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세기 유럽의 인구는 급증했고, 사회 혼란이 가중되었다. 영국은 대안으로 신대륙 아메리카 식민지로 이주를 추진했다. 1607년 이민자 105명이 상륙하여 버지니아를 건설했다. 1620년에는 종교적 박해를 벗어나려는 청교도 41명을 포함, 101명이 180톤짜리 메이플라워호를 타고 오늘날 매사추세츠주 코드곳에 상륙했다. 이렇게 18세기 중반까지 미국으로 건너간 인구가 약 70만 명 정도로 추정한다. 당시 영국 인구의 약 10%다. (우야마 다쿠에이, <너무 재밌어서 잠 못 드는 세계사>) 유럽 이주민으로 인 미국의 인구는 1775년 독립 혁명 때 300만 명까지 증가했다. 그중 영국은 네덜란드, 덴마크 등의 식민지를 합병하면서 동부 연안 13개 식민지를 지배했다. 그리고 1763년 7년 전쟁에서 승리하면서 프랑스로부터 북쪽 캐나다 지역을 넘겨받았다.
이렇게 북아메리카 전 지역을 장악한 영국이지만, 전쟁을 통해 국가 부채가 두 배로 증가한 상황이었다. 식민지인을 마치 노예처럼 살리지도 죽이지도 않으면서 세금을 짜냈다. 1765년 각종 증명서에 부과하는 인지조례를 제정했다. 1773년에는 재정난에 빠진 동인도 회사를 구제하기 위해 차 조례를 공포했다. 식민지인들의 불만이 폭발했다. ‘보스턴 차 파티(Boston tea-party) 사건’이다. 동인도 회사의 배를 습격하여 342개 차 상자를 바다에 던져버렸고, 이때부터 미국민은 비싼 차 대신 커피를 마셨다.
1년 반이 지난 1775년, 영국과 아메리카 식민지 사이에 전쟁으로 발전했다. 처음에는 ‘독립’을 목표로 하지 않았다. 조지 워싱턴을 비롯한 지도자들은 세금 부과와 무역에 대한 규제를 철폐해 줄 것을 원했다. 프랑스 삼부회처럼 이곳에서도 구호가 ‘대표권 없는 과세는 없다’였다. 그러나 청원은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1776년 7월 4일 필라델피아에서 유명한 <독립선언서>가 발표되었다. 존 로크의 정치사상 아래 기본적 인권과 저항권을 기초로 훗날 3대 대통령이 되는 제퍼슨이 작성하고 56명이 서명했다. 그러나 미국은 제철이 금지되어 무기가 빈약했다. 프랑스를 비롯하여 네덜란드와 스페인이 미국을 도왔다. 1781년 미국과 프랑스 연합군이 요크타운 전투에서 영국에 승리함으로써 이듬해인 1783년 파리 강화 조약을 체결할 수 있었다. (제목 그림 ; 에마누엘 로이체의 <델라웨어강을 건너는 워싱턴(1851)>)
신생 미국의 첫 외교관 벤저민 프랭클린의 노력이 결실을 보는 순간이었다. 그는 8년간 파리에 머무르면서 루이 16세에게 지지를 호소하는 한편, 네덜란드에서 돈을 빌리고, 스페인과의 동맹을 끌어내는 등 맹활약했다. 아메리카 13개 식민지는 미합중국, 즉 독립 공화국이 되었다. 스위스의 국가 규모가 작은 점을 감안하면, 현대 세계에서 최초의 공화국이었다. 네덜란드는 공화국이라 하지만, 귀족 계급이 장악하고 있었다. (J. 네루, <세계사 편력 2>)
1787년 삼권분립을 특징으로 하는 미합중국이 성립하였고, 1789년 워싱턴이 초대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독립을 달성한 미국은 1803년 나폴레옹으로부터 루이지애나를 1,500만 달러에 사들여 국토 규모를 두 배로 확장했다. 연이어 스페인으로부터는 플로리다(1819)와 텍사스(1845), 멕시코로부터는 캘리포니아와 유타(1848), 그리고 애리조나와 뉴멕시코를 합병(1853)했다. 1867년 재정인 악화한 러시아로부터 1헥터르당 5센트라는 파격적인 가격으로 알래스카를 720만 달러에 매수했다. 1898년 마지막으로 하와이를 합병함으로써 오늘날의 국토 모습을 확정 지었다.
1823년에는 ‘먼로(Monroe)주의’를 발표할 정도로 성장했다. 미국의 전통적 외교 방침이 된 불간섭주의 일반을 가리키는 정책이다. 유럽과 상호주의를 표명한 듯하나 독립운동을 전개하던 남아메리카에서 유럽 열강의 개입을 배제하려는 의도였다. 이 지역은 프랑스와 이탈리와 함께 라틴민족인 포르투갈과 스페인이 양분했기에 라틴 아메리카로도 불린다. 전 세계 육지 면적의 15% 이상, 인구의 6%를 차지했다. 따라서 그들의 독립은 세계사적으로도 중요한 사건이었다. 1830년까지 브라질은 포르투갈의 지배로부터, 여타 지역 모두 스페인의 통치에서 벗어나 독립했다. 대신 수많은 공화국이 미국의 영향력 아래 놓였다.
