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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인영 Jan 02. 2023

추상표현주의와 잭슨 폴록

추상표현주의라는 용어는 1929년 MoMA의 전임 관장이자 평론가인 앨프레드 H. 바(Alfred H. Barr)가 미국에서 전시 중이던 바실리 칸딘스키의 초기 작품에 대해 사용했다. 형식적으로는 추상적이나 내용으로는 표현주의적이라는 의미의 합성어다. 그 후 1946년 <뉴요커>의 기자 로버트 코츠(Robert Coats)가 모티머 브랜트 갤러리에서 열린 전시에서 한스 호프만(Hans Hofmann, 1880~1966)의 작품을 소개하면서 이 용어를 다시 사용했다. 

호프만은 1932년 독일에서 미국으로 이주해온 화가다. 코츠는 그때까지 호프만이 주목받지 못한 이유를 기법에 있다고 지적하면서 비아냥을 섞여 이름 지었다. (바르바라 헤스, <추상표현주의>) 이후 일부의 반발이 있었으나 1940년대에서 1950년대 뉴욕에서 느슨한 연대를 짓고 있던 젊은 화가, 특히 잭슨 폴록과 윌렘 드 쿠닝(Willem De Kooning, 1904~1997), 로버트 마더웰(Robert Motherwell, 1915~1991)의 작품에 사용함으로써 일반화되었다.

 

종전 후 유럽 대가들의 활약은 지속되었다. 파리에서는 피카소와 마티스가 여전히 활동했고, 페르낭 레제가 5년간의 미국 망명을 마치고 돌아왔다. 장 드뷔페(Jean Dubuffet, 1901~1985)가 거칠고 조야하나 가공되지 않은 원생미술(原生美術, ‘아르 브뤼 Art Brut)을 자기만의 방법으로 재해석했다. 그리고 1962년 10년간의 방대한 '우를루푸’ 연작에 뛰어들었다. 독일의 막스 베크만은 마지막 열정을 쏟아붓고 있었으며, 런던에서는 헨리 무어와 프랜시스 베이컨이 유럽 미술의 부활을 견인했다. 

하지만 문화 지도의 중심점이 바뀌었다. 다양성 면에서 국제적인 문화 수도는 파리에서 뉴욕으로 근거지를 옮겼다. 미국 고유의 정체성을 확보한 추상표현주의는 제2차 세계대전 중 미국으로 활동 무대를 옮긴 초현실주의자로부터 자양분을 공급받았다. 다양성을 포용한 결과로, 이전 미술계를 이끌었던 파리 화파에 빗대어 ‘뉴욕화파’라 불렸던 까닭도 이와 무관하지만은 않다. 사실 미국은 트로츠키즘, 나아가 정치와 분리되지 않은 초현실주의가 번식하는 토양으로는 적절치 않았다. 게다가 국제적인 성격을 지녔기에 전후 정치적 변수에 따라 그룹 내 분열이 심했다. 미국 내 미로, 마송, 마그리트 같은 화가들이 점차 초현실주의 운동과 무관하게 독자적인 입지를 쌓아갔다. 브르통은 1947년 마그리트를 그룹에서 추방했다. 

초현실주의는 새로운 세대들에게 점점 호소력을 잃어갔다. 이때 초현실주의의 특징 중 ‘자동기술’법에 대해 관심을 집중한 추상표현주의가 주류로 자리 잡았다. 하지만 네덜란드 출신 데 쿠닝의 작품은 추상성이 약하다. 뉴욕에서 태어난 바넷 뉴먼은 표현주의와 거리가 멀다. 러시아에서 이민 온 마크 로스코의 색면회화는 무의식적 자동기술법을 사용했다고 보기 어렵다. 그러나 CIA까지 나선 미국 정부의 강력한 지원과 국민의 열망에 힘입어 유럽의 모더니즘을 넘어서는 새로운 미술, 추상표현주의 깃발 아래 하나로 모였다. 이렇게 스펙트럼이 넓은 미국의 추상표현주의는 ‘감정과 감각을 무의식에 의존하여 자유롭게 표현하는 미술양식’이며, 작품 내용보다 창조 행위에 가치를 부여했다고 이해하면 무난하겠다.


