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혜우혜우 Dec 20. 2021

빗금 사이의 때를 포용하기

안도현, <<능소화가 피면서 악기를 창가에 걸어둘 수 있게 되었다>>

안도현 <<능소화가 피면서 악기를 창가에 걸어둘 수 있게 되었다>>, 2020, 창작과 비평


    

 어쩌면 우리는 각자만의 방식으로 스스로 고립된 세계에 살고 있는지도 모른다. 문학도 예외는 아니다. 좀 더 ‘문학적인 것’, 좀 더 ‘시적인 것’이라는 틀에 스스로를 가두고 문학한다는 자부심으로 버티느라 정작 나 자신과 주변의 평범한 것들을 둘러보는 데에는 소홀하지 않았을까? 그래서 시집 <<능소화가 피면서 악기를 창가에 걸어둘 수 있게 되었다>>의 시적 주체들은 사기그릇의 “빗금의 때가 그릇의 내부를 껴안고 있었다”는 사실을 뒤늦게야 알고 “그동안 금이 가 있었는데 나는 멀쩡한 것처럼 행세했다”라고 고백한다.(「그릇」) 마당에 연못을 들이기 위해 흙무더기를 팠더니 “허공이 땅속에 숨어 있었다는 걸 알았고요 내가 발자국 새기며 걷던 자리가 바로 허공의 둘레였다는 것도 뒤늦게 알았지요 그 둘레는 하물며 날카로웠어요”라며 천진하게 말하기도 한다. 이러한 발화는 살아가면서 하나를 지키느라 잃어버린 다른 일상들에 대한 반성이자 아직은 사라지지 않은 나머지 것들을 무심코 흘려보내지 않으려는 삶에 대한 태도로 읽힌다. 다른 한편으로는 안도현 시인의 ‘시적인 것’에 대한 고민과 회의가 반영된 서술이기도 하다. 화려하고 기술적인 수사법으로 혹은 이념으로 무장되어 사실보다 훨씬 복잡하게 보이는 시도 필요하다. 보이지 않는 진실과 위험을 고도의 은유로 함축해서 독자의 현명함과 상상력을 활성화하는 과정은 중요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보이는 것들에 대한 소박하고 성실한 탐색의 시선 또한 균형 있는 삶과 시 읽기를 지탱하는 한 축이 된다. 이러한 관점에서 <<능소화가 피면서 악기를 창가에 걸어둘 수 있게 되었다>> 는 시집 제목은 매 순간 약동하는 ‘젊음의 아름다움’보다는 세계를 넉넉하게 품어주는 원숙미가 엿보인다. 굳이 창가에 내 재능을 뽐낼 수 있는 악기를 일부러 걸어두지 않아도 때가 되어 능소화가 피면 창가에는 자연스럽게 악기가 걸린다는 의미가 전달되기 때문이다.  

 이 깨달음을 얻기 전까지 그는 “꽃밭과 꽃밭 아니 것의 경계로 삼으려고 돌을 주우러 다닐 때” “남의 집 됫박만 한 주춧돌에도 눈독을 들였어라”(「꽃밭의 경계」)며 당시의 자신의 심사를 한심하게 생각하지만 그렇다고 섣불리 그러한 과거를 부정하지도 않는다. 어느 노래 가사처럼 ‘지나간 것은 지나간 대로 다 그런 의미가’ 있을 수 있다. 진정한 성숙이란 지우고 싶은 과거를 잊고 새로운 삶을 시작하려는 의지보다는 과거와 현재를 있는 그대로 포용하여 자신과 세계를 받아들이는 다음과 같은 넉넉함이다. “꽃밭과 꽃밭 아닌 것의 경계는 다 소용없는 것이기는 하지만/경계를 그은 다음에 꽃밭 치장에 나서는 것도 나쁘지 않은 일이라고 결론을 내렸어라”(「꽃밭의 경계」) ‘경계를 긋는’ 과오와 시행착오는 누구나 흉중에 가지고 있을 법한 “골짜기와 연못의 심상”이다. 이 심상은 훗날 “당신의 숨소리를 받아 내 호흡으로 삼을 수”있는 “연못의 감정”으로 숙성되어 타자와 세계를 연결하는 기반이 된다. 또한 안도현은 그 “연못의 감정”을 벗어난 ‘환상’과 ‘허구’로는 시를 쓸 수 없다는 사실을 주시한다.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누이를 만들어서 “누이야, 이렇게 시작하는 시를 쓰면/우리 애들과 조카들이 좋아할 것”(「안동」) 같았지만 환상에 취한 황홀한 비상의 시간이 끝나면 그는 “가출한 아버지는 삼십 년 넘게 돌아오지 않았고” “어머니는 자궁을 꺼내 내다 버린” “누구도 폐허에서 빠져나가지 않았”던 “안동시 평화동 낡은 아파트”를 대면해야 하기 때문이다. 결국 “누이야”로 시작하는 ‘시는 한 줄도 그에게 오지 않았지만’ 걱정할 필요가 없다. 대신에 그는 “소주를 어두운 배 속으로 삼켜야”하는 현실에 대해서는 넉넉하고 막연한 비상에는 침착할 줄 아는 삶의 연륜을 얻었기 때문이다.

 경험과 연륜에서 비롯된 삶에 대한 균형감 있는 시각은 시의 소재를 선택하는 데 있어서도 그에게 여유로움을 부여한다. 수치, 고독, 가족이라는 익숙한 현실의 갈피들을 “가슴과 손끝”으로 예리하고 능숙하게 다룬다. “고독한 체하지 마라 고독에 대해 쓰지 마라 제발 고독이라는 말을 시에다 쓰지 마라”(「시창작 강의」)라는 문예반 선배들의 조언이 아니더라도 어쩌면 내 주변에 가장 가까이 있었던 소재이기에 피하고자 했던 소재들을 다루는데 편하고 유연해진 것이다. 그는 “세상의 풍문”이라는 그물에 걸리지 않고 굴곡 있는 감정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애써 균형을 유지하며 ‘자연스러운 미소’를 짓는 데 성공한 듯 보인다. 성숙의 아우라는 자신을 해명할 필요가 없다. “나는 대열에서 이탈해 스스로 무덤이 되어본 적이 없었다/나는 한 번도 공허 속으로 홀연히 사라진 적이 없었다”(「수치에 대하여」)고 자신의 수치에 대하여 담담하게 풀어놓는 행위와 「임홍교 여사 약전」이라는 그 어떤 비유나 상징을 첨가하지 않은 사실적인 기록 형식의 어머니에 대한 시가 그것을 증명한다. 자신과 세계 사이에 어떤 이물질도 용납하지 않는 방식도 숭고한 삶이지만 ‘빗금 사이에 껴있는 때’를 포용하는 것도 성숙한 삶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의 귀뜸을 유념해서 참고할 필요가 있다. “길가에 핀 꽃을 꺾지 마라/꽃을 꺾었거든 손에서 버리지 마라/누가 꽃을 버렸다 해도 손가락질하지 마라”(「귀뜸」)      

작가의 이전글 눈을 감고 산책하기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