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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인영 Jan 09. 2023

마크 로스코와 시그램 빌딩 벽화

<적갈색 위에 검은색(1959)>

화가란 어떤 존재일까? 그들에게 그림은 과연 어떤 의미일까? 이런 질문과 관련하여 가장 치열했던 화가가 바로 마크 로스코((Mark Rothko, 1903~1970)다. 그리고 가장 극적인 순간이 바로 ‘시그램 빌딩 벽화’를 그렸을 때였다. 그 역시 초현실주의에서 출발했으나 ‘액션 페인팅’에 대해서는 적대적이었다. 그래서 광휘를 띠는 채색과 달콤한 재료의 부드러운 접합을 이루며 추상표현주의를 거대한 크기로 자유롭게 구현했다. (장 루이 프라델, <현대 미술>) 작품은 그중 하나 228.6x207cm 크기의 <적갈색 위에 검은색>이다. 검은색 물감이 번지듯이 가장자리를 넘어 확산하는 특징이 잘 드러났다. 

그는 우여곡절 끝에 50대에 이르러 소위 그림으로 ‘먹고살 만한’ 지경에 이르렀다. 그러자 작품이 지나치게 대중과 가까워지는 것을 경계했다. 과연 대중이 자기 작품에 진지하게 몰입할 수 있겠느냐는 데에 불신이 컸기 때문이다. 그는 작품을 객지로 보내면서 제대로 대접받지 못할까 봐 눈물을 보이기까지 했던 화가였다. 자기 그림이 세상에 나가서 누리게 될 삶"에 관한 문제로 받아들였다. 결국, 로스코는 전시장 크기와 위치, 조명, 심지어 관람자와의 거리 18인치(45cm)와 인원수까지 제한했다. 또한 액자 없이 위압적인 크기의 작품을 대개 하나의 방에 낮게 걸어 전시했다. 작품의 크기도 무시할 수 없는 인지 효과가 발생한다. 작가는 작품 '밖'이 아니라 작품 '속에서 작업을 하게 된다. 뿐만 아니라 이젤 앞에서 작업했던 유럽 회화의 제작 방식에서 벗어나 미국 회화의 거친 생명력을 뿜어냈다. (정윤아, <미술시장의 유혹>) 그리고 로스코는 색채를 ‘배우’에 비유했는데, 배우의 말과 몸짓(시각 언어)을 이해하려면 반드시 이런 선제 조건이 필요하다는 주장이다. 따라서 그의 대형 작품 앞에 선 사람은 색채의 드라마를 생생하게 경험하게 된다. 

시그램 빌딩(사진 출처: wikipedia)

그의 작품가격이 2만 달러에서 6만 달러로 껑충 뛰게 되는 1958년이었다. 캐나다 주류회사 시그램은 미국 맨해튼 본사 1층 ‘포시즌’ 레스토랑 벽면을 장식할 최고의 작품으로 로스코를 원했다. 38층 규모로 주철 구조와 벽 전면을 판유리로 디자인한 시그램 빌딩은 그 자체가 건축사에서 신선한 충격을 준 건물이다. 독일 바우하우스 학장 출신 미스 반 데어 로에가 설계했고, "적을수록 풍부하다"는 그의 신조를 반영했다. 건물 외관에는 전혀 장식이 없고 순수성과 추상성이 강조된 건물이다. 그리고 빌딩 내부에 또 하나 놓쳐서는 안 될 볼거리가 바로 필립 존슨이 디자인한 레스토랑 '포시즌'이다. 미국의 건축가 루이스 칸의 말을 빌리면, '기품 있는 귀부인(시그램 빌딩)'이 입은 '화려한 속옷'인 셈이다. 여기에 피카소와 잭슨 폴록의 작품과 함께 벽면을 장식할 예정이었다. 2006년 당시 화폐가치로 200만 달러를 상회하는 어마어마한 금액이 책정되었다. 

