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에 들어서도 ‘미술이란 무엇인가?’라는 본질적인 질문이 반복되고 있었다. 아니, 미술이 존재하는 한 끝없이 고민해야 하는 문제일지 모른다. 다다를 비롯한 현대미술은 대체로 미를 거부하는 입장을 취했다. 그러나 이는 미적 속성과 아름다운 형식에 얽매이지 않고 개념과 의미를 구현하려는 예술사의 진보적 양상일 뿐이다. 미를 완전히 축출한 것이 아니며 그럴 수도 없다. (엘렌 디사나야케, <미학적 인간>) 인상주의와 사실주의가 지배하던 신생국 미국 화단에서 회화의 외연을 넓히는 도발이 저질러졌다. 미국이 고립주의를 청산하고 제1차 세계대전 참전을 공표한 1917년 4월이었다.
물꼬를 튼 장본인은 마르셀 뒤샹(Marcel Duchamp, 1887~1968)이며, 작품은 <샘>이다. 뒤샹은 신분을 숨긴 채 남성용 소변기에 ‘R. MUTT’라고 서명했다. 그리고 위치만 바꿔 놓은 채 뉴욕 독립미술가협회 전시회에 출품했다. ‘MUTT’는 당시 유명한 위생도기 제조회사 이름이며, 위치를 바꾼 것은 소변기의 기능을 제거했다는 의미다. 기존의 관점에서 보면 예술답지 않은 예술의 등장으로, 심사위원들에게 “변기도 예술품이 되겠습니까?”라고 화두를 던진 것이다.
그는 <계단을 내려오는 누드 Ⅱ(1912)>를 통해 이미 전위적인 모더니스트들도 얼마든지 독단적이며 폭력적일 수도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있었다. 뒤샹은 그들의 위선에 저항했고, 나아가 캔버스에 유화 물감을 사용하는 회화의 물성(物性)을 극복하고 싶었다. 협회는 어떤 미술가든지 6달러의 회비를 내면 검열 없이 전시할 수 있다고 했기에 위원들은 전시 방법에 관해서만 결정해야 했다. 하지만 그들은 머트 씨의 작품을 수용할지에 대해 투표했고, “미술 작품으로 정의될 수 없다”고 결정했다. (토니 고드프리, <개념 미술>)
뒤샹은 전시회가 끝나고 알프레드 스티글리츠의 도움을 받아 급진적인 잡지 <291>을 통해 자신의 의도를 알렸다. 그리고 선동적인 제목의 잡지 <장님(The Blind Man)> 특별판에 베아트리스 우드의 논설을 통해 위원회의 기만성을 폭로했다. 그는 뒤샹의 친구이자 동료였다. 뒤샹 또한 독립미술가협회 위원이자 이 잡지의 공동 편집인이었으니 결과를 예상하고 저지른 의도적인 물의였다. 한편 훗날 작가가 굳이 직접 그리거나 만들지 않아도 된다는 발상과 관련 뒤샹은 BBC-TV와 인터뷰를 통해 “예술을 자유롭게 해주고 싶었다”고 말했다. 여기서 자유란 관행으로부터의 해방이다. 주의해야 할 점은 소위 아방가르드를 자처하는 무리의 독선적인 태도도 이에 포함된다는 사실이다.
<샘>은 인상주의 첫 전시회와 마찬가지로 시각적인 미적 기준에 대해 회의감을 거칠게 드러낸 최초의 작품이다. 이로써 배후에 있던 작가의 개념이 비물질적 작품으로 전면에 등장했다. 이후 미국만이 아니라 현대 미술 전반에 영향을 미쳤다. 그는 화가이자 조각가이고, 철학자였다. 행동에 앞서 깊이 생각하고, 결정했으면 용기 있게 행동할 줄 아는 혁신가였다. “심미적인 즐거움은 오히려 피해야 할 위험”으로 생각했다. 1913년 이젤화를 그만두기로 결심한 이후 회화에 비물질적 매체인 ‘개념’을 등장시켰다. 눈에 보이는 물리적인 작품이 아니라, 어떤 생각과 아이디어(개념)를 가지고 작가가 작업했느냐는 점이 평가받는 출발점이었다. 다만 ‘개념 미술’은 1967년경 처음 일반적으로 쓰이기 시작했으며, 1966~1972년에 정점이자 절정이었다.
대량 생산된 기성품이 얼마든지 예술 작품이 될 수 있다는 발상은 <자전거 바퀴>에서 처음 시도했다. 이후 남성용 변기, 기계 등을 동원했는데, 그것은 개념을 전달하기 위한 일상적 사물, 즉 ‘오브제’였을 뿐이다. 어려운 말로 ‘결과적 사물’이라고 부른다. 사실 오브제는 이전에 피카소와 브라크도 사물과 회화를 접목하는 ‘콜라주’ 기법에서 사용했다. 천, 신문 조각을 캔버스에 붙이는 형식이었다. 그러나 뒤샹은 사물을 단지 소재 정도로 활용하는 차원을 넘어 사물 자체에 새로운 가치를 부여했다.
