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j의 얼굴을 마주했다. 그전보다 더 슬픈 눈을 한 채로 서 있는 j를 단번에 알아볼 수 있었다. 초점을 잃어버린 사람 같았다. 우리는 짧고 간결한 인사를 나누고 정적을 유지하며 신논현의 한 카페로 자리를 옮겼다. 2,3층의 공간을 둔 카페였는데 북적이는 2층과는 달리 3층의 공기와 분위기는 2층과는 사뭇 달리 적막하고 고요했다. 안락해 보이는 소파에 약간의 거리를 두고 앉아 숨소리와 어색한 표정으로 만무한 정적을 이어갔다.
먼저 정적을 깬 건 j였다. 말하고 싶은 것이 있어서 만나자고 한 거 아니냐고 다 말하라며 내게 물었다. 맞다, 묻고 싶은 것도, 말하고 싶은 것도 태산처럼 쌓여서 나를 짓누르고 있었으니까. 근데 그 많던 물음표를 달고 있던 모든 태산들이 j를 마주한 순간에 물 만난 드라이아이스처럼 뿌연 안개를 연신 내뿜으며 사라지는 것이 아니겠는가. 미웠던 감정, 애탔던 마음, 그 외 모든 얽히고설킨 감정들과 마음들을 큰 고래가 삼켜버린 것처럼. 마주한 순간에 나는 왜 반갑고, 좋았는지. 싫은 감정들은 어디로 날아가버린 것인지. 가을바람에 바스러지는 낙엽처럼 애증의 감정들이 이리도 쉽게 부서지고 흩날리는 것들이었나. 내가 가진 모든 무거운 감정들의 해결책은 당신이었다. 당신을 더 일찍이 보았어야 했다. 당신도 나를 진작에 찾았어야 했다. 우리가 다른 배를 타고 흩어지기 전에 서로 바다로 몸을 던져 서로를 찾았어야 했다. 우리는 어떤 희생이 그렇게 두려워 영영 떠나버린 것인가.
그렇게 말을 고르고 고른다고 내뱉은 문장은 '잘 지냈어?'였고 그가 말을 이어가기도 전에 잘 지내지 못했을 것이란 걸 누구보다 더 잘 아는 나였기에 '이렇게 말하면 잘 못 지냈다고 말할 거란 거 알고 잘 못 지내고 있다는 것도 알아.'라고 말을 이어 붙였다. 곧바로 '인사부터 다시 할까?'라며 말을 건넸다. j는 아까 만나서 하지 않았냐며 대답했고, 나는 '한번 더 제대로 하는 거지.' 라며 어정쩡하게 악수를 건넸다. 솔직히 그런 식으로라도 손을 잡고 싶었다. 누군가의 손을 잡고 싶을 때 나는 장난스레 악수를 건네며 손을 잡곤 했다. 상대도 부담스러워하지 않고 쉽게 작은 스킨십을 청할 수 있는 방법이었다.
조금씩 입을 떼며 그간의 이야기들을 서로 다 토해냈다. 그제야 모든 의문이 풀렸고, j와 나 사이의 얽히고설킨 실타래를 돌고 돌아 힘겹게 풀 수 있었는데 중간에 j가 내게 건넨 이야기 하나가 내 몸을 모두 얼어붙게 했다. 너는 사람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지 않냐며, 많은 사람들이 좋게 봐주고 힘들 때 위로를 건네주지 않냐며 자기는 위로해 줄 사람이 아무도 없다고 내가 부럽다고 했다. 나는 그 말이 너무나도 큰 상처였다. 그 말에 얼어붙어 아무 말도 하지 못했고 지금에서야 떠오르는 이야기를 말하지도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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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에게.