한 끼 식사로 5달러 이상을 쓰면 부도덕하다는 입장이었던 그는 예술이 천박한 자본주의의 탐욕과 대결한다고 생각했다. 장식적인 그림을 싫어하는 그가 이 계약에 응한 이유도 ‘돈 좀 있다고 겉만 번지르르한’ 손님들에게 문화적 충격을 선사할 자신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의 그림 아홉 점은 지금 ‘포시즌’이 아니라 런던 테이트 갤러리에 걸려 있다. 로스코가 계약을 파기하고 선금 7,000달러를 돌려주었기 때문이다. 외면상 이유는 “그런 돈을 내고 그런 음식을 먹는 놈들에게 내 그림을 보라고 허락할 수 없다”고 화를 냈다고 한다. 하지만 실제 이유는 다른 데 있었다. 

폼페이 신비의 저택 중 <디오니소스 축제 재현 벽화 일부>

1959년 6월, 작품이 거의 완성되어 갈 때 그는 이탈리아 폼페이에 갔다. 그리고 서기 79년 베수비오 화산 폭발로 땅에 묻혀 있다가 18세기에 발굴된 로마의 벽화 <신비의 저택>을 보았다. 깜짝 놀랐다. 저택과 함께 경석과 화산재에 매몰되었던 벽화는 자신이 그렇게 멸시했던 쾌락이 숭고함으로 승화되어 있었다. 뉴욕으로 돌아와 막 문을 연 포시즌 레스토랑을 찾았다. 그 자리에서 로스코는 그곳 손님들의 입맛을 떨구게 할 공간으로 꾸밀 자신감을 잃었다. 결국, 작품의 순결을 지켜주기 위해 마지막 결단, 즉 계약을 파기했다. 대신 작품이 독자적인 공간, 그것도 자신이 좋아하는 터너의 전시실 옆에 걸리길 원했다. 지금 레스토랑 포시즌은 1950년대 그 스타일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스테이크와 램 찹(Lamb Chop) 맛이 여전하다고 하니 그 맛을 음미해 보는 것도 나름대로 의미 있다고 하겠다.

<무제, 일명 '피로 그린 그림'(1970)>

1970년 2월 25일, 맨해튼 작업실에서 두 팔을 벌린 채 손목의 동맥을 긋고 자살한 마크 로스코의 시신이 발견되었다. 그의 나이 65세, 의사는 부검 후 그가 항우울증 약에 중독되어 있었다고 말했다. 소품처럼 작게 그린 로스코의 유작 <무제>의 색채는 그의 붉은 피를, 그의 시신을 불태운 화장터 불길을 닮았다. 제자 올리버 스타인데커가 그날 아침 작업실에서 발견했다. 

1903년 러시아 드빈스키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난 그는 1913년 8월 오리건주 포틀랜드에 정착했다. 그는 예일대 장학생이었음에도 차별적인 사회에서 적응하지 못하고 먹고살기 위해 방황했다. 세상도 두 차례 세계대전을 겪으면서 비극적인 상황이었다. 그러나 미국인들은 거대한 소비 사회에서 무기력하기만 했다. 옆구리에 꽂힌 화살이나 뗏목에서 굶어 죽어 가는 구상(具象) 작품으로는 이 비극을 느끼기엔 한계가 있다고 보았다. 1925년경 모더니즘 회화에 빠져들었던 그는 1949년 뉴욕 현대미술관에서 마티스의 <붉은 작업실>에서 결정적인 영감을 얻었다. 전통적인 공간과 깊이를 모두 무시하고 붉은색이 화면 전체를 뒤덮은 그림이었다. 로스코는 강렬한 색채를 통한 감정 전달을 추구했다. 회화의 수단이었던 색이 작품 자체가 되었고, 인기를 끌기 시작했다. 

한편 니체의 처녀작 <비극의 탄생(1872)>에서 큰 영향을 받은 그는 철학자이기도 했다. 그는 작품을 통해 이성의 벽에 갇힌 현대인의 영성에 대한 갈증을 해소하려 했다. 마치 니체가 말한 ‘어린아이가 놀 때 보여주는 진지함’을 되찾아 주려 했다. 따라서 명성과 부가 더해지면서 경멸했던 기득권에 함몰된 자기 모습에 죄책감이 깊어졌다. 아내 멜(메리 앨리스 비슬)과의 결혼 생활은 파국으로 치닫고, 알코올 중독은 심해졌다. 평생 달고 살았던 담배는 결국, 심장과 폐 질환을 일으켰다. 자살하기 몇 달 전 폐기종과 동맥류로 인해 의사로부터 길이 60cm 이상 되는 그림은 그리지 않는 것이 좋겠다는 권고를 받았다. 세속적인 입장에서 보면 로스코는 성공한 화가다. 그런데 무엇이 그의 몸을 이렇게 피폐하게 만들었을까? 