뒤늦게 대량 생산된 기성품도 예술작품으로 인정받았고, ‘레디메이드’란 용어가 사용되었다. 사실 튜브형 물감도 공장에서 만든 기성품이다. 따라서 모든 화가가 결과적으로 기성품의 보조를 받는 거 아니냐는 그의 주장에 설득력이 실린다. 뒤샹은 미술을 뇌, 즉 지적인 산물로 보았다. “좋은 그림이란 지성이 그 일부를 이룰 때 증명될 수 있다”고 했다. 이제 예술계에서 아이디어와 관련한 실험이 활발해졌다. 회화의 전통적·관행적 가치를 부정하는 ‘반(反)예술’ 운동, 즉 ‘다다이즘’의 확산이다.
이런 기발한 얘기를 듣다 보면, 문득 뒤샹을 최근 작가로 여기기 쉽다. 그러나 피카소와 동시대 인물이다. 그의 <계단을 내려오는 누드 Ⅱ>는 입체주의를 거의 몰랐던 미국인에게 엄청난 충격을 주었다. 뉴욕에서 시작한 아모리 쇼는 시카고, 보스턴을 순회했으며, 거의 7만 5,000명 정도가 관람했다. (매슈 게일, <다다와 초현실주의>) 당시 파리에 도착한 미국인이 맨 처음 하는 말이 "마르셀은 잘 지내나요?"일 정도였다고 한다.
1915년부터 아예 미국으로 이주하여 활동한 그는 '취향이 굳어지는 것을 피하고자 부단히 자기 자신을 부정'하고자 애썼다. 흥미로운 레디메이드 작품은 <LHOOQ(1941~42)>다. 엽서(19.4x12.2cm)에 인쇄된 <모나리자>의 얼굴에 연필로 수염을 그렸다. 제목의 이니셜을 프랑스어로 읽으면 ‘그녀는 뜨거운 엉덩이를 가졌다’는 문장으로 들린다. 천재 미술가 다 빈치와 ‘걸작’에 대한 숭배를 경멸하면서, 성에 대한 엄격한 문화를 비판했다. 심지어 뒤샹은 ‘여성’이 되어보기도 했다. 여장을 한 채 사진을 찍고, 조각 작품에 ‘로즈 셀라비(Rrose Selavy)'라 서명하며 여성으로서 삶을 살았다. 실제 삶에서도 개념을 바꿔보는 것, 그에게는 모험이자 작가의 의무였다. 그러나 미국의 개념·미니멀리즘 미술가 솔 르윗(Sol LeWitte, 1928~2007)의 지적은 통렬하다.
“개념 미술은 개념이 훌륭한 경우에만 훌륭하다.”
그는 1963년 회고전에서 <전라의 이브 바비츠와 체스를 두고 있는 마르셀 뒤샹>은 또 다른 신선함을 선물했다. 그는 1923년부터 1933년까지 세계 체스연맹의 국제 올림피아드 대회에서 프랑스 대표팀 선수로 활동했다. 우승도 여러 번 하면서 회화는 등한시한 채 체스에만 빠져 지내기도 했다. 하지만 이 퍼포먼스는 특정한 메시지보다 예술 형식의 변화를 눈여겨보아야 한다. 그는 곧 사라질 순간을 회화의 도구로 선택한 것이다.
함께 체스를 두고 있는 여성은 미술관장 월터 홉스의 친구 이브 바비츠라는 여인이다. 그러나 마네킹처럼 얼굴을 가리고 이름도, 목소리도 없는 타자(他者)일 뿐이다. 사진가 줄리언 와서(Julian Wasser)도 이 점을 인식하고 머리칼로 얼굴을 가린 이미지로 찍었다. 이런 중립적 여성 이미지는 개념 미술의 원형이 되었으나 1960년대 말 페미니즘의 집단 운동이 시작되면서 거부적인 반응이 나타났다.
생각이 익숙해지면, 참신성은 숨을 죽이는 법이다. 하지만 그의 실험정신은 예술과 삶에서 일관적이었다. 뒤샹은 체스를 즐기며 지냈고, 1968년 그의 아파트에서 조용히 사망했다. 소재와 형식에 얽매이지 않았던 그는 말년에 예술에 대한 집착마저 놓아 버림으로써 진정한 자유인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생전에 “예술가로서 살아오며 가장 만족스러운 것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뒤샹은 이렇게 답했다고 한다.
“그림을 그린 것, 삶을 이해하고 삶의 방식(modus vivendi)을 창조하기 위해 예술을 한 것, 살아 있는 동안 그림이나 조각 형태의 예술작품들을 창조하는 데 시간은 보내기보다는 차라리 내 인생 자체를 예술작품으로 만들기 위해 노력한 것이 가장 만족스럽다.”