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인상주의’의 등장, 쇠라

by 노인영

후기 인상주의, 당사자들로서는 듣기 거북한 명명이다. 이들을 관통하는 공통적인 특징이 없기 때문이다. 인상주의가 천착했던 물리적인 현상에서 벗어나 각자 작품 세계를 고집스럽게 추구했던 것밖에. 하지만 결과적인 면에서 현대 미술에 대한 영향력은 오히려 전기 인상주의자들보다 컸다. 조르주 쇠라(Georges Pierre Seurat, 1859~1891)로부터 시작되었다. 1886년 창립 멤버인 모네와 르누아르가 불참한 가운데 인상주의 마지막 ‘제8회 전시회’가 라피트 가(街)의 유명한 음식점 ‘메종 도레’ 3층에서 열렸다. 마찰을 빚었던 ‘인상주의자’, ‘재야파’라는 단어 모두 배제되었다. 모리조, 기요맹, 고갱 정도가 인상주의적 요소를 보여준 가운데 이 전시회의 진정한 주인공은 피사로의 추천으로 참여한 쇠라였다.


<그랑드 자트(그랑자트) 섬의 일요일 오후(1884~1886)>

그의 출품작 <그랑드 자트섬의 일요일 오후>는 맑은 여름 어느 날, 파리 북서쪽 근교에 있는 센강 하류의 작은 섬에서 휴식을 즐기는 시민들의 모습을 담았다. 그랑자트 섬은 오늘날 파리시 중심에 위치하지만, 당시에는 기차를 타고 일부러 찾아가야 했다. 따라서 산업화가 진전되면서 휴일 개념이 막 생기고 있을 때의 모습이다. 햇빛을 피해 우산을 쓰고 산책하거나, 그늘에 앉아 쉬는 일상의 풍경이다. 전체적으로 인물들의 형태가 독특하다. 대부분 허리가 곧게 편 옆모습이다. 전체적으로 운동감이나 개성, 그리고 결정적으로 사람간 대화가 없다. 모두 색의 표현에 공을 기울이다가 보니 나타난 현상이다. 쇠라는 가깝고 먼 정도에 맞추어 인물을 비례적으로 그리지 않았다. 원근법 역시 거칠어진 것이다. 대신 밝은 잔디에 어두운 그늘을 교차하여 소실점을 만들어내는 방식으로 원근법을 적용했다.

중경에 붉은색 우산을 쓴 여인과 손을 잡은 아이만이 정면을 바라보고 있어 중심 인물로 보인다. 하지만 오른쪽에 뒤가 과장되게 부푼 치마 '퀴 드 파리'를 입고, 양산을 받쳐 든 여인이 눈에 띈다. 원숭이는 그녀가 거리의 여성이며, 부르주아를 흉내 냈다는 암시다. 그녀가 팔짱을 끼고 있는 남성은 중산모를 쓴 채 시가들 들고 지팡이를 옆구리에 꼈다. 당시 산책을 즐기는 남성들의 전형이다. 전시회 시작 전부터 이 작품에 관한 소문으로 호기심을 촉발했다. 엷은 노란색의 일광, 갈색 그림자, 파란색 하늘, 게다가 목걸이를 두르고 꼬리가 3야드나 되는 원숭이에 관한 이야기로 무성했다. 신인상주의라는 말도 시냐크의 친구이자 비평가인 펠릭스 페네옹이 이 작품을 보고 처음 붙여준 이름이다. 그는 새로운 ‘과학적 인상주의’가 ‘자연주의적 인상주의’를 대체했다고 선언했다.

