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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인영 Jan 05. 2023

데 쿠닝과 '네오 다다'의 라우센버그

로버트 라우센버그(Robert Rauschenberg, 1925~ 2008)는 추상표현주의 작품 <백색 그림(1951, 제목 그림)>을 그렸던 화가다. 스승 요제프 알베르스의 엄격한 ‘색채론’에 도전하는 작품이었다. 칸딘스키는 <예술에 있어서 정신적인 것에 대하여>에서 이렇게 말했다. 


“흰색은 가능성으로 차 있는 침묵이다. 그것은 젊음을 가진 무(無)이다. 정확히 말하면 시작하기 전부터 무요, 태어나기 전부터 무인 것이다.” 


말레비치의 검은색처럼 그의 백색 역시 극단적 순수를 상징한다. 그런데 2년 후 그의 단조로운 흰색 그림이 더러워졌다. 이 사실을 두고 그는 자신이 표현하고자 했던 본질이 무엇인지를 고민했던 듯하다. 결심한 듯 라우센버그는 그림들을 작업실에 놓고 조수들로 하여금 다시 칠하도록 했다. 추상표현주의에서는 자동기술법에 의한 미술가의 붓 작업이 중요하다. 반면, 그에게는 그것들이 무엇을 드러내느냐는 문제가 중요했기 때문이다. (토니 고드프리, <개념 미술>) 붓질은 누가 하든 개의치 않았다. 

라우센버그, <지워진 데 쿠닝의 그림(1953)>

같은 해 함께 블랙마운틴 대학 교수로 재직 중인 윌렘 데 쿠닝(Willem De Kooning, 1904~1997)을 찾아갔다. 라우센버그는 작품 과정을 역으로 하고 싶다고 말했다. 그림은 그리는 것인데, 지워 없애는 작업을 의미했다. 데 코닝이 이에 동의하여 그림 하나를 주었다. 라우센버그는 6주일 내내 고생해가며 그림을 지우더니 자신의 서명만 덧붙인 채 새로운 작품이라며 <지워진 데 쿠닝의 그림>을 발표했다. 그림보다는 ‘(지우는) 효과’가 작품을 구성한 것으로, 추상표현주의와 결별을 선언하는 행동이었다.

당시 데 쿠닝은 전 세계가 존경하는 대표적인 추상표현주의 작가였다. 네덜란드 출신으로 1926년 미국으로 밀항을 시도하여 불법 체류자 신분으로 살았다. 간판 제작, 목수, 디자이너, 쇼윈도 장식을 했다. 1930년대 경제 공황 시절에 연방 예술 정책에 힘입어 전업 화가로 공공건물의 벽화 작업을 했다. 맨해튼에서 작업실을 함께 썼던 아실 고르키에게서 큰 영향을 받았다. 추상보다는 표현주의에 가까웠던 그는 ‘비구상’과 주로 여성을 주제로 한 ‘인물화’ 사이를 끊임없이 오갔다. 


그는 잭슨 폴록과 같이 액션 페인팅을 선보였다. 이젤 앞에서 꼼짝하지 않고 몇 시간을 보낸 다음 캔버스에 달려들어 미친 듯 영감을 옮겼다. 그러나 폴록과 비교하여 매우 에너지가 넘치며 비속한 표현을 서슴지 않는 이질성을 나타냈다. 그리고 미약하게나마 실제 인물 또는 풍경이 나타난다. 1948년 봄에 열린 첫 개인전에서 대부분 흑백 추상화로 구성된 작품을 전시했으며, 특히 가을 <회화(1948)>에 사람들의 관심이 집중되었다. 그리고 1953년 봄, 뉴욕의 시드니 재니스 갤러리에서 첫선을 보인 그의 <여인> 연작이 예술계에 엄청난 반향을 일으켰다. 


데 쿠닝의 <여인 Ⅰ(1950~1952)>

특히 대표작 <여인 Ⅰ>에 평생 작업한 어떤 작품보다 많은 공을 들였다. 황소 같은 눈, 풍선처럼 부푼 가슴, 뾰족한 이빨, 게걸스러운 미소를 짓는 해골 같은 형상의 여인이다. 신화 속 여전사 같기도 하고, 20세기 중반 대도시에서 거친 삶을 사는 여성이 떠오른다. 하지만 두 눈을 감은 채 느끼는 무의식 미학의 극단이다. 데생이 뒤섞여 완성되지 않은 듯 보이는 작품은 형체가 아니라 색이 주는 강한 표현이 강조되었다. 그의 물감 다루는 방식은 샤임 수틴의 영향이 컸다. (케럴라인 랜츠너, <윌렘 드 쿠닝>) <여인 Ⅱ(1952)>는 <앉아 있는 여인(1952)>과 함께 추상표현주의의 명작으로 유명하다. 그리다가 중단한 것을 마이어 샤피로 교수가 권하여 다시 그렸기에 2년이나 걸렸다.


