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스 에른스트는 1914년 8월 1일 죽었다. 1918년 11월 11일, 그는 마술사가 되어 그의 시대의 중요한 신화를 찾기를 원하는 한 젊은이로 다시 태어났다.”
제1차 세계대전 당시 4년간 독일군으로 참전했던 막스 에른스트(Max Ernst, 1891~1976)는 자서전 첫 구절에서 자신의 재탄생을 이렇게 알렸다. 전쟁을 통해 세상의 부조리에 눈을 뜬 그는 1919년 청기사 그룹이었던 한스 아르프(Hans Arp, 1886~1966)를 만나 독일의 ‘퀼른 다다 그룹’을 결성했다. 다다는 전쟁에서 나타난 인간의 광적인 살생 행위에 반대하여 일어난 반예술 운동이다. 에른스트는 콜라주와 함께 프로타주(결이 있는 물건에 종이를 대고 연필로 문지르는 기법), 그라타주(캔버스 표면의 물감을 긁어내 질감을 표현하는 기법), 데칼코마니(한쪽 면에 물감을 바르고 두 면을 함께 눌러 다른 면으로 전사하는 방법) 등의 기법을 새롭게 고안, 발전시켰다. 그리고 그의 분신이라고 할 수 있는 인간새 '로플로프(Loplop)'를 재현했다. 어린 시절 키우던 새가 죽자마자 바로 누이동생의 탄생 소식을 듣는 경험으로 인해 사람과 새를 구분하는 데 혼란을 겪었다. 로플로프는 이러한 경험이 탄생시킨 인간과 새의 결합체이다.
다다 운동이 시들해질 무렵이었다. 결혼 후 파리로 떠나기 전 퀼른에서 그는 초현실주의의 태동을 알리는 <셀레베스>를 그렸다. 철과 점토로 만든 둥근 몸통을 지닌 것이 코끼리로 여기기에 그럴듯하다. 보일러를 닮은 기계의 형태를 띠었다. 에른스트가 한 인류학 잡지에서 보았던 곡물 저장시설의 사진을 기초로 만들었다고 한다. 어쩌면 붉은 벽돌 건물이 가득한 코크타운(Coketown, 찰스 디킨스의 소설 <어려운 시절>의 가상 산업도시)에 등장하는 ‘우울한 광기에 사로잡힌 코끼리의 머리 같은’ 증기기관일 수도 있겠다. 기법상으로는 종이 콜라주의 원리를 적용했다. 그렇다고 잡지와 같은 종이를 직접 잘라 붙인 것이 아니라 마치 콜라주처럼 그렸다. 그는 1919년 자신의 콜라주 효과와 관련하여 이렇게 설명했다.
“교재를 공급하는 한 기관의 카탈로그에 관심을 두게 되었다. 수학, 기하학, 인류학, 동물학, 식물학, 해부학, 광물학, 화석학 등 온갖 종류의 교재 견본을 보았다. 그렇게 성격이 서로 다른 요소들의 부조리한 모음은 눈과 감각을 혼란스럽게 해서 환각을 불러일으켰다. 그리고 거기서 새롭고 빠르게 변화하는 상상된 의미를 부여하면서 어떤 고정된 이미지를 얻었다.” (카트린 클링죄어 르루아, <초현실주의>)
사실적인 형태다. 하지만 관계없는 것을 병치하여 새로운 이미지를 창출했다. 코끼리가 비행장처럼 보이는 곳에 우뚝 서 있다. 그런데 ‘코끼리’라고 그대로 받아들이기 어려운 기괴한 형상이다. 상부 구멍으로 연결된 코가 주름 잡힌 호스로 만들어졌으나 머리에 뿔이 났다. 소라고 해도 무리가 없다. 머리가 없는 여성 마네킹(?)이 코끼리에게 수신호를 보낸다. 그리고 오른편 탑 모양은 남근을 상징한다. 그렇다면, 뿔 달린 수소로, 제우스가 변장한 황소로 해석할 수 있다. 사실 이 괴물 ‘셀레베스(Celebes)’는 에른스트가 어릴 때 한 남학생이 쓴 음란한 시의 한 구절에서 취한 것이라고 한다. 그런데 왼편 상단에 두 마리 물고기가 헤엄친다. 이로써 당연히 육지라고 생각했던 배경이 물속으로 바뀌었다. 우울과 불안을 자아내는 초현실 세계다. 작품은 ‘런던 테이트 모던’에 전시되고 있다. 미술관은 템즈 강가의 화력 발전소였다고 하니 잘 어울리는 작품이라 하겠다.
