너무 난해해서 마이아트뮤지엄 전시를 늘 같이 보러 가던 친구와 이번 건은 건너뛰기로 동의했다. 그런데 기존 방문객이 이전 전시 티켓을 지참하면 7월에 호안 미로 작품을 무료 관람할 수 있다는 이벤트를 보고 마음이 바뀌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시장에 들어갈 때까지도 호안 미로 작품들을 열정적으로 감상할 생각은 하지 않았다. 추상화는 어렵고, 예술 문외한으로서 공감대를 형성하기 어렵다는 지레짐작과 편견 때문이었다. '시간 낭비만 아니었으면 좋겠다!'라는 소소한 바람으로 전시회에 대한 기대 없이 전시장으로 한 걸음을 뗐다.


제목부터 알 수 있듯이 호안 미로의 전시에서는 여인, 새, 별을 포함하여 해, 달, 별자리, 사다리 등의 모티프를 어떻게 본인만의 감성과 상상력, 창의성으로 작품에 녹였는지를 감상할 수 있었다. 네 파트의 전시 구성은 대략 시간 순을 따르는데, 그로 인해서 변화하는 화풍과 새롭고 도전적인 시도, 예술가적 창조에 대한 고찰을 감상할 수 있었다. 솔직히 첫 번째 섹션과 두 번째 섹션의 회화 작품을 감상할 때는 너무나도 단조롭게 축약된 형태로부터 감흥을 얻지 못했다. 심지어 마치 말년에 조현병을 얻었다고 알려진 루이스 웨인(Louis Wain)처럼 정신병을 가진 것은 아닌지 의심할 정도였다….


그런데 두 번째 섹션의 처음에 진열되어 있던 영상을 보고 나서 그림에 대한 이해도가 높아졌다. 그림 속 상징과 배경, 작품 의도를 해설해주는 치트키였던 것이다. 특히 '새'가 갖는 상징성이 공감이 되면서 재미를 찾을 수 있었다. 지상과 천상의 연결과 조화, 속세로부터 자유로움, 전쟁과 고된 현실로부터 벗어나고 싶은 갈망 등이 함축적으로 담겨 있었다. 다른 대표 모티프인 '여인'은 미로의 인터뷰에 따르면 '피조물로서 여자가 아니라 우주를 말한다(원문: What I call woman is not the creature woman, it is a universe)'라고 한다. 인간을 구성하는 46개 염색체 중 하나의 차이로 다른 신체적 특징을 지닌 여자들을, 예로부터 남자들은 미지의 존재로 생각했다. 때로는 정복의 대상이 되었으며 숭배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그런 만큼 여인이 미로의 우주론의 한 축을 담당하고 있다는 것은 별로 놀라운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작품에 숨겨진 음계처럼 떠다니는 글자, 단어, 자필로 쓰인 시 구절 등은 영상 설명이 아니었으면 눈치채지 못한 요소였다. 그리고 초기에는 작품의 제목이 그림의 시작점이었다가, 나중에는 그림으로부터 파생된 제목이 붙여졌다는 부분이 매우 흥미로웠다. 마지막 섹션 이후 호안 미로의 일대기를 정리해놓은 공간에 있던 영상에서 그가 시를 통해 영감을 얻었다는 것이 강조되었는데, 나는 작품을 먼저 감상하고 제목이 뭔지 들여다보기 때문에 작품의 마침표가 제목이 됐다는 부분이 인상 깊었다. 그리고 하양, 노랑, 빨강, 검정, 파랑 등의 원색으로 채색된 회화 작품이 뜻밖에도 고도로 계획된 표현이며, 완성된 구도와 완전한 평형을 이루기 위해 작품의 종지부를 찍기까지 최대 10년까지도 소요됐다는 점이 매우 놀라웠다. 전혀 그렇게 보이지 않았다! 미로의 여러 가지 창의적인 시도 중에 하나로, 붓을 빨 때 쓴 물을 배경으로 깔고 그 위를 교차하는 굵은 검은색 선과 원색의 붓질을 칠하는 것이 있었는데, 이러한 우연적 효과를 강조하면서도 자신만의 완전성을 추구했다면 작품을 완성하기까지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을 것 같다….