j 언젠가 나의 상황을 이해하게 되는 순간이 오거나 혹은 나의 글을 읽게 된다면 좋겠어. 나를 위로해 줄 사람이 많다고 했잖아. 맞아, 아마도 내가 힘들다는 걸 말하면 꽤 많은 위로를 받을지도 모르겠어. 근데 나 이런 무거운 이야기 아무나한테 잘 못해. 아마 안 할 거야. 또 하게 된다더라도 그 위로가 내게 어떻게 와닿을지 생각을 해보았어? '사랑해'라는 말을 들으면 기분 나쁘지 않지, 되려 좋을 거야. 근데 사랑하는 사람에게 듣는 '사랑해'와 나를 잘 모르는 사람에게 듣는 '사랑해'가 같을 수 있을까. 의미와 깊이부터가 다른 걸. 한숨이 왜 한숨이겠어. 똑같은 숨인데 그 한숨이 내포하는 무게부터가 다르잖아. 그런 거야. 모든 위로가 위로인 채로 내게 머무는 것도 아닌 거야. 나는 그 힘든 순간에 j에게 위로받고 싶고 안기고 싶었어. j는 슬픈 건 나누면 배가 된 다했지. 그 말을 들은 나는 절망을 나누어서 절망이 아닌 게 되었으면 좋겠다고 한 것이 생각이나 날지 모르겠지만 오랜만에 만난 j는 여전히 슬픈 건 나누면 배가되고 극복했을 때나 반이 되는 거라 했지. 어쩌면 일리가 있어. 근데 나는 j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모든 사람과 대등하기 싫었어. 특별하고 싶었어. 슬픔을 나눌 수 있는 사람이고 싶었어. 그리고 j가 힘들 때 힘이 될 수 있는 사람이고 싶었어. 이 마음을 헤아려 줄지는 모르겠지만 난 그랬어. 오히려 연락이 없는 그 시간이 나는 더 힘들었어. 매일을 울었으니까. 나는 매일 밤을 그렇게 깊이를 모르는 대양을 흘렸어. 어차피 힘들 거라면 j의 힘듦을 함께 마주하는 편이 어땠을까 싶어. 만약 내가 j의 상황이었다면 나는 j에게 말했을 거야. 기대고 싶다고, 그래도 괜찮겠냐고, 힘들면 지나쳐도 된다고 말이야. 적어도 선택할 수 있는 기회는 주었을 거야. j는 내게 최소한의 선택도 주지 않은 채 가버려서 나는 기약 없는 기다림을 해야 했어. j가 다른 사람을 만나 또 다른 우주를 공유하게 된다면 그때는 상대에게 최소한의 선택의 여지를 줄 수 있기를 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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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와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시간은 쏜살같이 지나갔고, 우리는 금세 긴장이 풀려 이전의 우리처럼 간간히 웃기도 하고 장난을 치기도 했다. 카페를 나와 작은 포옹을 하고, 버스를 탄 j가 창문가에 앉아 입 모양으로 무언가를 말하자 나는 갸우뚱 몸을 기울였고 조금 더 크게 '잘 있어'라는 입모양을 했다. 그렇게 우리는 제법 애틋한 이별을 했다.
서로가 서로의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j에게 카톡이 왔다. 네가 이제 나를 잘 살게 하는 게 슬프다고, 만나서 울음을 참으며 말하던 네 모습도 슬펐다고. 이 말이 너무 아프고 또 좋았다. j가 잘 살았으면 좋겠다. 부디 얼른 잘 살아냈으면 좋겠다.
집에 도착한 j에게서 편지를 잘 읽었다며 또 카톡이 왔다. 나는 자주 j에게 편지를 하곤 했다. j에게 편지를 받아 본 적은 없는데, 말로 다 하지 못한 문장들과 마음을 적어서 주는 것이 좋았다. 원래에도 편지를 자주 쓰는 편이지만 유독 j에게는 더 많이 편지를 했던 것 같다. 자주 만나지 못해서 더욱 그랬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이 관계가 더 애틋했던가. j는 많이 그리울 거라고 했고 그렇게 연락은 끊겼다.
아픔 없는 사랑, 괴로움 없는 사랑은 없다지만 이건 너무 하지 않은가 싶었던 관계에도 막이 내린 기분이다. 실은 잘 모르겠다. 언제고 돌아올 것 만 같다. 언젠가 다시 그 사람을 마주 할 것 같다. 그냥 그런 예감이 든다. 연인으로서가 아니더라도 언젠가 우리는 꼭 다시 만날 것만 같다.
잘 살고 있어 j.