그러면, 시대의 전설에 도전한 라우센버그의 행위는 객기였을까? 이 작품은 여러 가지를 생각하게 한다. 풍자였을까? 조롱이었을까? 데 쿠닝이라는 거대한 우상을 지우는 작업이었을까? 그리고 파괴적인 행위, 혹은 창조적인 행위일까? 마지막으로 작가는 데 쿠닝일까, 혹은 라우센버그일까? 대답은 양면적일 수밖에 없다. 라우센버그는 예술의 각 장르를 넘나들며 가능한 모든 상상력을 발휘했던 인물이다. 예술은 우리의 삶과 밀접하게 연결되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고만고만한 우리의 현실을 무시하고 당시 대세였던 추상표현주의가 예술을 지나치게 거창한 것으로 포장한다고 여겼다. 더군다나 그것이 흉하거나 불 품 없는 것이 아닌데도 불구하고 왜곡한다는 점을 지적하기 위한 일종의 퍼포먼스로써 ‘데 쿠닝 지우기’를 완성했다. 또한 한 시대가 흘러간다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한 상징적 행동이기도 했다. 하지만 “추상표현주의에서 아무것도 배우지 않으려고 주의하면서도” 추상표현주의를 사랑했다고 언급했다. (피에르·아르노 코르네트 드 생 시르, <세상에서 가장 비싼 그림들>) 마치 코끼리를 생각하지 않으려 할수록 내면에 코끼리가 각인되는 것과 비슷하다고 하겠다. 


라우센버그는 평생 회화의 미래와 그 외연 확장에 힘썼다. 1950년대 뉴욕에서 추상표현주의의 허장성세에 도전한 뒤샹의 영향이 컸다. 뒤샹의 ‘재발견된 오브제의 가치’와 ‘반예술의 개념을 받아들였기에 네오 다다(Neo Dada)라 불린다. 네오 다다는 라우센버그를 포함, 뒤샹과 만났던 제스퍼 존스의 작품, 그리고 클래스 올덴버그(Claes Oldenburg, 1929~2022)의 해프닝이 이에 해당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런던 팝 아트를 이끌었던 리처드 해밀턴의 반어적 방법, 파리의 누보 레알리즘과 연관된 니키 드 생팔의 물감 던지는 작업과 장 탱글리의 고장 난 드로잉 기계 등이 뒤샹의 지대한 관심을 끌었다. 또한 이브 클랭의 <인체 측정> 등 신체를 작업에 끌어들이는 작업이 그에게서 영감을 받았다. 그러나 뒤샹이 지적했듯이 네오 다다의 오브제는 미술의 본질에 도전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미술로 만들기 위해 도입했다. 비판 정신이 생략되었다는 의미다.


라우센버그의 <모노그램(1955~1956)>

라우센버그는 초기 ‘콤바인 페인팅(Combine Painting)’ 연작을 발표했다. 박제 염소, 신문, 라디오, 시계와 같은 일상적인 오브제를 결합함으로써 회화의 공간을 확장하는 기법이다. <모노그램>을 통해 기존 회화의 범주는 벗어나 조각으로 분류될 수 없는 새로운 미술 형태를 확인할 수 있다. 장르 간 미적 계급을 허물며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단순화했다. 그는 녹슨 도로표지판, 닳아 빠진 와이셔츠의 소매, 이불 홑청, 박제 독수리까지 사용하며 연작을 발표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그림을 그릴 때 모든 자극제는 같은 가치를 지닌다. 보잘것없는 주제란 없다. ···· 회화는 미술과 삶에 연결되어 있다. 둘 중 어느 것도 만들어질 수는 없다.”


그는 미술이 캔버스에 화가의 감정을 서술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서 해방되는 데 기여했다. 아울러 캔버스에 머물러 있던 대중의 시선을 돌려놓았다. 그러자 대중은 다시 예술의 곁으로 모이기 시작했다. 캔버스와 사물의 콤바인이며, 삶과 예술의 결합’이다. 새는 알을 깨고 나와야 진정으로 생명을 얻는다. 태초에는 회화, 조각, 음악, 언어, 이런 경계가 없었다. 이런 분류는 복잡해진 현대인들의 머리에서 나오는 부질없는 문화적·지적 유희인지 모른다. 어렵게 생각되던 예술에 저항해 단순하고 대중적인 경향을 ‘팝 아트’라 부른다. 

라우센버그는 나이가 들어가면서도 변화를 두려워하지 않았다. 소위 하위문화를 재료로 삼아 예술과 일상 간의 틈 사이에서 활동하던 그는 네오 다다를 거쳐, 팝아트를 이끌게 된다. 하지만 오브제에 접근하는 방법과 목표가 같지 않기에 그는 팝 아트와 관계가 없다고 주장했다. 그렇다면 반이성, 반예술이라는 관점에서 네오 다다, 혹은 포스트모더니즘 미술이라 해도 좋겠다. 여하튼 이로써 추상표현주의는 빠른 속도로 무대에서 내려오게 된다. 당연히 라우센버그는 다음에 소개할 음악가 존 케이지와도 필연적으로 만나 서로 영감을 교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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