전통적인 회화를 벗어난 호안 미로의 다양한 시도는 주로 세 번째 섹션에서 감상할 수 있었다. 산책 중 주워 온 사물들을 조합하여 만든 오브제와 천과 노끈 등을 활용해서 만든 태피스트리, 시장에서 사 온 다른 화가의 작품에 본인의 상징을 덧대어 그린 그림 등이 있었다. 작품 의도가 이해되지 않아 제목과 작품 형태를 비교해서 나름 '제목스럽게 보이는군' 이렇게 납득하고 빠르게 넘어갔다. 나중에 도슨트 해설을 듣고 머리를 탁 쳤지만. 미로는 회화의 한계를 극복하고자 일정 기간 동안 색다른 재료를 활용하는 것에 매진했는데, 이때 재료가 된 사물들은 본 기능을 잃고 작품의 일부가 되어 새로운 의미가 부여된다는 점이 포인트였던 것이다. 확실히 이러한 오브제는 거칠거나 매끄러운 질감과 강조된 색감 등으로, 2차원적인 그림과 달리 3차원의 공간에서 부피/무게/온도 등을 느낄 수 있다는 점을 깨달을 수 있었다. 슬며시 다음에는 현대 설치 미술에도 도전해볼 수 있겠는걸? 하는 생각이 들었다.


개인적으로 어떤 인물에 대한 서사는 별로 좋아하지 않는 편인데, 확실히 작품을 감상할 때는 그 일면이 작품을 깊이 이해하는데 도움을 주는 것 같다. 네 번째 섹션부터는 도슨트와 발맞추어 작품을 감상했는데, 전달력과 해석에 제작 배경까지 덧입혀지니 혼자 한 바퀴 돌았을 때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볼 수 있고 느낄 수 있었다. 마지막 섹션에서라도 해설을 들을 수 있어서 다행이라는 안도감이 들었을 정도였다. '회화의 암살'이라는 단어와 4개 연작으로 배치된 몬로이치 그림의 해석은 도슨트가 아니었다면 이번 전시에서 접하지 못했을 것이다. 우리의 일상에서, 삶을 살아가며 호안 미로를 찾아볼 수 있을 것이라는 암시도.


'우리가 접하는 기호와 상징은 어디에서 기원한 것일까? 그리고 위대한 예술가의 추상화가 우리의 일상에 얼마나 영향을 미쳤을까?' 첫 번째 섹션의 첫 그림을 보면서, 마지막 네 번째 섹션의 마지막 그림을 보면서, 마치 수미상관으로 관통하는 궁금증과 통찰이었다. 각각의 물음표는 전시 관람을 막 시작한 백지장인 머리로 내가 떠올린, 호안 미로의 그림과 역사에 통달한 도슨트가 관객들에게 던진 질문이다. 첫 그림을 감상할 때 발견한 *이 별을, m이 별자리를 의미하는 것 같은데 호안 미로가 m을 먼저 별자리 상징으로 쓴 것인지, 별자리의 상징이 먼저 쓰이고 나중에 호안 미로가 그림에 쓴 건지 궁금했다. 그리고 도슨트가 마지막 그림을 설명하며 kb국민은행의 k 심볼에 입힌 *을 보여주며 추상화가 일상에 미친 영향에 대해 생각해보라는 문장이 기가 막히게 수미가 상응한 것이다. 쪼렙의 순수한 의문점과 만렙 전문가가 던지는 질문의 맥락이 이어질 수 있구나! 설레고 두근거리며 흥분되는 경험이었다. 막연히 어렵게 느껴지던 추상화가 친근하고 정겨우면서도 알쏭달쏭하고 쉽게 채워지지 않는 호기심을 불러일으키는 재미있는 분야라고 느껴졌다.


평소 갖고 있던 추상화의 높은 벽이 마음속에서 허물어지는 진귀한 경험을 할 수 있었던 <호안 미로 : 여인, 새, 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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