<로스코 예배당(1964~1967)>

이즈음 대중의 마음은 팝아트로 쏠렸다. 난해한 아방가르드 예술을 멀리했다. 로스코는 당황했고, 일종의 배신감을 느꼈다. 그는 재스퍼 존스를 제외하고는 그들의 표현기법을 경멸했다. 그런데 미술관 공간에서 작품 가격에서 그들이 최고 대접을 받게 되자 아연실색했다. 그의 작품은 더욱 우울해졌다. 그래서 나타나는 스타일이 바로 검은색 화면이다. 그 대표작은 비극적으로 삶의 마침표를 찍은 이듬해인 1971년 텍사스 휴스턴에서 개관한 팔각 건물에 위치했다. 그가 온전히 기획한 <로스코 예배당>이다. 

그 건물 내부로 들어서면 묘의 내부인 듯한 어둡고 적막한 공간이 나타난다. 그곳에 로스코의 대형 그림 열네 점이 있다. 특유의 불타오르는 빛은 모두 사라지고, 대신 색면 경계가 반듯한 불투명한 검은색이 두드러진다. 밝음만큼이나 어둠이 가치 있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었을지 모른다. 그러나 단순한 검은색이 아니다. 밝음을 숨기고 있다. 딥 플럼(deep plums), 마론(maroons), 그리고 화려한 보라색이 은은한 저류처럼, 차분한 색 면을 덮은 베일처럼 드러난다. 검은색 양 날개 가운데 자주색 화면, 그 자주색은 뭔가 너그럽게 수용하는 듯 우리를 편안한 세계로 인도한다. 동양의 선(禪)이자 명상의 세계다. 이곳은 “모든 종교에 개방되어 있고, 어느 종교에도 속하지 않는 성지이며, 개인을 위한 사적인 기도의 장소가 되었다." 

<로스코 예배당>을 찾은 방명록에는 많은 사람이 다양한 감상담이 적혔다. 어떤 이는 꽉 차 있다고도 하고, 어떤 이는 텅 비었다고 하고, 또 어떤 이는 잘 모르겠다고도 한다. 그러나 기록의 대부분은 로스코의 그림이 지닌 외로움 또는 공허함으로 인해 눈물을 흘린 사람들이 쓴 것이라고 한다. 그의 색채 그림이 장식품 이상인 것은 분명하다. 이와 관련한 놀라운 일화가 있다. 1969년 4월 한 여인이 얼마 전 죽은 아들을 기리기 위해 로스코의 작품 한 점을 사려했다. 점찍어 둔 작품이 있었지만, 그곳에서 발견한 작품은 지나치게 밝은 빨강과 노랑으로 칠한 화려한 캔버스였다. 그림을 보던 여인이 몸을 벌벌 떨면서 갤러리 직원에게 말을 건넸다. 


“누군가가 그를 잡아줘야만 해요.” 


제인 딜렌버거라는 여성으로, 작품을 통해 그의 죽음을 예견했다. 더욱이 그녀는 1967년 11월 올드 파이어 하우스 스튜디오에서 로스코의 그림을 보고 작가 앞에서 눈물을 흘렸던 경험이 있다. 4.5m 크기의 캔버스에 거의 검은색 표면으로만 그려진 그림이었다. 그녀의 ‘절절한’(로스코가 즐겨 사용한 형용사이다) 반응은 로스코의 작품은 색 이상이라는 사실을 알려준다. 그는 색채를 도구로 인간의 근본적인 감정과 소통한다. (제목 그림: <무제 회색 위에 검은색(1969)>, 케이트 로스코 프리젤 컬렉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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