잭슨 폴록의 ‘액션 페인팅

<벽화(1943)>

‘미술계의 제임스 딘’ 잭슨 폴록(Jackson Pollock, 1912~1956)은 후원자 구겐하임의 요구로 <벽화>를 그렸다. 처음에 뉴욕시 타운하우스의 긴 현관의 벽화로 기획했다. 그러나 뒤샹의 제의에 의해 6m 캔버스에 완성했다. 액션 페인팅으로 진화하는 변곡점에 위치했던 이 작품은 하룻밤에 완성되었다고 알려진다. 1947년에는 드리핑 기법을 이용하여 <다섯 길 깊이>를 완성했다. 모종삽, 칼, 막대기에 물감을 묻혀 휘둘렀고, 모래, 유리가루, 담뱃재를 섞었다.

 

<No. 5(1948)>

이듬해 대표작 <No. 5>를 완성했다. 제목에 번호를 매긴 이유는 단순하다. 혼란을 더하지 않기 위해서다. (장 루이 프라델, <현대 미술>) 이 작품은 회화 역사상 개인 작품 최고가인 1억 4천만 달러(한화 약 1,588억 원)를 기록했다. 순식간에 그린 것 같은 이 작품이 뭐 때문에 그렇게 비싸냐고 묻는다면, 대답하기가 참 난감하다. 예를 들어 <벽화>의 경우 영감이 떠오르기까지 꼼짝하지 않고 기다린 반년의 시간을 대중들은 전혀 모르기 때문이다. 

이 문제는 현대 미술에서 자주 제기되는 시각이기에 부연 설명이 필요하다. 호안 미로는 1925년부터 단색조의 회화 연작을 그렸다. 그리고 35년이라는 긴 시간의 준비 과정이 지나서 자신의 ‘꿈의 색’이었던 푸른색으로 가득 찬 넓은 공간을 창조할 수 있었다. 1960년부터 1961년 사이 완성한 <블루> 연작 세 점이 그것으로, 그의 예술 세계를 종합적으로 보여주는 걸작으로 평가받고 있다. 그는 작품의 지적 준비 과정을 ‘종교의식을 거행하기 전 경건한 마음가짐’, 또는 ‘성직자가 되기 위한 준비’에 비유했다. (프랑스 국립 퐁피두센터 특별전 도록 <화가들의 천국>) 한편 르누아르는 이런 부류의 오해와 관련, 짧고 단호하게 말했다.


“드로잉을 완성하는 데 5분이 걸렸지만, 이에 다다르기까지 60년이 걸렸다.”


미국의 미술이 유럽의 그늘에서 벗어나 독자적인 세계를 당당하게 인정받은 화풍이 추상표현주의이고, 그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잭슨 폴록이다. 폴록은 “그림은 왜 캔버스를 앞에 두고 붓으로 그려야 하냐?”고 질문했다. 그리곤 종이를 입힌 메이소나이트(Masonite, 목재 펄프의 분말을 주원료로 접착제와 방수재를 혼합하여 열압, 건조한 판재(fiber board의 일종)를 바닥에 놓고 가정용 페인트를 뚝뚝 떨어뜨리며 그의 잠재된 심리 상태를 표현했다. 전통적인 화구를 포기한 이 기법이 바로 ‘드리핑’이다. 그리고 의식적인 사고의 조작이 개입하기 어려운 직접적 행위라는 의미로 ‘액션 페인팅’이라 부른다. 마송의 자동기술법, 혹은 멕시코의 벽화 화가인 다비드 시케이로스 작업실에서 영감을 받았다고 한다. 물감을 떨어뜨리고, 붓고, 흩뿌리는 행위가 예술적 기법이 될 수 있으며, 그림 표면에 에나멜페인트와 모래, 유리 등을 사용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렸다. (스티븐 파딩, <501 위대한 화가>)