1944년 여름, 에른스트는 미모의 연인 도로시아 태닝과 함께 갤러리 주인 줄리언 레비가 있는 롱아일랜드에서 지낼 때 체스의 세계에 몰입했다. <왕비와 놀고 있는 왕>이 이때의 작품이다. 체스는 마르셀 뒤샹이 프로 수준이다. 그러나 에른스트는 게임의 미술적·문학적 특성에 관심을 기울였다. 가장 좋아하는 루이스 캐럴의 <겨울 나라의 앨리스>에서 주인공을 이끈 세계와 체스 말들이 사는 세계를 연결했다고 전한다. 하지만 내용은 동화처럼 순수하지 않다. 성적인 의미가 내포되었다. 머리에 왕관 대신 뿔을 달고 있는 체스 말에게서 관능적이면서 폭력적인 미노타우로스를 연상할 수 있다. 왕의 벌린 팔에서 권위적인 태도가 엿보이며, 여왕을 감싸 강렬한 소유욕과 동시에 보호 본능을 나타낸다. 잘 생기고 사랑과 예술을 위해 거칠 것이 없었던 에른스트의 자화상이다.
체스판 위에서 벌어지는 게임을 역사라는 무대에서 발생하는 권력 투쟁, 즉 당시의 비극적인 무력 충돌을 이미지화했다. 확대하여 해석하면, 각자의 삶의 이면에 자신도 모르는 사이 통제·조종되는 어떤 강력한 힘이기도 하다.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자 문득 ‘에른스트 주위의 많은 여성 중에 그가 가장 보호하려고 했던 인물은 누구였을까?’라는 질문이 고개를 든다. 개인적으로는 페기 구겐하임(Peggy Guggenheim, 1898~1979)을 추천한다.
에른스트는 제2차 세계대전 중 파리에서 ‘적대적 외국인’으로 분류되어 체포, 감금 등 곤욕을 치른 후 미국 망명을 모색했다. 이때 스페인 마르세유에서 구겐하임을 만났다. 만나자마자 그의 예술적 천재성을 알아본 구겐하임은 그 자리에서 최근에 그린 그의 전 작품을 구입했다. 흥미롭게도 그녀는 남성을 예술품 대하듯 수했다. 많은 남자를 통해 자신의 공허함을 채웠다. 따라서 그녀에게 에른스트는 성과 예술, 모두를 충족하는 매력적인 남성이었다. 1941년 3월 24일 브르통 부부를 비롯하여 마송부부, 제일 마지막으로 뒤샹이 마르세유를 떠나 미국으로 향했다. (제목 그림은 <가정의 천사 혹은 초현실주의의 승리(1937)>이다)
구겐하임은 에른스트와 초현실주의 예술가를 도와 포르투갈 리스본을 출발했다. 배는 1941년 7월 14일 뉴욕에 도착했다. 미국에 전위예술의 뿌리가 내리는 순간이었다. 그해 12월, 그녀는 에른스트의 세 번째 부인이 되었다. 1차 대전 종전 후 결혼한 에른스트의 첫 번째 부인 루이제 슈트라우스는 유대인으로, 1944년 아우슈비츠에서 죽었다. 1922년 에른스트가 앙드레 브르통 등 초현실주의자를 만나 활동할 목적으로 파리로 불법 이민을 떠날 때 아들과 함께 퀼른에 남겨진 불행한 여인이었다. 에른스트 역시 구겐하임에게 세 번째 남편이었을 거다. 그러나 두 사람은 2년도 안 되어 헤어졌다.