유럽이 빈 회의 이후 아시아·아프리카 식민지와 오스만 제국의 영토에 집중할 때 미국은 착실히 힘을 비축했다. 유럽 각국의 이민 촉진과 미국의 넓은 땅과 고임금이 합쳐져 인구가 늘어나고 새로운 주가 만들어지면서 연방 정부가 확장되었다. 물론 백인에게만 해당한 ‘기회의 평등’이었다. 게다가 북부의 상공업자와 남부의 농업경영자 간 갈등이 깊어만 갔다. 1860년 링컨이 대통령으로 당선된 후 결국, 남북전쟁(1861~1865)이 터졌다. 전쟁 중인 1863년 1월 1일 노예 해방을 선언했다. 독립 전쟁 때 50만 명이던 노예는 310만 명으로 늘어나 있었다. 여기서 우리는 아프리카에서 미국으로 끌려온 흑인 노예의 수는 무려 1,500만 명이었다는 사실을 연관 지을 줄 알아야 한다. 그들의 엄청난 희생이 미국의 성장을 견인했다는 방증이다. 하지만 링컨의 목적 또한 노예 제도 폐지에 맞춰져 있지 않았다. 연방을 지키면서,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한 수단이었다. 그리고 노예 해방 선언은 반란 주를 대상으로 시행한 임시 조처였다. 1865년에서 1870년 사이 헌법 수정이 이루어졌으며, 이로써 노예제도는 종말을 고한 듯했다.
그러나 백인 보수파가 장악한 남부의 주 정부는 교묘하게 흑인 투표권을 제한했다. 소위 ‘짐 크로우 법’을 만들어 문맹 시험을 명분으로 선거권을 광범위하게 박탈했다. 20세기 민권운동과 1964년 미시시피 자유 여름 운동 등이 있고 나서야 1965년에 투표권법이 통과되었다. 링컨의 선언 이후 100년 만이다. 여하튼 내전은 끝났다. 당시 미합중국의 전체 인구는 약 3,000만 명이었는데 60만 명의 사망자를 냈다. 많은 청년이 목숨을 잃었고, 남부의 고결한 가치관은 무너졌으며, 나라는 빚더미에 올라앉았다. 다행스럽게 연방정부가 전쟁 중임에도 토지를 무상으로 주며 서부 개척을 독려했다. 특히 1869년에 대륙횡단철도를 개통하면서 광활한 서부에서 지역적, 인종적 유대감을 형성·확장했다. 석탄, 철, 석유 등 풍부한 자원을 바탕으로 착실하게 공업 발전을 이루면서 위기를 벗어나 19세기 말 세계 제1위의 공업국이 되었다.
영국은 섬유공업에서 성공을 거둔 데 안주하여 과감한 설비 투자가 이루어지지 않았고, 중화학공업으로 전환이 늦었다. (사토 마사루, <흐름을 꿰뚫는 세계사 독해>) 제1차 세계대전이 진행된 지 2년 만에 미국은 재정이 바닥난 영국 사절단을 맞았다. 그리고 혁명으로 인해 러시아가 전선을 이탈한 1917년, 미국은 전쟁에 뛰어들었다. 그러나 뒤늦게 참전했음에도 최종 종결자의 역할을 수행했고, 전후 세계 최대 채권국 위치에 올라섰다. 1912년부터 1927년까지 15년 동안 국부의 총액은 1,872억 3,900만 달러에서 4천억 달러로 뛰어올랐다. 1927년 인구가 대략 1억 1,700만이었으므로 1인당 3,428달러가 되는 셈이다. (J. 네루, <세계사 편력 3>) 세계 금융의 중심도 런던의 ‘시티’에서 뉴욕을 ‘월가’로 이동했다.
그러나 세계 최고의 지도국으로서 마음의 준비는 갖춰지지 않은 상태였다. 제2차 세계대전 참전을 망설였다. 하지만 운명처럼 또다시 전쟁에 참여했고, 전후 냉전 시대에 접어들자 자유세계를 대표하는 유일한 경찰국가로 성장했다. 그리고 유럽의 지배계급을 사로잡았던 두려움, 즉 소련의 ‘볼셰비즘(Bolshevism)’에 맞서는 역할을 자임하기에 이르렀다. 부(富)뿐만이 아니었다. 미술은 피렌체→플랑드르 브뤼헤→네덜란드 암스테르담→프랑스 파리로 옮겨 다니다가 제1, 2차 세계대전을 계기로 뉴욕에서 둥지를 틀었다. 르네상스를 이끌었던 피렌체의 확장형이다. 공화국이었고, 메디치 가문과 같은 거부가 즐비했다. 게다가 감히 넘볼 수 없는 군사력까지 지니고 있어 다양한 문화를 지닌 인재들이 모여들었다.
이쯤에서 흥미로운 의문이 생긴다. 문화가 발전하려면, 부가 먼저일까? 자유가 우선일까? 물론 둘 다 갖췄을 때 폭발적이다. 그러나 내밀하게 들여다보면, 부도 구성원의 다양성이 활성화된 곳으로 흘러 들어갔다. 역사가 증언하는 사실이다. 1934년 당시 현존하는 가장 위대한 수학자 다비트 힐베르트가 한 연회에 참석했다. 옆자리에 앉은 나치 정부의 교육부 장관 베른하르트 루스트가 “이제 유대인의 영향력에서 해방되었는데, 괴팅겐대학 수학과는 잘 되어 갑니까?”라고 물었다. 힐베르트는 이렇게 대답했다.
“괴팅겐대학의 수학과요? 이제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다양성은 곧 생존이다. 독일의 인종 차별은 스스로에 치명상을 안겨주었다. 치열한 검증과 토론을 통해 발전하는 과학은 장애를 일으켰다. 강력한 산업기반과 공학 전통을 가지고 있음에도, 독일은 새롭게 부상하는 영국과 미국의 혁신적인 과학기술을 따라잡을 수 없었다. 이제 신생국 미국에서 미술이 풍성해지는 과정을 살펴보면서 이 논리가 참인지 거짓인지 살펴보기로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