작품의 주제와 배경, 인과관계, 원근법 등 기존의 개념을 전복한 그의 기법은 즉흥적 감각이 매우 중요하다. 본능적인 에너지와 불확실한 우연을 통해 창출되는 기하학적 추상이다. 그래서 폴록은 “그림 작업에 몰두할 때면 내가 뭘 하고 있는지 모른다”고 말했다. 그리고 그림은 그 자신의 삶을 갖는다며 “나는 그림이 그럴 수 (자신의 삶을 가질 수) 있도록 노력할 뿐이다"라고도 말했다. 모두 ‘무의식적’이라는 사실을 뜻하는 말이다. 그러나 유럽식 ‘추상’은 실재(자연)로부터 공통된 상(象)을 추출하는 의식적인 작업이다. 이런 관점에서 앞에서 언급한 한스 호프만이 폴록에게 ‘추상은 자연에서 나온다’고 했다. 그러자 폴락은 이렇게 응답했다.


“내가 자연이다.”


이 말은 미국 추상주의를 상징하는 말이 되었다. 호프만은 폴록의 무의식적 '자동기술법(autonomism)'을 회의적으로 보았다. 무의식도 결국은 현실의 의식과 어느 정도 연관되어 있다는 논리였다. 그러나 폴록은 무의식 세계에서 만들어지는 완벽한 자연 발생적 기법이며, 그래서 스스로를 ‘자연’이라고 했던 것이다. 그의 액션 페인팅을 본 사람은 당시 이런 소회를 밝혔다고 한다. 


“물감이 캔버스에 뿌려질 때면 마치 폭발하며 타오르는 것 같았다. 폴록은 다음의 어디에 어떤 색채를 어떻게 뿌려야 할지 결정을 내리기도 전에 물감을 뿌렸고, 그때 그의 눈에는 고통의 흔적이 역력했다.” (크리스토프 베첼, <미술의 역사>)

이렇게 정형화된 추상에서 해방된 새로운 미술 사조, ‘추상표현주의’가 탄생했다. <No. 12(1949)>는 1950년 베니스 비엔날레에서 미국관에 들어갈 작품으로 뽑혔다. 그리고 그해 한스 나무트가 드리핑(dripping) 기법으로 <가을의 리듬(No.30, 1950, 제목 그림)>을 그리는 폴록의 사진을 찍었다. 흰색, 검은색, 밝은 갈색, 청회색 등 단 네 가지 색상을 사용하여 가을 분위기를 연출한 작품이다. 이 흑백 사진 덕분에 그는 대중에게 신비로운 이미지를 주었고, 세계적인 작가로 발돋움했다. 

그러나 잘 나가던 그가 흔들렸다. 한스 나무트가 다큐멘터리 단편영화 촬영을 제의했는데, 여기에 출현하면서 리듬이 깨졌다. 그림 그리는 과정을 반복적으로 담게 되면서 생긴 현상이었다. 무의식적 자연성을 상실했다. 결국, 끊었던 술을 다시 입에 댔고, 자살에 가까운 죽음을 맞이했다. 1956년 여름, 45세에 300km가 넘는 속도로 운전하다가 교통사고를 냈다. 결과적으로 <가을의 리듬>은 드리핑 기법을 사용한 마지막 작품이 되었다. 자동기술법, 나아가 미술이란 대관절 무엇일진대 폴록을 이토록 번민하게 했을까? 작가의 의도를 구현하는 수단일까, 아니면 본능적 욕구일까? 다행스러운 일은 그의 아내이자 추상표현주의를 함께 이끈 동료 크래스너가 1985년 ‘폴록 앤 크래스너 재단’을 세워 가난한 젊은 화가들을 지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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