대한민국 같았으면, 두 사람 모두 사회에 제대로 발붙이지 못했으리라. ‘도덕성’, 그중 강박적이고 때론 위선적인 성 관념 때문이다. 뉴욕시에 살았던 뒤샹과 샤갈 등과 함께, 에른스트는 미국 추상표현주의 발전에 영감을 주었다. 당시 무명작가였던 잭슨 폴락이 대표적이다. 에른스트는 1909년 본 대학에 입학해서 심리학과 정신과 공부를 했을 때 정신병 환자가 그리는 무의식적 작품 세계에 매료된 적이 있다. 이 경험은 프로이트적인 자유연상 기법에 관한 흥미로 연결되었는데, 폴록의 ‘액션 페인팅’에 영향을 미쳤다.
이런 맥락을 이해하고 다시 <왕비와 놀고 있는 왕>을 보자. 체스판을 당시 미국 화단과 연결하면, 에른스트가 초현실주의의 왕의 역할을 담당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러면 구겐하임은 당연히 그가 보호해 주어야 할 화단의 왕비로 생각해도 무리가 없다. 물론 어쭙잖은 내 생각이다. 당시 미국 내 미술 환경은 척박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경제 성장을 배경으로 활성화되기 시작하였으나 시장을 지배한 것은 유럽 미술이었다. 초현실주의는 주로 쥘리앵 레비 갤러리를 통해 미국으로 건너왔다. 레비는 1931년에서 1932년 사이 첫 번째 초현실주의 그룹전을 개최하여 달리의 <기억의 영속성>의 명성을 드높였다. 이런 배경이 브르통을 비롯한 초현실주의자들의 미국 정착을 수월하게 했다. (매슈 게일, <다다와 초현실주의>)
하지만 미국 회화의 변화를 주도한 인물은 페기 구겐하임이었다. 그녀는 뉴욕 구겐하임 미술관을 설립(1941)한 솔로몬 R. 구겐하임의 질녀였다. 미국의 2차 대전 참전으로 잠시 주춤거리기도 했으나 작품 구입에 끊임이 없었다. 심지어 전쟁 중임에도 하루 한 점 꼴로 구입했다. 그리고 화가를 직접 위촉하여 활동을 도왔다. 흥미롭게도 이런 구겐하임을 곁에서 도와준 인물 중에는 에른스트의 아들이자 화가였던 지미 에른스트가 있다. 그는 영어를 하지 못했던 브르통을 대신하여 후원자들이 젊은 미술가의 미래에 주목하도록 노력했다. 1943년 10월에 문을 연 그녀의 ‘금세기 미술 화랑’이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그녀는 갤러리를 초현실주의적 분위기로 디자인했고, 유럽 추상화와 초현실주의 컬렉션을 전시함으로써 장래 '뉴욕화파'의 탄생을 도왔다.
1947년 구겐하임이 이탈리아 베네치아로 돌아갈 무렵에는 잭슨 폴록 외에도 이미 한스 호프만, 마크 로스코, 클리퍼드 스틸, 윌리엄 배지오티스, 로버트 머더웰 등 수많은 미국 추상표현주의자의 첫 개인전을 열어주었다. 이렇게 그녀가 견인한 미국 미술은 화상 베티 파슨스, 찰스 이건, 새뮤얼 쿠츠, 그리고 시드니 재니스 등이 갤러리를 잇달아 개관하면서 발전을 이어갔다. 1950년대 초반 약 서른 곳이었던 갤러리가 10년 뒤 열 배 이상 증가했다. (바르바라 헤스, <추상표현주의>) 비로소 미국은 '돈만 많은 돼지'라는 유럽의 냉소적인 시선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