미셀 외젠 슈브뢸의 <색상환(1861)>

쇠라는 이 작품을 위해 2년에 걸쳐 20점 이상의 소묘와 40점 이상의 색채 스케치를 했다고 한다. 꼼꼼하고 인내심 강한 그의 특성이 유감없이 발휘되었다. 사실 빛의 변화에 따른 색채의 분할은 19세기에 이르러 이미 많은 화가에게서 나타난 경향이다. 화학자 미셸 외젠 슈브뢸의 색채 이론, 특히 <색의 동시대비 법칙(1839)>이 들라크루아 작품에 큰 영향을 미쳤다. 물감을 섞으면, 빛이 혼합할 때와는 다른 색채 효과가 나타난다. 색이 탁해지는 이른바 감산혼합이다. 슈브뢸은 탁한 염료에 대한 문제를 해결하고 선명한 색을 만들고자 고블랭 태피스트리 공장에서 염료의 색채와 명도를 연구했다. 염료에는 이상이 없었다. 따라서 그는 선명했던 태피스트리의 원색이 함께 짰을 때 발생하는 시각적 효과에 주목했다. (스텔라 폴, <컬러 오브 아트>) 이어 비평가 샤를 블랑의 <선화의 기법>이 출간되었다. 인상주의 화가들도 물감의 섞지 않고 원색의 물감을 배비하는 효과를 실험했다.

쇠라는 들라크루아의 <탄지르의 광신자들>에 감동을 하면서도 자신이 본능에 의지하고 있음을 안타까워했다. 슈브뢸과 미국 물리학자 오그던 루드의 <현대 색채론(1879, 프랑스어 번역본 1881)>, 그리고 H.W. 도브의 과학 이론에 기초하여 작업하기 시작했다. 색이 음악처럼 훈련할 수 있는 고정적 법칙의 통제를 받는다는 생각에 매료되었다. 색채가 주위 색에 영향을 받아 달리 보인다는 사실에 주목하면서 물감이 아니라 눈에서 색이 섞이는 효과를 노렸다. '시각적 혼합'이라 한다. 색채의 사용법과 특히 보색 효과를 꼼꼼히 메모했다. 보색 관계, 어려운 개념이다. 두 가지 색채를 나란히 배열하면 그 차이점이 크게 나타난다. 특히 보색일 경우 그 색채 효과가 가장 두드러진다. 색채환에서 마주 보고 있는 반대색이며, 빨강-녹색, 파랑-주황, 노랑-보라의 관계라는 정도만 이해하자. (좀 더 자세한 이야기는 별도의 ‘색채론’에서 언급할 예정이다) 그는 색이 탁해질 것을 우려하여 물감을 일일이 찍어 그렸고, 그 혼합은 망막에 맡겼다. 자신은 이를 ‘색채 광선 주의(색광 주의)’라 불렀다. 색채를 섞지 않고 나누어서 칠한다는 의미로 분할주의, 또는 점을 찍는다는 뜻으로 점묘법으로 불렸다.

<아스니에르에서 물놀이하는 사람들(1884)>

쇠라의 분할주의는 많은 노동력이 필요하다. 따라서 작품 완성에 장기간이 걸렸다. 그래서 야외에서 스케치한 후 화실에 돌아와 캔버스에 옮겨 그리는 방식을 택했다. 철저한 사전 작업으로 구도를 인위적으로 재구성했으며, 과학적인 분석을 통해 색채를 결정했다. 이전에 완성한 분할주의 작품 <아스니에르에서 물놀이하는 사람들>에서부터 나타난 현상이다. 인상주의의 감각적 순발력을 포기하고, 퓌비 드 샤반(Puvis de Chavannes, 1824~1898)의 벽화 개념과 기법에 천착했다. 작품 속 등장인물들이 실제 같이 있지 않았으며 쇠라의 기획에 의해 구성, 편집했다. 인상주의의 자유는 사라지고 엄격한 형식에 갇혀버렸다. 그러나 작품은 살롱전에서 거부되었고, 같은 해 낙선자들이 창설한 재야 미술가 협회에서 개최한 무심사 제1회 전시회(앙데팡당전, Independant)에 출품했다.


시냐크의 <아침 식사(1886~1887)>

1885년 시냐크는 기요맹의 화실에서 피사로를 만났다. 시냐크는 열여섯 살 때 제5회 인상주의 전시회에 나타나 작품들을 모사하다 고갱으로부터 제지를 당했던 바로 그 소년이었다. 그의 대표작 <아침 식사>는 그가 존경했던 모네와 기요맹의 영향을 발견할 수 있다. 그는 1884년 앙데팡당전에서 쇠라의 가로 10, 세로 7m의 <아스니에르에서의 물놀이>를 주목했다. 그리고 쇠라와 경험을 공유하면서 <그랑드 자트섬의 일요일 오후>와 분할주의의 완성을 도왔다. 그는 피사로에게 자신과 쇠라의 연구를 이야기했고, 그의 아들 뤼시앵, 고흐, 고갱. 특히 훗날 색채를 해방하는 야수파의 선구자가 되는 앙리 마티스가 받아들였다.

인상주의 수호자인 피사로의 동참은 기대 이상이었다. 점묘법이 매력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작가의 차별성을 구분하기가 어렵다. 인상주의 마지막 전시회에서도 관람객과 평론가들은 쇠라와 시냐크, 그리고 피사로 부자의 그림을 구별할 줄 몰랐다. 이 점에서 자부심이 강했던 쇠라는 늘어나는 추종자를 “겉으로만 따라 하는 흉내”라며 평론가 아르센 알렉상드르에게 내심을 드러냈다. 그러자 알렉상드르는 ‘신중하지 못한 동료’들로 인해 쇠라의 친권을 빼앗아 갔다고 말했다. 사실상 분할주의의 이론가 역할을 했던 시냐크는 흥분했고, 피사로는 자제하라고 타일렀다. 그러나 피사로가 먼저 그들의 모임에서 발을 뺐다.

<서커스(1890~1891)>

색의 조화가 선의 조화로부터 나온다는 과학적 미학을 믿었던 쇠라는 1890년 여전히 선의 배열 문제에 매달렸다. <펠릭스 페네옹의 초상(1890)>과 ‘분할주의의 정수’라고 불리는 <서커스>를 발표하여 약점인 생동감을 보완했다. 특히 <서커스>에서 인물의 동작과 표정이 과장되었고, 곡선과 사선이 많이 사용했다. 인상주의가 그간 무시해온 균형 잡힌 구도와 구성을 되찾고 윤곽선도 회복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1891년 앙데팡당전에서 기대했던 퓌비 드 샤반은 <서커스> 앞에서 발길을 멈추지 않고 지나쳐버려 쇠라를 실망하게 했다.

더욱 갑작스러운 일은 작품을 전시한 그달 말, 디프테리아 독감으로 인한 후두염으로 서른세 살 쇠라가 요절했다. 이어 13개월밖에 안 된 그의 아기도 죽었다. 죽음, 그 앞에선 모든 것이 허망해지는 법이다. 쇠라가 평생 동안 간직했던 <그랑드 자트 섬의 일요일 오후>도 사려는 사람이 없었다. 결국, 1924년 미국인 프레더릭 클레이 바틀릿에게 2만 달러에 팔린 후 1926년 시카고 아트 인스티튜트에 기증했다.

시냐크, <아비뇽의 파팔궁(1900)>

이후 점묘법을 대표하게 된 인물은 폴 시냐크이다. 하지만 미망인이 된 마들렌 크노블로슈가 와전된 소문을 퍼트리며 사냐크의 노력을 폄하했다. 1891년 6월 말 사냐크는 ‘패거리’와 결별했다. 결과적으로 쇠라의 죽음은 신인상주의의 종말을 가져왔고, 혁신성은 이어 가질 못했다. 1894년 11월 27일 시냐크는 일기에 과학에 대한 지나친 신뢰가 예술을 딴 길로 빠뜨릴 수 있다고 염려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자연에 대한 탐구가 우리를 마비시킨다. (····) 유감스럽게도 자연의 인상을 새롭게 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금세 단조로움에 빠지고 말 것이다.”


시냐크의 <아비뇽의 파팔궁>은 점은 마치 모자이크처럼 큼직해졌고, 색조에 많은 관심을 기울였다. 지나치게 미세한 점들로 인해 감정이 억제되고, 시간의 흐름이 정지된 듯한 느낌을 주지 않으려는 노력의 일환이었다. 인상주의에서 벗어나 독자적인 작품 세계를 구현한 과학적 색의 분할은 예술의 종착역이 될 수 없었다. 1900년 이후 화단에서는 다시 찾아보기 어려운 양식이 되고 말았다. 오히려 예술은 한 걸음 더 깊숙이 들어가 과학을 잉태한 철학이 되고자 고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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